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기획안

JTBC <밀회>

iamasiam 2020. 5. 15. 12:31

연출‎: ‎안판석
각본‎: ‎정성주
방송 기간‎: ‎2014년 3월 17일 ~ 2014년 5월 13일
출연자: ‎김희애‎, ‎유아인‎, 박혁권, 경수진 등



스무살 청년의 고백,

어이없다.

심지어 남편의 제자란다.

지엄하게 꾸짖는다.

그런데 이거 뭐야,

설레잖아.

불길하다.

이성과 정념 사이,

마흔살 여자의 웃지 못할 사투가 시작된다. 
 

 


<작의 및 기획 의도> 


1. 여자 나이 마흔, 품격의 압박.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묵시가 있는 것 같다. 마흔 살 여자가 늙어 보인다면 게으르거나 가난하거나 둘 중 하나, 물심양면 있어 보여야 한다.  부부란 모름지기 관능의 희락도 함께 해야 하거늘, 이라 생각해도 목마른 티 내면 더 없어 보인다. 등등. 명백히 억압인데 벗어던질 수도 없다. 비루해도 그 억압에 기대어 안전하게 살아야지 어쩌겠냐고. 

1. 치명적인 은총.
그렇게 내 안의 여자를 핍박하면서 성녀의 반열에 오르려는 참에 스무살 청년이 완강히 버티고 서서 사랑을 고백한다면? 땡큐 갓! 인습,윤리도덕 다 필요 없어,여자 인생에 마지막 선물로 알고 아낌없이 불태워 주겠어,하며 달려들 수는 절대 없겠지만 그렇다고 또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면 거짓말일 것. 그의 고백이 진심이기를 바랄 것이고 확인하려 들 것이고 끝없이 시험할 것이다. 아무리 시치미 떼고 체면과 양식으로 중무장, 나잇값을 하려 들어도 뜻대로 안될 것이다.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할 수 있는 온갖 바보짓을 다 하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런 연애를 그리려 한다. 선악과를 꿀꺽 삼키고 몸과 마음이 다 죄짓는 이야기를. 치정 속의 가련한 순수를.             

1. 스캔들 대 스캔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추문이 난무하는 세계다. 클래식 마피아, 스폰서 권력, 음대 입시 괴담, 그런 말이 낯설지 않다. 비리가 삐져나와도 끄떡없다. 추문은 더 큰 추문을 은폐하는 데에 쓰인다. 부정한 연인들이 부정한 권력에 그런 식으로 이용 당한다면 돌 맞고 내쫓기는 것보다 천만 배 더 큰 치욕일 것 같다.

1. 중산층 노비들의 고단함.
1%가 던져주는 고기를 99%가 나눠 먹으려 싸우는 형국이라고들 한다. 좀 더 큰 먹이를 좀 더 편하게 얻으려면 급이 높은 싸움터로 진입해야 한다. 그러면 우아하게 싸우고 더 우아할 내일의 싸움을 위해 우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성공한 중산층이란 고작 그런 건데, 거기 진정한 기쁨과 평온이 있을까. 그런 삶을 가르치느라 빈 손이 되어버린 어느 부모를 통해 헛된 욕망의 파국을 그리려 한다.   


<등장 인물>

오혜원. 여. 40.
의전과 처신의 달인. 교양과 유머와 세련미의 여왕. 몸치장은 간결 우아하고 태도는 늘 자연스럽다. 서한예술재단 기획실장으로 아트센터 공연 및 전시, 미술품, 악기 구입 등을 총괄하는 한편 재단 이사장을 보필하고 비자금 관련 문서를 관리한다. 신임이 두텁다. 지밀상궁인 셈. 귀족 시장 '을녀'들이  협찬이며 패션쇼 초대장  등으로 줄을 대려 난리인데, 뒷말 없게 교통 정리 잘 한다. 말많은 세계.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인 남편 강준형과도 인맥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실언, 실수 금물이다.  


기억할 게 너무 많아서인지 남모르는 건망증이 있다. 출근해서 외투를 벗다보면 속치마 바람. 업무 뿐 아니라 사적인 스케줄도 다 적으며 녹음하고,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 입는 순서대로 걸어 놓는데도 소용이 없다. 아무래도 용량초과인 게 분명한데 내색하지 않는다.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녀가 모시는 이사장 한성숙은 그룹 총수 서회장의 후처이며 화류계 출신. 머리는 비상하지만 전문 지식, 주변 지식이 딸린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재단 운영으로 그룹 이미지 제고 및 비자금 조성의 한 축을 너끈 담당할 수 있는 건 온전히 혜원의 공. 음악사 미술사 독선생 노릇에 의전부터 비밀장부까지 다 챙겨주는 혜원 없이는 꼼짝을 못한다. 은밀한 사생활도 털어놓고(혜원이 먼저 알아챘다), 재단 소유인 서판교의 세컨 하우스를 맘껏 살라며 내주기도. 물론 그 집은 극비 문서 보관소로도 쓰이지만.


기획실장 고유의 업무 영역에서도 단연 발군이다. 혜원의 손을 거친 전시회며 음악회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은 여타의 아트센터에서 다 따라할 정도로 참신하고 내용이 충실하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탁월하고, 국제 음악계에 인맥도 폭넓다. 뿐만 아니라 한성숙과 전처 소생들 간의 불화도 유연하게 중재해서, 가장 어른인 서회장도 가끔 밥 먹자고 부른다. 


딸 셋 중 둘째로, 다섯 살 때 피아노 시작, 예원 중고, 음대 3학년 때 유학 가면서 예술 경영으로 진로 변경, 예일대에서 석사학위 받고 귀국, 예술재단에 취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출생지는 춘천.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마련한 잠실 주공 아파트로 이사했다. 육사 출신 장교인 아버지는 잦은 이동으로 가족과 거의 떨어져 지내다가 혜원이 중학교 때 대령으로 예편, 군납업체의 관리이사가 되면서 합류했다. 세 딸 모두 음악을 시킬 만큼 교육열 충만한 중산층 가정이 되기까지는 어머니의 억척이 크게 기여했다. 과묵하고 단순한 아버지는 딸들이 대회 수상이나 입시 합격 등으로 성과를 내는 것에 안심하면서 대소사 다 어머니에게 일임.   

