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1. 파트릭 모디아노. 내가 그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건 언제였을까? 대략 8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를 알게되고, 그의 책 번역을 기다리며 산 지가. 스물다섯, 좋지만 어려운 나이. 당시 나는 군인이었다. 심리적으로 좀 불안했지만, 돌이켜보니 행복했던 시절이다. 돌이켜보아 따듯하지 않은 시절이 있을까?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과거는 결코 흐릿하지 않다. 모노톤의 거친 화질이 아니다. 따듯하고 선명한 시간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름답게 조작된 이미지다. 편집자는 나르시스, 촬영은 피그말리온, 디렉터는 물론 나 자신.
2. 어느 날 그녀로부터 소포가 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편지에 담긴 글, ‘이번엔 좀 읽기 힘들 걸?’ 그해 여름 용케 그 책을 읽어냈다. 점묘파의 그림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기묘한 느낌. 형체는 아득히 무너졌으되 느낌은 더욱 분명한... 줄거리는 휙 날아가 버리고 모호한 이미지만 손에 잡힐 듯 분명하게 머문다는 점. 친절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지만, 정교한 단문을 구사하는 마력적인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 1993년, 그와의 첫 만남. 당시 난 군인이었다.
3. 모디아노의 1977작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원제 ; 가족수첩, 호적부). 이 소설의 서두에 르네 샤르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이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미묘한 파문이 일고, 내 안에는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져 내린다. 문득 나도 내 호적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집에는 녹색표지를 한 가족수첩이 있었다. 아버지는 집안에 커다란 행사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으면 그 곳에 기록을 하셨다. 그 책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언제 결혼을 하셨는지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개성이 고향이셨던 할머니가 어떤 연유로 강화까지 시집을 오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쓰여있었을까?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리던 동네 바보형에 대한 나의 죄책감도 담겨 있을까? 몇 가지 기호와 숫자로 기록되었을 그 녹색 책 속의 나는 정말 과거의 나일까? 스물네살 봄, 내 삶의 진로를 돌려놓은 그 술취한 밤의 주정, 벽에 머리를 박아대던 그 밤의 아픔을 과연 누가 기록해 줄 것인가? 아쉽게도 가족수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형님 댁 서재를 뒤져보면 어느 구석에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찾아 가족수첩을 적어보고 싶다. 빠졌다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넣고 싶은 것이다.
4. 도라 부르더, 나는 그녀를 찾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책을 찾고 있다. <도라 부르더>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최근 소설이다. 예전에 열심히 읽던 이 소설이 사라진 것이다. 소설에서 모디아노는 신문에 실린 ‘여자아이를 찾습니다’라는 실종기사와 마주친다. 그 후 그는 도라 부르더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열다섯살에 사라진 이 유태인 소녀에 대한 기록이나 단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이 소녀를 다시 살려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의미있는 일일까? 하지만 모디아노는 그 일을 시도한다. 최소한의 흔적들이라도 모아 이야기로 남기려 한다. 나는 질문한다. 내 삶의 도라 부르더는 누구일까? 나마저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그들은 누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나는 그들이 흘리고 갔을 조금의 흔적이라도 긁어모으고 싶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다시 살려 내고 싶다.
5.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라는 영화 이후로 나는 빠트리스 르꽁트라는 프랑스 감독의 팬이 되었다. <살인혐의>나 <걸 온 더 브릿지>같은 멋진 영화가 있지만 나는 <이본느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 영화 내내 내가 받은 독특한 느낌-익숙한 낯선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이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시선, 초록색 스카프, 그녀가 피우던 담배 연기뿐이다.’ 근사한 서두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왠지 모디아노를 닮아있다고 느껴졌다. 테이프를 다시 돌려 오프닝 크레딧을 보니, 원작자가 등장하는데, 과연, 파트릭 모디아노였다. 원작은 당시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는지 구할 수가 없었다. 그 책이 드디어 번역되어 나왔다. <슬픈 빌라>. 기쁜 일이다.
6.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모디아노의 소설은 <팔월의 일요일들>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의 제목.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 ‘그 팔월의 일요일에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분간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