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iamasiam 2020. 2. 26. 22:41


1. <콘트라베이스> 

어쩌자고 그는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던 걸까? 조금더 작고 훨씬 주목받는 악기가 많았을 텐데. 그가 처음부터 콘트라베이스를 원했을 리 없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어느 날 자기 품에 콘트라베이스가 안겨져 있었을 거다. 어쩌다보니 회사원이 되었고, 비행사를 꿈꾸다가 정비사가 되고만 것이다. 세상의 이목은 좀더 화려한 직업에 쏠려있다. 하지만 누군가 아침마다 빵을 굽고, 신문을 배달하고, 은행창구 앞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우린 커다란 꿈을 가지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국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적당한 직업을 택하고 마는 것이다. 가끔씩 열등감에 불만을 터뜨려 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 하는 일을 때려 칠 자신도 없다. 우린 영락없는 콘트라베이스적 존재들인 것이다.
지금 주인공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시립 교향악단 단원으로 안정되게 살아갈 것인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고백한 뒤 거리에 나앉을 것인가? 그는 소프라노 여자 가수를 사랑한다. 그는 수상이 배석한 공연장에서 공연 직전 세-라!!!라고 큰 소리를 지르려고 한다. 한바탕 소동을 통해 그녀의 뇌리에 결코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남으려는 것이다. 계획한 대로 행한다면 그는 파면 당해 거리에 나앉고 말게된다. 못생긴 아줌마 같은 콘트라베이스를 안고서. 과연 그는 음악당에 가서 소리를 질렀을까? 안정된 직장을 감히 버릴 수 있었을까? 세라는 정작 그를 미친 사람으로 기억하진 않을까? 미친 사람으로라도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남는 것이 옳은 일일까? 농담의 대상이 되더라도 불멸하는 이야기속 주인공으로 남는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불멸을 원하는가, 망각의 다른 이름인 안정을 택하는가.


2. <비둘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아는 사람이 저 만치서 걸어오면 얼른 다른 쪽 길로 달아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익숙한 길을 피해 멀리 빙 돌아 다녔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 시절 난 몹시도 나만의 방을 가지고 싶었다. 그곳에 숨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시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난 그곳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이번엔 사람들이 너무 그리워졌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혼자이고 싶더니, 혼자이게 되자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결국 난 고시원문을 박차고 자유 속으로 걸어나왔다. 여성은 자기만의 방을 얻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고 한다. 하지만 사적인 공간은 남성들에게도 역시 소중하다. 남성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빼먹고 만다. 마지막까지 몰렸을 때 숨어들 자기만의 방을. 


3. <좀머씨 이야기> 

내가 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특이한 남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빗자루를 들고 나타나 온 아파트단지를 쓸곤 했다. 처음엔 청소부이겠거니 싶었다. 청소부가 쉬는 날에도 그는 쉬지 않고 비질을 해댔다. 수위아저씨들의 구박을 들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아주머니가 그에게 음료수 캔을 권했다. 얼른 받아들 걸로 예상했는데 웬걸,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커피만 마십니다. 난 작은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니. 그것도 커피! 그 이후 그는 가끔씩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면, 이어폰을 귀에 꽂은 그가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곤 했다. 밤 산책을 하다보면 어설픈 발차기를 하며 신음소리 같은 기합을 넣고 있는 그와 종종 마주치곤 했다. 내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 혹은 산책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단지 곳곳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느새 당연한 듯 아파트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얼마 전 한 아주머니에게서 그의 근황을 들었다. 그는 노모와 함께 그 아파트에 살고 있던 거주자였다고 한다. 단지 셈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같이 살던 노모가 돌아가시자 형제들이 아파트를 처분하여 돈을 나눠 갖고 그는 요양시설에 보내졌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니 그곳은 왠지 내가 살았던 곳 같지 않다. 그에게 들은 유일한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나는 커피만 마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