   
대학 3학년 때, 국제 대회 앞두고 무리한 연습으로 건초염이 악화되어 좌절했을 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서한그룹 회장의 막내 고명딸이며 예고 동창인 서영우가 유학길에 동행을 제안한 것. 영우의 집에서는 방탕한 딸을 관리 감시하는 댓가로 학비 일체를 대주겠다고 했다. 룸메이트 겸 시녀 역할이다. 예고 시절부터 혜원이 학과 및 청음 시험 답지를 보여주면 공주 영우는 값비싼 연주회 티켓으로 답하는 식의 공생 관계였기 때문에 굴욕감 전혀 없이 선뜻 받아들였다. 마침 세 살 위 첼로를 전공한 언니가 사법연수원생과 결혼하면서 혼수를 과하게 해가는 통에 40평 아파트가 은행에 잡혀 있기도 했다. 절친 윤지수는 적극 말렸지만, 천재도 공주도 아니라면 넉살과 노력이 길이요 진리라면서. 그때 전공을 예술 경영으로 바꾸었다.


강준형의 청혼을 받은 것은 석사학위 들고 귀국하여 그 때 막 설립된 예술재단에 들어갔을 때였다. 어머니는 반대했다. 예일대 석사에 형부가 법관인데 당연히 귀족 혼맥에 낄 수 있다 자신하며 혼처 목록을 펼쳐 보였다. 딱 두 부류였다. 졸부 2세와 거액의 혼수를 바라는 엘리트들. 그런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진짜 부자이거나 진짜 사랑하는 남자여야 했다. 은근히 눈길을 주던 영우의 이복 오빠는 진작에 혼맥 따라 결혼했고, 예고시절부터 우정이 각별했던 평민 조인서는 후덕한 동창 윤지수와 약혼한 상태. 준형이 방탕한 공주 서영우의 수많은 남자들 중 하나였다가 영우가 집안 간 기획으로 결혼하면서 정리 당했다는 사실 다 알고 있었음에도, 징징대며 우리끼리 합심하여 잘 살아 보자고 매달리는 게 차라리 솔직해보이고 귀여웠다. 때마침 자신의 보스 한성숙이 학교재단 쪽에도 세를 확장하기 위해 준형에게 전임 자리를 만들어줬다.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라 치고, 부부가 되었다. 


결혼 12년. 혜원은 주변에서 자신과 준형을 금슬 좋고 썩 어울리는 한 팀으로 봐주는 게 싫지 않다. 단 준형에게 모든 얘기를 다 하지는 않는다. 준형이 곤고했던 한 때를 잊고 위세를 부리는 것, 서영우가 그런 준형을 간질여 뭔가 염탐하려 드는 것 등이 걸려서. 

   
아이는 아직 없다. 준형이 교수가 된 다음에 낳으려 미루었는데, 어느 새 생기지도 않고, 만들려 노력한다는 것도 심신양면 멋쩍고 버겁다. 어느 새 마흔인 것이다. 주름을 과하게 지우거나 이십대 옷차림을 따라하거나 외롭다며 환상의 연애를 꿈꾸다가 사련에 빠지는 친구들도 있다. 아둔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윤리도덕이 괜히 있겠니. 그건 가치 이전에 고도의 생존 매뉴얼이야. 도로교통법을 잘 지켜야 사고가 안나지. 중년의 지혜와 여유,분별력과 자제심으로 고비 잘 넘기고, 건강검진도 꼬박꼬박 받으면서, 다가올 갱년기를 대비하자꾸나' 며 자못 진심어린 충고도 해준다. 


그런 중에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본인의 타고난 재능을 모르는 채 멀뚱히 서 있는 스무살 청년. 그 무구함이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저런 애야말로 예술의 높고 깊은 경지로 이끌어야지. 그렇게 해주고 싶고, 그럴 능력이 돼서 즐겁다. 음악을 했지만  너무 일찍 세속에 길든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훅 끼치는 사내 냄새, 간곡한 눈빛, 아찔하다. 정신 팔려 일상을 놓친다면 나의 수고 덕에 큰 탈 없이 돌아가는 이 복잡계가 일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머지 않아 아트센터 대표가 될텐데. 그간 쌓아온 것과 장차 누리게 될 것들이 다 날아갈 판. 그런데 어린 연인을 잃는 것은 더 두렵다. 생전에 두 번 다시 없을 일이라.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궁지로 빠져들며, 난생 처음 자신의 삶을 뼈아프게 돌아본다. '너 강준형 사랑해서 결혼 했어? 아니잖아. 그런 거 좀 없어도 괜찮다 생각했잖아. 한창 사랑할 나이에 머리만 더럽게 열심히 굴렸잖아. 근데 다 늦게 어린 놈 사랑하잖아. 이런 짓 절대 안할 줄 알았잖아. 그 벌부터 받아야 돼. 자신에 대한 무지, 인생 앞에 오만했던 거'

 


