21그램
1.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 몸무게를 잰다, 빙고! 잠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행동은? 체중을 잰다, 빙고! 얼마 전 사은품으로 매끈한 체중계가 생겼다. 그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체중계에 오르고 있다. 밥 먹기 전에 재고 밥 먹은 후에 재본다. 그러면 식사로 섭취한 음식의 무게가 나온다. 외출 시 옷을 입기 전에 재고 옷을 다 입은 후에 잰다. 그러면 걸치고 나가는 옷의 무게가 나온다. 그리하여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체중계로 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기력, 외로움, 슬픈 마음, 욕심, 하품, 열병. 체중계의 기준으로 볼 때 세상은 두 부류로 나뉜다. 무게를 잴 수 있는 것들과 잴 수 없는 것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들고 체중계에 오른 나는 멈칫하고 만다. 영혼의 무게, <21g>! 체중계에서 내려온 난 그대로 극장으로 향한다.
2. 심장 이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교수 폴, 남편과 두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 크리스티나, 화려한 범죄전력을 뒤로하고 기독교에 귀의해 새 삶을 꿈꾸는 잭. 이제 다른 사람을 교화하려고 애쓰는 잭에게 신(GOD)은 경품으로 멋진 자동차를 선사한다. 하지만 차를 선물한 신은 잭에게서 직업을 빼앗더니 급기야 세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잭은 당황한다. 도저히 신을, 인생을,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 그는 자수한다. 잭의 차에 받힌 세 인물은 크리스티나의 두 딸과 남편이다. 크리스티나는 절망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도 지탱할 수도 없다. 마약에 의지하며 스스로 고립된다. 크리스티나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순간 폴은 그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는 연장된 삶을 자기만을 위해 살 수 없다. 그는 기증자를 찾아 나선다. 그는 좌절한 크리스티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잭을 찾아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삶의 아이러니가 있다. 잭은 크리스티나의 평온한 삶을 망가뜨린 장본인이지만 폴에게는 새로운 삶의 기회-새심장-를 선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3. 크리스티나(나오미 와츠)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크리스티나의 상반된 두 모습에 당황한다. 마냥 행복에 겨워하는 그녀와 마약에 찌든 그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행복했던 그녀는 이제 혼자 남겨진 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치유될 수 있을까? 크리스티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의 불행으로 새 삶을 얻은 폴의 동정을. 용서할 수 없다. 자기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전과자 잭을. 그녀는 모른다. 잭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단지 신의 농담이라는 것을.
4. 폴(숀 펜)
심장기증자를 기다린다는 건, 기증자의 불행을 바라며 사는 것이다. 폴은 타인의 불행을 기다린다. 그는 비참하다. 크리스티나가 절망하던 바로 그 날, 그는 새 삶을 얻는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다. 대신 그는 불행에 빠진 크리스티나를 돕고 싶다. 그녀대신, 잭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새 심장은 새로운 고통을 준다. 이 고상한 교수의 손에 권총을 쥐게 만든다.
5. 잭(베네치오 델 토로)
잭은 전과자다. 기독교에 귀의한 뒤로 청소년 범죄자 교화에 집착한다. 모든 일상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잭. 하지만 신의 선물이라고 믿었던 경품 자동차가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는 자수하여 자신의 죄값-세명을 죽인-을 치른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와 머리에 총을 겨누더니 너 때문에 네 명의 영혼이 상처입었다고 외친다. 아무도 잭의 아픔을, 그의 고뇌를, 절망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신조차도. 그는 그저 한명의 개성없는 범죄자일 뿐이다.
6. 영화 말미에 감독은 21g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다. 사람이 죽은 뒤 빠져나가는 무게 21g이 영혼의 무게라고. 하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건 영혼의 무게 자체가 아니라 그 무게가 21g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이유나 삶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한 인간의 삶은 사소하고 가볍기만 하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개인에게 있어선 전부인 삶의 무게가 사실 새털같이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삶의 가벼움에 짓눌리게 된다. 뭐 그런 얘기다. 크리스티나는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는 순간 이미 영혼을 잃고 만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심장이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생명을 연명하는 폴은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살고 있다. 생명은 붙어있으나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영혼을 잃는 순간 폴은 새로운 삶을 얻는다. 죽었던 영혼이 되살아난다. 그는 덤으로 주어진 삶을 크리스티나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전과자 잭은 영혼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개심한 그는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교통사고 후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다. 폴이 찾아와 총을 겨눈다. 크리스티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넌 영혼의 살인자라며. 영혼의 구원을 믿었던 잭은 그만 당황하고 만다. 삶의 불가해성 앞에서 머뭇거린다. 이 모든 것이 단지 21g밖에 안된다는 영혼에서 비롯된다. 비록 21g이지만 그 21g은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21g일지도 모른다.
7. 폴은 크리스티나에게 시 한편을 들려준다. ‘당신과 나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지구가 자전을 합니다. 지구 스스로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우리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연인들은 지금의 사랑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자신의 선택이 운명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21g>에서 담아내는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가벼운 우연, 무질서로 가득차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커플이 우리는 거듭된 일곱 번의 우연끝에 만났다고 고백할 때 그 우연은 이미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고 운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