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1. 기억컨대 어린 시절 내 주위엔 영웅들의 모험담들이 넘쳐났다. 아이들은 멋진 주인공과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 커다란 용과 싸우고 어려운 주문을 풀어내고 숨겨진 황금을 한배 가득 실어오는 꿈을 꾸곤 했다. 내가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좋아하는 건 이 영화가 색다른 환타지 모험담이기 때문이다. 반지 원정대는 모험을 떠난다. 절대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러 떠난다. 황금을 구하러 떠나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아마도) 모험담이다. 아무도 절대반지의 유혹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누가 반지를 운반하여 파괴할 수 있을까? 그런 의지를 가진 존재는 오로지 호빗뿐이다. 가장 작고 나약해 보이는 족속, 호빗!
2. 호빗 프로도가 운명의 산 분화구에다 절대반지를 버리는 힘든 임무를 맡는다. 중간계의 미래가 담긴 일이다. 반지에 대한 욕망은 나날이 거세진다. 그 무게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충직한 샘을 오해해 쫓아버리기도 하고, 골룸의 꾀에 빠지기도 한다. 제 정신이 아니어서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힘든 싸움의 막바지에서 최고의 유혹이 온다. 반지를 불길속에 버리는 대신 끼고 만 것이다. 하지만 골룸이 덤벼들어 반지를 낀 손가락을 깨문다. 반지와 함께 분화구로 떨어진 골룸덕에 절대반지를 제거한 프로도. 평생 잘린 손가락을 보며 자신의 나약함을 기억하리라. 샘은 지칠 때마다 샤이어 숲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프로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절대반지 때문이다. 반지를 끼면 모습이 사라진다. 기억도 사라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이 과연 그 사람일까? 절대반지를 끼는 것, 부와 권력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톨킨은 경고한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거다. 그리하여 조그맣지만 소중한 자신의 세계하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반지를 제거한 후 용암이 흘러내리는 산중턱에서 프로도는 샤이어숲을 기억해낸다. 샘은 사랑하는 호빗여인에 대해 고백한다. 반지에서 멀어지자 기억과 친구와 자기자신의 세계가 돌아온다. 멋지다.
3. 어느 날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를 사랑한 나머지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우린 자주 거울을 본다. 거울 속 자신과 대면한다. 그리곤 자기 연민에 빠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현대인은 모두 나르시시스트이다. 멋지고 올바르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수 없음을 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대신 자기연민에 빠진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아이들은 프로도에 감정이입하고 어른일수록 골룸에 감정이입하는 경향이 있다. 어른들은 자신이 더 이상 프로도를 닮지 않았음을 안다. 닮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욕망에 충실한 골룸쪽이 자신에 가깝다. 맘도 편하다. 약간의 양심은 남아있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시기하고 싸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욕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우린 골룸을 닮아있다. 골룸은 자기연민에 빠진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4. 소신이 있어 일을 밀어붙일 때가 있다. 본의 아니게 대세를 거슬러야 할 때가 있다. 나름대로 버텨 보지만 외로움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다.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 때 자기와 똑같이 분투중인 사람이 한명 더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반지의 제왕>은 외롭게 나름의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헌사다. 내가 이 곳에서 불의와 싸울 수 있는 건 지구 반대편 어느 곳에서 똑같이 애를 쓰고 있을 반지원정대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죽음의 산을 향하고 있는 프로도 때문이다. 프로도 또한 이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건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돌보는 충직한 샘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사우론 군대의 측면을 향해 감동적으로 돌진하는 로한의 왕 때문이고, 사우론 교란작전을 위해 적은 숫자로 모르도르로 진격해온 아라곤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둡다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함께 분투하는 사람이 포기한 것도 아니다. 단지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어둠을 뚫고 힘차게 달려오고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내 앞에 불쑥 나타날 지도 모른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샘의 역할이면 샘이 되면 되고, 프로도면 프로도가, 피핀이라면 묵묵히 피핀이 되면 그만인 것이다. 투덜거릴 일도, 조급할 일도, 겁먹을 일도, 외로울 일도 없다. 다만 나일뿐이면 되는 것이다.
5. 피터잭슨의 처녀작 <고무인간의 최후>를 보았다. 벌써 네 번째다. 이 영화를 본 날 밤이면 언제나 이상한 꿈을 꾼다. 어젯밤에도 꿈을 꾸었다. 집 앞에 여러 사람들이 집적거린다. 불량스런 여고생들이 기를 쓰고 들어서려 해서 간신히 내쫓았더니 이번엔 긴 칼을 든 건달 두 명이 문을 부수고 쳐들어온다. 난 있는 힘껏 그들과 싸운다. 아주 과격한 폭력을 쓴다. 완전히 박살내지 않고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전날 밤 본 영화의 어떤 장면처럼 놈들을 넘어뜨리고 입 주변을 짓이긴다. 내 안에 이런 폭력성이 숨어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동물적 잔인함이 폭발, 모두를 물리친다. 떨어져 나간 문짝을 고친다. 후우, 이제야 예전으로 돌아갔군, 이마를 훔치다가 멈칫한다. 아직 내 침대 안쪽 구석에 여학생 하나가 더 남아있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쉽게 끝날 리가 없다. 섬뜩한 전율 속에 깨곤 한다. 그게 피터잭슨의 섬뜩함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매력적인 원정대뿐 아니라 끔찍한 모습의 괴물들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르크들, 나즈굴이 타고 다니는 날짐승, 거대한 트롤, 지하로 떨어진 발록, 거미 쉬롭. 감독이 이런 괴물같은 녀석들을 다루면서 뭔가 흥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녀석들은 오늘밤 나의 꿈에 숨어들어 우리의 평온한 집에 불을 지르고, 내 숨통을 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