강준형.남. 42.
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 오혜원에게는 천진난만 속물, 떼쟁이 남편. 대외적으로는  멋쟁이 신사. 혜원과 함께 옷 잘 입는 부부로 잡지에 실리기도 한다. 아버지도  피아노과 교수였고, 어머니는 성악과 출신이라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이면서 한편 기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큰 대회에서는 번번이 2,3등에 그치곤 해서 짜증이 났지만 진골 음악가족이라는 자부심으로 늘 방자했는데, 대학 재학 중 음대 학장 물망에 오르던 아버지가 재임용 심사에 탈락하자 그만 폐서인이 되었다. 당시 서한그룹이 학교재단을 인수하면서 새로이 형성된 재단 측근 세력은 학교 이미지 쇄신 차원, 준형의 아버지를 포함한 대표적 비리 교수들을 정리했던 것. 때마침 음대 교수 사회의 오랜 계보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나 완전히 밀려난 부친은 결국 준형이 졸업반 때 전가족 이민을 단행했고, 준형은 춥디 추운 미시간 호반에서 어렵게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한국인 초중고생들에게 미국 음대 입시 컨설팅을 해주며 겨우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방학 때엔 뉴욕 출장 지도도 했다. 예고 후배인 공주 서영우와 평민 혜원을 맨해튼에서 만났을 때, 유쾌하면서도 단호한 혜원에게 매력을 느꼈음에도 오직 서영우에게 극진히 했던 것은 아버지의 몰락에 영향 받은 바 컸다. 절대 군주가 필요했다. 남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노력 끝에 마침내 그녀의 흑기사 중 하나가 되었고, 분방한 서영우라면 집안에서 정해주는 남자를 거부하고 자신을 결혼 상대자로 낙점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품었다. 혜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부를 졸업한 영우가 집안의 귀국 명령을 받았을 때, 혜원이 관리 감독의 임무를 다 했으니 인제는 오롯이 석사 과정에 전념하겠다며 동행을 거부하자 기꺼이 영우의 귀국길 에스코트를 자청했다. 그러나 귀국 직후에 영우는 집안 간의 정혼으로 결혼해 버리고, 얻은 것은 달랑 지방대 시간강사 자리 하나. 아버지의 축출에 앞장섰던 민용기가 서한음대의 실세가 되어 있어 모교에는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민용기의 배후는 예술재단 이사장 한성숙. 서영우의 새어머니라 어떻게든 줄을 대 보려 했으나 한성숙과 절대 앙숙인 영우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2년 뒤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혜원이 한성숙의 최측근 특급 비서로 신임을 얻자, 혜원에게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게 헛되지 않아서 한성숙은 민학장을 움직여 전임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혜원과 결혼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병상의 아버지에게 교수 임용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혜원이 다리 역할을 했다는 대목은 말하지 않았다. 설욕의 감격을 만끽하며 2등만 하던 아들을 자랑스레 여기시라고. 


흡족한 나날이다. 좋은 집에, 지난 해에 입학 시킨 학생의 부모한테서 외제 차도 선물 받았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심한 비리를 자행하는 민학장이 전혀 두렵지 않다. 충성하고 연대하면서 혜원을 통해 한성숙에게 동태 보고만 하면 된다. 그의 자리는 머지 않아 내 자리가 될 것이고, 학장 총장을 거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폴란드엔 피아니스트 출신 총리도 있었잖아?  복원된 진골의 가계가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해줄 것이다. 자신의 애걸복걸을 무시했던 서영우가 가끔 술 한잔 하자며 지분거리는 것도 은근히 뿌듯하다. 보험 든다 생각하고 한성숙에 대한 험담을 받아 주면서 때로는 농밀한 분위기도 즐긴다. 아내 혜원은 대범하고 지혜로워 개의치 않는다. 단 하나, 학교 후배이며 동료 교수인 조인서가 기분 나쁘다. 조인서는 실력은 물론 인품마저 올곧아서 민학장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젊은 강사들 중에 추종자가 많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아 새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지도교수 신청자가 쇄도한다. 그의 제자 중엔 국제대회에서 입상자도 여럿 있다. 그들이 조인서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하는 것이 배아파 못살겠고, 언젠가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싶어 불안하다. 좋은 이미지로 세를 불려야 하는데. 혜원이 조인서를 인정하는 것도 매우 언짢다. 그녀가 아트센터 개관 기념 공연을 기획하면서 조인서에게 제자와 듀오 연주를 부탁하자 분기탱천, 쓸만한 놈 하나 찾아 내라고 조교 및 강사들을 다그친다.   


그런 그의 레이더에 웬 숫보기가 걸려든다. 천부의 재능 뿐 아니라 감동적인 스토리, 오빠부대를 이끌만한 외모까지 갖추었다. 이게 웬 떡이람.인재 발굴 전문가인 아내 혜원의 인증을 받자 즉각 애제자로 삼는데.          

 


이선재.남.20.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보니 고3 신분인 채로 스무살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졸업장 받으면 내년에 군대 가야 한다. 원동기 면허 따서 퀵서비스 배달원으로 뛴 지 2년. 건당 8천원 떨어지는 걸 깎자고 덤비면 말없이 물끄러미 보면서 속으로 숫자를 센다. 대개는 스물 쯤 셌을 때 무표정에 기가 눌려 그냥 제값 준다. 늦었다고, 물건이 훼손됐다고 발광할 때도 그렇게 바라본다. 제풀에 문 쾅 닫고 들어간다. 받을 사람 없고 연락도 안되면 두 번 걸음 해야 하니까 출발할 때부터 5분 간격으로 전화한다. 옥수역 지났어요. 한남동 오거리예요. 알았으니 전화 좀 하지 말라고 악쓰는 사람들이 주로 약속을 어긴다. 물건 종류 만큼 고객도 각양각색인데 공통점은 허둥대거나 화를 낸다는 것. 이상하진 않다.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러려니 한다. 서울 시민 열 명 중에 아홉은 퀵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확신한다. 퀵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 자신이 만날 일 없는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세계인지 가끔 궁금하긴 하다. 기사나 비서가 있어서 다 해주나? 


