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 둘

iamasiam 2020. 2. 26. 20:55



1. <코끼리> 

70년대만 해도 시골 교회마다 종이 있었다. 종을 쳐본 경험이 있으면 다 알겠지만, 종을 치면 약간 딸려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꼬마들이 막상 줄을 당겨 종을 쳐보면 겁을 먹고 만다. 이대로 딸려 올라가 종과 부딪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종을 쳐보는 것은 모든 동네 아이들의 꿈이다. 그러다가 차임벨이 들어온다. 교회 높은 창문에 커다란 스피커가 달리고 이젠 전자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 굴뚝마다 밥짓는 연기가 피어나는 어스름한 저녁에 어울리는 건 종소리이다. 난 차임벨이 싫었다. 교회 안으로 기어 들어가 목사님 몰래 엠프의 빨간 단추를 눌렀다. 엥엥엥엥...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온 동네를 삼켜 버렸다. 조용한 저녁 평화로운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고 말았다. 저 앞에서 예배를 준비하시던 목사님이 쿵쾅거리며 뛰어오시더니 갑자기 딱 오프! 그 이후 기억이 없다. 

얼마쯤 지났을까? 난 둥실둥실 밤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목사님 어깨 위에 무등을 타고서. 정말 재미있고 기분 좋았다. 사실 그 목사는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이 다음에 키가 크면 무등을 자주 태워주는 아빠가 되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내가 빨간 단추를 누르고부터 기분좋게 목마를 타기까지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동네사람들은 놀라 교회마당으로 모여들었을까? 새로 산 차임벨 앰프는 망가졌을까? 교회 종소리는 영영 사라졌을까? 종소리가 사라진 후 동네 아이들의 꿈은 무엇으로 바뀌었을까? 아이들은 여전히 교회마당에 와서 놀고 갔을까? 왜 아버지들은 더 이상 아이들에게 무등을 태워주지 않는 걸까? 어째서 모두들 아이가 되어 무등을 타고만 싶어할까? 코끼리 역할은 왜 언제나 아버지의 몫이 되는 걸까? 

 


2. <상자>

한 때 자애로우셨던 어머니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되어 나타나셨다. 이젠 쉴새없이 불평을 늘어놓으시고 내 인내력을 시험하신다. 오늘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통화한 지 1분도 안되어 그만 흥분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대화하면 늘 그 분에게 말리고 만다. 백전백패. 나도 차분하고 논리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남자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속수무책이다.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종수네 둘째가 미국서 돌아왔단다. 난 누군지 모른다. 종수가 누군데요? 그러면 곧바로 말리고 마는 것이다. 일단 어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중간에 끊기란 쉽지 않다. 계속 듣고 있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머니는 말씀 도중 내게도 의견을 묻곤 하시지만 그건 내 생각을 듣자고 하시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드려봤자 결국 본인 뜻대로 하신다. 내가 이야기를 할 때 내 말을 듣고 계신지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대부분이다. 

내 나이 또래의 다른 여자들은 다들 행복하게 사는 것 같더구나. 내 평생에 저렇게 형편없는 경우는 처음이구나. 어머니가 자주 쓰는 레퍼토리들이다. 화제전환도 그중 하나. 이야기하다가 궁지에 몰리면 내가 전혀 관심도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으신다. 그러다 보면 나도 더 이상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된다. 정말 어쩔 수 없다. 가끔씩 궁지에 몰린 어머니가 사용하시는 마지막 무기가 있다. 그래, 내가 어서 죽어 버려야 네 걱정을 끼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나오시면 정말 막막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분은 내 어머니고 난 그분의 아들인 걸. 언제나 나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고, 어머니에게는 내가 골칫거리인 셈이다. 

<코끼리>가 카버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이라면 <상자>는 카버의 어머니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상자>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이런 똑같잖아 이 분, 내 어머니하고. 거기엔 나를 항상 화나게 하고 눈물나게 하는 어머니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 분의 종횡무진 거침없는 말솜씨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나는 이렇게 생생하고 용감하고 멋진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서문을 보고 씩 웃은 일이 있다. ‘우리 어머니가 이 소설 속 브리짓의 엄마와 닮지 않은 데 감사드리며...’ 어쩜, 영리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