아버지는 기억이 없고, 어머니 명화와 여기저기 지방 도시를 많이 떠돌았다. 1년 이상 산 적이 없다. 
여섯 살 때, 이사 간 집에 다 낡아 부서진 피아노가 있었다. 이전 세입자가 버리고 간 거였다. 소리 나는 물건이라 좋았다. 엄마는 아침에 일 나가면서 먹을 것을 넣어주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밤 늦게야 돌아왔다. 하루 종일 피아노를 두드리며 놀았다. 윗판이 없어 소리가 크다보니 시끄러웠는지 집주인이 나가라고 했다. 그때부터는 피아노와 함께 이사 다녔다. 엄마는 아들이 혼자 울지 않고 뭔가를 갖고 노는 것만이 그저 다행스러워, 없는 돈에 사람을 불러 피아노를 고쳐주고 교본도 사주었다. 소음 문제로 쫓겨나지 않게 매번 옥탑방을 얻었다. 또래들처럼  피씨방 오락에 빠져 푼돈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의 비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고맙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이 교습비 받지 않을테니 자기 학원에 와서 치라고 했다. 계속 듣고 싶다고 했다. 유명한 연주가들의 씨디를 들려 줬고, 악보 읽는 법도 가르쳐 줬다. 행복했다. 원장 손에 끌려 콩쿨에 나갈 뻔 했는데 또 이사. 이번에는 피아노를 가져갈 수 없다는 말에 원장한테 달려가 목놓아 울었다. 원장이 엄마를 간곡히 설득하며 짐차 비용을 내 준 덕에 피아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원장이 작별의 선물로 안겨준 거장들의 씨디와 포터블 플레이어가 그때부터 선생이 돼 주었다. 듣고 또 들으며 치고 또 쳤다. 잦은 이사로 집안 가득 미처 풀지 못한 상자들을 벽을 따라 쌓고, 원장 선생님이 알려준대로 식당에서 나온 달걀판을 벽에 붙여 방음장치를 대신했다. 피아노를 칠 때에는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열지 않았다. 집주인이 뛰어올라와 방 빼라고 할까봐. 


중3 때, 늘 뭔가 실수가 많아 빚을 지거나 다쳐서 드러눕곤 하는 엄마의 짐을 나눠지면서 반 소년 가장,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편의점, 비디오점 등을 거치는 동안 학교 공부는 당연히 뒷전이고 오직 '알바'와 피아노가 전부여서 '꼴통학교'로 이름난 부광실업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채 스무살 배달청년이 된 것이다. 고교 입학 동기인 손장호, 선재의 여친을 자처하는 박다미가 자주 찾아오는 것 말고는 인간 관계 전무. 여자 경험 전무. 연예인 지망생이며 입담 좋은 장호가 야설을 늘어놓거나 다미가 심하게 들이댈 때 간혹 움찔하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대충 넘긴다. 더 깊고 황홀한 세계를 알기 때문에. 


피아노가 기다리는 옥탑방에 들어서면 고단함을 잊는다. 하도 많이 들어 음질이 나빠진 씨디 대신 유투브로 연주를 들으며 다운 받은 악보를 읽는다. 오래 전 원장 선생님의 말씀대로 소설책처럼 꼼꼼히 읽고 따라서 쳐 본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클라라 하스킬, 글렌 굴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예프게니 키신 등, 거장들의 이름은 아무리 되뇌어도 발음도 잘 안되고 외워지지도 않아서 핸드폰에 영문과 한글로 적어두었다.


가끔 사무치게 외롭고, 이른바 신동이라는 또래 연주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내게도 스승이 있었으면, 누가 내 연주를 좀 들어줬으면. 그래서 얼마 전부터 유투브에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닉네임은 나천재. 속주곡 '꿀벌의 비행'도 올렸다. 막심 므라비차나 유자왕, 임현정만큼 빨리 치면 주목 받지 않을까 싶어 몇 달 동안 손이 아프도록 연습했는데 클래식 사이트 고수들은 '엣다,관심'이라며 비웃었다. 무리한 속주에 지독한 통증만 얻은 게 약이 올라 호전적인 댓글 놀이에 끼어들었다가 무참히 깨지기도 했다. 하지만 견문을 넓히기에는 딱 좋아서 자주 들락거린다. 익명인데 뭐. 컴퓨터로 하이엔드 오디오 비슷하게나마 들을 수 있는 저가 스피커, 음반 정보 등, 배우는 게 많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드디어 쪽지를 보내온다. 닉네임 막귀. 동영상 봤다며 거두절미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연주 모습만으로 손의 통증을 알아 챈 것이다. 범상치 않다. 친하고 싶어서 먼저 '민쯩을 까고' 형이라 부르며 '나 쫌 치는 건가요?'묻기도 한다. '쫌 치는 넘 많다' 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 온라인 상이지만 '그 누구'가 생긴 것이다. 


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 강준형과 그 아내 오혜원을 만나게 된 것은 그즈음이다. 퀵을 부를 필요가 없는, 즉 자신이 만날 일 전혀 없는 딴 세상 사람들인 것 같은데, 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흥분해서 막귀형에게 자랑한다. 그리고, 오혜원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겁이 나 죽겠다고 덜덜 떨며 털어놓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박다미. 여.20.   
선재의 고교 동창. 지난 해 실업고 미용과를 졸업하고 모 호텔 토탈 뷰티샵(헤어,피부 관리, 전신 맛사지 등을 다 하는 고급 미용실) 수습으로 근무 중. 초불량 여고생이었는데 선재를 좋아해서 아침 저녁 선재 집에 드나들다보니 불량한 친구 관계가 정리되었고, 본의 아니게 착실한 학생이 되어 학교장 추천으로 취직까지 했다. 아직은 수습이라 낮에는 주로 고객들 머리 감겨주고 밤에는 청소하고 수건이며 퍼머롤 따위 세척하느라 자정 가까워야 퇴근한다. 몸도 힘들지만, 미용업계 기강이 워낙 엄해서 더 진이 빠진다. 가장 엄중한 규칙은 입조심. 손님이 무슨 말을 해도 맞장구 치면 안된다. 주요 고객인 부잣집 마나님, 공주님, 며느님, 연예인, 우아하고 세련된 고급 전문직 여인들은 소문에 민감하기 때문. 동료 수습 하나는 모 남자배우의 스캔들에 아는 체 나섰다가 어디서 들었냐며 거품을 물고 출처를 따져 묻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그 고객은 남자배우의 부인이었고, 소문을 확인하려 떠보는 데에 걸린 것이다. 고객은 발길을 끊었고 동료는 해고 되었다. 


탈진한 채로 퇴근하면 선재네로 직행. 멀지 않은 제 집보다 선재네 집 엄마방에서 자는 날이 많다. 선재의 구박은 콧방귀로 대충 무시하고 야식을 먹으며 선재 엄마 명화에게 그 날 주워 들은 온갖 가십거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피로를 푼다. 명화가 멍청해서 선재를 고생시키는 건 짜증나지만, 멍청한 덕에 자신을 그냥 있는대로 봐주는 것 같아서 좋다. 정도 들만큼 들었다. 집에 가 봐야 새엄마와 아버지, 할머니의 악다구니 뿐. 내년이면 선재는 군대 가고 자신은 디자이너 보조가 될 거니까 선재 복무할 동안 열심히 모아서 제대하면 바로 결혼할 참이다. 선재가 자신에게 폭 빠져주지 않는 게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살 생각을 하면 즐겁다. 그런데 선재가 혜원 부부를 만난다. 교수 부부란다. 선재를 제자로 삼겠다고 한다. 겁이 더럭 난다. 자신과 급이 달라질까봐.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이 된다. 선재가 혜원을 연모한다는 걸 알아 챘을 때, 이건 분명 아줌마가 먼저 유혹한 거라고 단정하고 죽기 살기 혜원과 담판을 지으려 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의 일터 VVIP 고객. 머리를 감겨 줄 때 찬물을 끼얹는 중대 실수를 범했는데도 상냥하게 안심을 시켜줘서 매우 고마웠는데. 여기서 안좋게 쫓겨나면 업계 전체에 알려져 앞길이 막힌다. 그 남편한테 익명으로 일러버릴까, 아니면 옛날 일진 친구들을 시켜 좀 때려줄까, 온갖 궁리를 다 한다.           
   


서영우. 여. 40.
서한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 대표. 예술재단 설립 당시 그룹 총수인 아버지가 새어머니 한성숙을 이사장 자리에 앉힐 때는 얼마 못가려니 방심했다. 무식이 만천하에 드러나 곧 쫓겨날 거야, 그랬는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혜원이 실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혜원은 예술재단을 마나님의 놀이터가 아닌 자신의 성공 기반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고 때 이미 혜원을 알아봤다. 아버지 사랑을 계모한테 뺏겨 앙앙불락 아무한테나 함부로 구는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루하게 굴지 않았다. 서로 가진 것을 교환하는 거니까, 하면서 시험 답안 보여주기, 파티 때 들러리 노릇 등을 마다하지 않았고 대신 음악회 티켓, 명품 구두며 가방을 건네주면 흔쾌히 받았다. 그런 자신감이 거슬려 부러 더 시녀 취급을 하기도 했지만 혜원이 지닌 재능과 인기는 돈으로 살 수가 없는 거라 늘 약이 올랐다. 혜원이 건초염으로 국제 대회를 포기하고 좌절했을 때, 인제 진짜 시녀 노릇 좀 해 봐,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유학길 교전비로 채용했는데, 어느 새 한성숙의 심복이 되어 있다니. 예술재단이 그룹 차원 비자금 조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된 지금, 한성숙은 아버지 서회장은 물론 후계자인 큰오빠 앞에서도 나긋나긋 지분 확대를 주장한다. 그것이 혜원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성질 난다. 혜원이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자신이 홀대했던 준형을 남편으로 맞아 교수로 멋지게 키워서 그림같이 사는 것도 꼴보기 싫다.


정략으로 결혼한 남편은 자기 집안에 명예와 법조계 인맥을 제공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 생각하는지 정말 재수없고 매력없이 군다. 영국의 귀족학교에 보내놓은 아이들 핑계로 몇 달 씩 지칠만큼 놀다 돌아와 대면해도 전혀 반갑질 않다. 그룹 핵심 부서 중 하나인 법무팀장이라 섣불리 이혼할 수는 없고 외양만 유지한 채 사치와 쾌락에 탐닉하지만 어느 새 나이 마흔. 돈 주고 사는 연애는 인제 지겹고, 친구 관계도 그와 다를 바 없다. 분봉여왕 한성숙의 영토 확장을 막고, 이전의 준형과 혜원이 자신에게 바쳤던 충성을 되찾으려면 혜원을 먼저 무릎 꿇려야 하는데.


그러던 중 혜원과 선재 사이의 심상찮은 기류에 더듬이가 반응한다. 저거다. 저거 하나면 혜원을 목조를 수 있지! 선재의 뒷조사를 시작하면서 한껏 신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질투 난다. ‘나는 젊은 애인 하나 만들려면 고액권 수표를 쳐발라야 하는데 쟤는 거저 얻다니’ 
  


한성숙. 여. 50.
서한예술재단 이사장. 그룹 총수 서필원 회장의 후처. 이지적이고 그윽한 외모에 고상한 화술을 구사하지만 전처 자식 서영우와 싸움이 붙으면 머리채를 끄들고 걸쭉한 욕설을 쏟아낸다. 그런 그녀를 서회장은 '릴리'라 부른다. 그녀가 그렇게 시켰다. 예술재단 홈페이지 약력에는 미국 모 음악원에서 첼로를 전공한 걸로 돼 있는데 실은 고급 호스티스 출신. 업계의 전설이다. 상처한 서회장을 사로잡아 정실이 되었고, 생산을 못하는 게 불안해서 정력이 절륜한 환갑의 영감에게 정관 수술을 요구, 단식투쟁 끝에 관철했다. 본처 자식들만도 서슬이 퍼런데, 엄한 년이 애 낳아 들고 오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서회장한테서 재단 이사장 자리를 받아낸 뒤 혜원을 스카웃 했고, 혜원의 치밀한 코치 덕에 명실상부 귀부인으로 거듭났다. 혜원에 대한 의존도가 날로 높아지면서 그 남편 준형의 뒤도 봐주기 시작했다. 한때의 내연남 민용기를 진작에 음대 학장으로 박아두었던 덕에 가능했다. 예술재단에서 조성한 비자금을 빼돌리다 혜원에게 들키자 선재와의 관계를 빌미로 거래를 제안하면서, 앙숙 영우로 하여금 혜원을 협박하도록 일을 꾸미는데. 

 
유방암을 숨기고 있다. 작은 것 하나 간단히 떼낸 뒤 또 생겼는데도 가슴을 도려내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스위스, 남미 등지의 자연요법 병원에 한두 달 씩 있다 온다. 아무도 모른다. 눈치 백단 혜원조차도 해외 예술계 시찰을 핑계삼아 놀러 다니는 줄만 안다.     

 


서필원. 남. 74.
서한그룹 회장. 서영우의 아버지.한국 클래식 음악계 최대의 스폰서. 토건업으로 기반을 닦아 갑부가 되었다. 거액을 출연하여 예술재단을 설립한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는 비자금 조성 및 세탁. 둘째는 가난한 예술가들 지원하며 정승처럼 쓴다는 자족감.  
전국 각처의 현장을 돌던 시절에 객고를 푸느라 여기저기 씨를 많이 뿌렸다. 여자에 관한 한 청탁을 가리지 않았던 그 시절의 취향이 지금도 가끔 발현하여 한성숙을 거품 물게 만든다. 무교동 선술집 참새 구워 주는 연변 아낙에게 '맹하고 얼띤 것이 영 짠하다, 내 한번 품어 줘야겠다'는 등.

  
한성숙과 민학장의 관계며 비자금 유용 등 다 알지만 손쓰지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기침 한번 하면 다 정리될 것이라 그 때를 기다린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예술재단의 일등공신 혜원을 가끔 불러 밥을 먹는다. 예술 강의도 듣고, 부쩍 외유가 잦아진 아내 한성숙의 동정도 파악하고, 겸사겸사.


탈세 및 재산도피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회장직을 장남에게 물려주고 국면전환을 꾀하는데, 혜원의 스캔들을 교묘히 확대하여 가장 마지막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민학장. 남. 55. 
서한음대 학장. 클래식 비리 월드의 구심점. 과거 준형의 아버지를 축출한 장본인이라 원한 관계라 할 수도 있는데, 필요에 의해 교수로 채용했다. 확실한 배후인 한성숙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좀처럼 손아귀에 들지 않는 학내 신진세력, 특히 실력파 조인서를 견제하는 데에 준형만큼 적당한 인물은 없기 때문이다. 한성숙과 내연 관계일 때에 그녀가 서필원의 구애를 받자 환호작약 반기며 물러났다. 그리고 그 후광으로 날개를 폈다. 총장직을 바란다. 
        
조인서. 남. 40.
서한음대 피아노과 교수. 뛰어난 제자들을 여럿 양성하여 권위있는 국제콩쿨 심사위원으로 위촉된다. 장차 선재의 라이벌이 되는 지민우도 제자 중의 하나다. 예고, 음대, 유학 모두 장학금으로 했다. 수수한 집안 출신으로 역시 수수한 동창 윤지수와 결혼하여 애 많이 낳고 화목하게 산다. 2년 선배인 준형을 라이벌로 생각한 적 없고 차기 학장 자리 준대도 싫은데 준형은 자신을 필생의 적수라고 하니 난처하다. 비밀 레슨 따위 하지 않고 아내에게 월급만 갖다 준다.   

 


윤지수. 여.40.

조인서의 아내이며 혜원의 절친 동창. 형편이 비슷해서 친해졌고, 혜원이 영우와 뭘 어째도 다 이해했는데, 준형과의 결혼 및 이후의 행보, 지금의 위치 등을 생각하면 좀 안타깝다. 게다가 남편끼리 천적이라니. 인서가 유학 중일 때 피아노 학원을 해서 결혼 자금을 모았다. 둘째 출산 후 학원 그만 두고 지금은 애 셋 키우며 넷째를 임신 중인 전업주부. 혜원의 심상찮은 소문이 걱정되어 준형에게 선재를 인서에게 보내라고 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다.

 


홍신애. 여. 65.  
혜원의 모친. 진명여고와 서울교대 졸. 초등학교 교사 3년 째에 육사 출신 대위 오창석과 결혼하여, 그의 근무지인 춘천으로 전근. 딸 셋을 낳은 뒤 교사 생활을 접고, 양육과 내조(남편 승진 운동) 및 재테크에 전념. 동창계, 영관부인계 등으로 돈을 만들어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세 딸 모두 음악을 시켰다. 남편이 이동이 잦아 떨어져 산 기간이 더 길었지만 장성 부인이 되면 다 보상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소장 진급을 못하자 낙담이 컸다. 그래서 딸들 교육에 더욱 매진했다. 큰 딸 경원과 막내 수원은 음대 스펙으로 번듯한 결혼 시켜 주는 게 목표였고, 셋 중 음악적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총명한 혜원은 국제적 피아니스트나 음대 교수를 만들고자 했다. 혜원이 건초염으로 연주가도 교수도 다 난망이 되었을 때, 딸의 좌절에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졸업은 해야 제대로 시집간다며 몰아세웠는데, 그때의 일이 미안할 정도로 지금은 혜원이 제일 든든하다. 애가 없는 게 걱정이지만 기둥뿌리 뽑아 법관이며 의사와 결혼시킨 큰딸 막내딸이 아이들 때문에 미국까지 가서도 악전고투 하는 것을 보면 혜원이 차라리 깔끔한 것 같다. 게다가 혼맥이 아닌 자기 능력으로 대 서한그룹의 은택을 누리다니. 기러기 아빠인 두 사위를 챙기려 들지만 달가와 하지 않아서 이혼 말 나올까봐 불안하다. 미국의 두 딸에게 자주 간다. 70줄에 접어든 남편이 귀찮기도 해서. 
     


오창석. 남. 70.
혜원의 아버지. 군 재직 중에도 가족과 떨어져 거의 혼자 지냈기 때문에 아내 홍신애가 딸들 보러 가도 일상 생활이 불편할 건 없지만, 저녁 설거지 마치고 빈 손을 들여다 보노라면 자신의 인생에 정말 남은 게 없는 듯 하다. 자식 교육이며 노년 설계 다 아내한테 맡기고 홀로 임지를 떠돌았는데, 과연 그 딸들은 잘 살고 있는 건지. 산에 가서 점심 도시락 먹고 해질 때 돌아온다. 바쁜 중에 짬 내어 들러주는 혜원이 유일한 위안인데. 

 


오경원. 여. 43.        
혜원의 언니이며 예고 선배. 첼로 전공. 판사인 남편 신우석과의 사이에 1남1녀. 남들만큼 해갔는데도 십수년 째 초라한 혼수 운운하는 몰상식한 시어머니가 손자들이 에미 닮아 공부 머리가 부족하다고 하는 데에 격분하여 일찍이 아이들 데리고 미국행. 어차피 지방 지원으로 도는 남편과는 주말부부였다. 한국에는 1년에 한두 번 온다.    

 


신우석. 남. 45.
오경원의 남편. 혜원의 형부. 결혼할 때에는 처가에 재산이 꽤 되는 줄 알았다. 서영우의 남편인 김인겸과는 연수원 동기이지만 처지는 천양지차. 지방으로만 돌다가 두 아이 유학비를 위해 로펌에 들어갈 궁리를 하던 중 처제 혜원을 통해 한성숙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서한그룹 법무팀에 들어간다.  

 


오수원. 여. 37.
혜원의 동생. 남편의 치과 병원이 운영난에 허덕이는데도 빚내서 애들 데리고 미국 큰언니 동네로 가버렸다.

 


김인겸. 남.45.
영우의 남편. 서한그룹 법무팀장. 부친이 검찰총장 재직 중에 영우와 결혼.

 


김인주. 여. 42.
김인겸의 여동생. 서영우의 시누이. 서한음대 기악과 교수. 준형과 예고 동기. 서울음대 졸업 후 독일 쾰른 음대 수학. 다 우습게 보면서 민학장 라인에도 조인서 쪽에도 동조하지 않다가, 한성숙이 서회장을 구워 삶아 민학장을 총장 만들려한다는 오빠 인겸의 말에 민학장 편으로. 돈도 배경도 없이 감히 음악을 하느냐며 값싼 악기 쓰는 학생들을 가장 못참아 한다. 유창한 독일어로 돼지, 쓰레기 별 욕을 다한다. 명품 선물을 좋아한다. 유학 중에 만난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과 이혼 다 치렀다. 아이는 없다. 한국 남자 눈에 차지 않아서 이후 쭉 독신. 첫남편과 가끔 만난다.   
      


지민우. 남. 20.

혜원이 예술재단에 들어가 처음으로 기획한 영재 발굴 프로그램을 통해 뽑혔다.곧바로 조인서와 연결시켜 준 것도 혜원. 유학 대신 서한음대 피아노과 입학, 1학년 재학 중. 국내파 대표주자다.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스승은 조인서와 오혜원  두 분이라고 말한다. 혜원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매우 친하게 지내서 준형의 질투와 선재의 선망을 유발한다.

 


정유라. 여. 20.   
피아노과 1학년. 한성숙을 통해 강준형에게 레슨 받고 입학. 

 


장시은. 여. 20.  
기악과 1학년. 첼로 전공. 정유라와 실내악 실기 같은 조. 싸구려 악기를 싫어하는 지도교수 김인주에게 심히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그녀가 소개한 악기를 사는데, 가짜다. 가짜 대학생 손장호와 사귀는 어리숙한 아가씨. 장호를 통해 선재, 박다미와도 가까워진다.   

 


손장호. 남. 20.
선재의 절친 고교 동창.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완벽한 ‘머글’. 도대체 뭐하는 것들이람? 왜 같은 곡을 수백년 동안 쳐대는데?  부잣집 딸인 줄 알고 장시은에게 접근. 가짜 악기 사건을 선재에게 이른다.  

 


임종수. 남. 27.
준형의 조교. 서한음대 대학원 4학기 째. 준형에게 시달리며 비밀 레슨방 운영까지 책임진다. 비서 아니라 몸종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비명이 절로 난다. 얼결에 장시은을 비롯, 찌질이 취급받는 학부생들의 대장 노릇을 하면서 선재의 친구들인 손장호, 까지 알게 되어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다. 선재와 혜원의 관계를 준형에게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안세진. 여. 29.

아트센터 공연기획과 직원. 혜원의 직속 부하. 오혜원처럼 되고 싶은데. 

 


왕정희. 여. 38.
예술재단 총무과 소속 비서직. 2,3일에 한번씩 나오는 이사장 한성숙과 그보다 더 뜸하게 나오는 대표 서영우를 커버한다.   

 


미순. 여. 54. 
혜원 집(재단 소유)의 가정부. 월급도 재단에서 주는 걸로 되어있다.

 


최기사.남. 32.
서영우의 운전 기사 겸 수행 비서.한성숙의 첩자.

 


백선생. 여. 47. 
한성숙의 단골 역술인. 정유라의 엄마. 투자 예측이 정확해서 대외적으로는 '투자분석가'. 한성숙의 개인 비자금을 많이 불려주었다.   


그리고 여러분-한성숙과 서영우의 기사들. 준형의 모친 및 누나. 서영우의 오빠들. 오수연의 남편. 아트센터 직원들. 서한음대 학생들, 혜원의 예고 동기들 등.



<초반 줄거리> 
혜원이 기획실장으로 있는 서한예술재단의 가장 큰 연중 행사는 아트센터 개관 기념 음악제. 일주일 간의 대규모 축제다. 지난 한달 동안 하루 걸러 야근을 했다. 앙숙간인 재단 이사장 한성숙과 그 아랫급인 아트센터 대표 서영우가 귀빈 초대 의전부터 시작하여 사사건건  견해 차이를 보이다가 급기야 머리를 끄들고 싸우는 걸 말려가면서, 인제 겨우 막바지 점검에 들어갔다. 음악제 프로그램 시안에 틀린 게 없는지, 출연자들에게 확인하고 인쇄소에 넘기면 거의 다 된 것이다. 


그런데 시안을 받아본 준형이 동료교수이며 2년 후배인 조인서가 제자와 함께 듀오를 치기로 되어 있는 것에 격분한다. 왜 조인서만 제자랑 같이 출연해? 나는 제자 없어? 나는 독주도 없이 겨우 3중주에 끼워넣고!  혜원이 달래야 할 또 한명, 남편이다.   
쓸만한 애 찾아내라는 준형의 닦달에 그의 조교 임종수는 몇 년간의 전국 규모 경연 본선 녹화 씨디와 웹 상에 올라온 동영상 목록을 갖다 바친다. 그러나 밤잠을 설쳐가며 들여다 봐도 성에 차는 놈 하나가 없다. 허세 가득한 속주 동영상을 보며 준형이 미친 놈이라며 욕을 퍼붓는데, 혜원이 얼핏 보니 미친 놈이 아니라  아픈 놈 같다. 게시자 닉네임은 '나천재'. 몇 안되는 댓글은 온통 야유 뿐. 혜원은 '막귀'라는 닉네임으로 댓글을 달아준다. '너천재, 손 아프지? 병원 가봐.'  답글이 바로 올라온다. '헉, 막귀님 관심 감사. 나 쫌 치는 거임?' 혜원,답글. '쫌 치는 넘들 많음'  이렇게 나천재와 막귀는 쪽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며칠 후, 음악제 개막일. 준형이 교수실에 떨군 연주복용 나비넥타이를 퀵 배달원 선재가 전하러 온다. 리허설 때문에 일찍 도착한 준형은 앞질러 무대를 차지한 조인서가 그 제자 지민우, 혜원과 조율 상태를 점검하며 화기애애한 모습에 새삼 분통이 터진다. 수 차례 전화를 하며 찾아온 ‘믿음 퀵’ 청년에게 화를 내다가 대기실에서 씨근대는데, 그때 누군가의 연주소리가 들려오고 당연히 그것은 민우의 연주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빼꼼 들여다 보는 민우. 그럼 누구? 어떤 놈이 저렇게 잘 쳐? 무대로 뛰어나간다. 황급히 내빼는 '믿음 퀵' 조끼. 설마. 눈을 의심하고 통제실 cctv를 확인한다. 그 놈 맞다. 감히 연주회 직전 무대 위의 피아노를 건드린다는 건 큰 사건이라 아트센터 측에서는 범인을 찾으려 샅샅이 뒤지고, 총 책임자 혜원은 임원들을 대동한 서회장, 서영우 및 그녀의 시집쪽 사람들 등 귀빈들이 속속 도착하는 상황이라 비상벨을 엄금한 채 수습에 나서는데. 경비원과 직원들을 피해 화장실로 숨어든 선재를 준형이 발견한다. 조끼를 벗기고 자신의 자켓을 입혀 일단 피신 시킨 뒤 마구 겁을 주며 신상을 파악한다. 다시 만나 감정을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것. 


소동은 있었지만 무사히 개막 연주회를 마치고 기분 좋게 숙면을 취한 혜원. 입시 대비 회의로 바쁜 준형은 '물건 하나 봐뒀으니 감정 좀 해달라'며 선재를 만나보라고 간청한다. 준형의 조교 종수를 따라 혜원의 집에 도착한 선재는 준형과 혜원이 부부인 걸 모르는 채 혜원의 등장에 놀란다.어제 준형에게 나비넥타이를 건네고 나오는 길에 방향을 잃어 무대 통로로 접어들었을 때, 자기 또래의 청년이 한 여인에게서 애정 넘치는 격려와 칭찬을 받고, 또 그가 여인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격의없이 대하던 모습 등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녀는 마치 여신 같았고, 그들 중의 하나가 되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무대 위의 피아노를 건드렸는데, 그런 그녀가 눈 앞에 있다니. 


혜원은 단번에 선재의 재능을 알아채지만 내색치 않다가 결국은 함께 연주하고, 최상의 칭찬을 해준다. 감격이다. 이제껏 혼자서 몸부림치다시피 해왔는데, 드디어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선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준형이 서한음대 입시를 권하고, 감격은 두려움으로 바뀌어, 선재는 혜원에게 강준형의 권유를 받아들여도 좋을지를 묻는다. 혜원은 겁내지 말라며 격려한다. 혜원으로서는 착잡한 일이다. 음대 입시를 두고 벌어지는 각종 비리 및 한성숙과 그 측근 민학장, 그리고 남편 강준형이 그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터에 서영우의 좌충우돌로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대처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선재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재능이 있으나 불우한 청년 이선재를 내세움으로써 비리 의혹을 덮을 수 있으니까. 세속의 계산에 지친 혜원은 이 아이를  감춰진 샘물처럼 혼자서만 찾고 싶은데.        
준형은 선재를 찜한 것이 마냥 흡족해서, 시험을 며칠 앞두고 혜원을 부추겨 선재의 집을 방문한다. 선재는 혜원과 준형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한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 집, 그 누추함이라니. 오래된 동네의 어수선한 이면도로 낡은 3층 건물의 1층에 선재 엄마 명화의 식당이 있고, 살림집은 2층과 3층에 걸쳐진 옥탑방. 혜원은 선재의 당혹을 놓치지 않는다. 

  
선재의 방에 들어선 혜원은 상상 이상의 누추함에 아연하지만, 사방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달걀판과 무수히 덧대어 고친 듯한 피아노와 숨 죽인 채 서 있는 선재를 찬찬히 번갈아 본다. 반면 준형은 앉을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 때마침 혜원이 방구석의 끈끈이 쥐덫을 밞자 옥상으로 내뺀다. 선재는 어떻게든 혜원의 발에서 끈끈이를 떼내려 하지만 감히 혜원의 발에 손을 댈 수 없어 허둥대는데. 
그날 밤, 귀가한 혜원은 나천재가 선재라는 걸 알게 된다. '막귀형, 나 미친 것 같아.남편이 있는데도 막 설레.돌겠어'  
혜원은 선재를 꾸짖지 못한다. 막귀가 바로 나 오혜원이라는 것도 밝히지 못한다. 선재의 속마음을 더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경악한다. 장차 무슨 꼴을 당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