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해를 품은 달>
방송 기간: 2012년 1월 4일 ~ 2012년 3월 15일
방송 횟수: 20부작+스페셜 4부작
채널: MBC
제작사: 팬엔터테인먼트
연출: 김도훈, 이성준
극본: 진수완
출연자: 한가인, 김수현, 정일우, 김민서, 여진구, 김영애 등
“이 드라마는
조선의 가상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 픽션으로
역사적 인물,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해를 품은 달이다”
“무슨 말씀이온지...”
“왕은 해라 하고 왕비는 곧 달이라고 한다.
나의 마음의 정비는 연우낭자로 이미 삼아버렸으니
그에 대한 나의 정표로 이 봉잠을 보내는 것이다.
연우낭자가 나를 가슴에 품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자빈 간택에 최선을 다해 나에게로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느니.....”
1. Content Point
1.<성균관 스캔들> 정은궐 작가 작품!
‘은빛 대궐’이라는 뜻의 필명 정은궐.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들을 집필했다.
<성균관 각신들의 나날> <해를 품은 달> 등
그녀의 소설은 대한민국 사극의 One- Source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2. 새로운 대한민국 대표 신화 탄생!
<해를 품은 달>은 새로운 사극 트렌드의 선두주자로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철저히 픽션이자, ‘판타지’를 살리는 것이 이 드라마의 강점이다.
세계시장에 <해리포터시리즈>, <트와일라잇>, <뉴문>, <나니아 연대기>등이
있다면 한국에는 <해를 품는 달>이 있다.
3. 빛나는 청춘의 성장 드라마!
< 드림하이> <공부의 신> 등 풋풋한 청춘의 아픈 성장이 자아내는 감동은 크다.
<해를 품은 달>은 ‘조선시대’의 궁궐 안 청춘을 포커스로 한다.
한 번쯤 열병에 휩싸였을 법한 첫사랑의 추억이 조선시대의 궁궐 배경으로
신비롭고도 정교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알싸한 첫사랑으로 거듭나는 궁중로맨스.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 로맨스를 깨울 것이다.
4. 매력 꽃미남, 차도남, 까도남 총출동!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잘금 4인방!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김주원과 오스카!
드라마 <궁>, <추노>의 매력남들의 여세를 몰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는 이훤, 운, 양명, 염이 있다!
매력적인 네 남자의 첫사랑이 안방극장에 재현된다.
2. 기획의도
이 드라마는 ‘궁중로맨스’다.
조선의 가상 왕 시대. 스물세 살 젊은 왕의 연애사.
즉, ‘과인(寡人)의 연모하는 이야기’쯤 되겠다.
‘궁중로맨스라....중전과 후궁들의 살벌한 궁중암투 내지는,
권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당파싸움 정도 되겠군...’
아니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첫사랑에 순정을 바치고
사랑의 완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왕세자의 첫사랑, 그 시대 젊은이들의 순애보에 관한 이야기다.
첫사랑? 순애보? 촌스럽다.
그것도 후궁들의 꽃밭에서 살아가는 왕이? 말도 안 된다.
하긴 요즘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은 쿨하고 세련됐다.
쿨하게 잊고, 세련되게 다음 사랑을 준비한다.
조폭쯤은 나와야 목숨을 건 사랑을 한다.
불치병쯤은 걸려야 비극이 완성된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첫사랑, 순정, 순애보, 희생 따위의
아날로그적인 단어가 등장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 때는 사랑을 위해 순정을 바치고, 목숨을 걸었던 시대가 있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남을 위해 살던 사람도 있었다.
신하는 왕을 위해,
왕은 백성을 위해,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은 부모를 위해,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없는 자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바쳐,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아름답게 희생하던 때가 있었다.
이 드라마는 그러한 사랑에 주목하고자 한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순수하기에 비장한, 젊은 그들의 궁중 로맨스.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그들의 애지애가(愛之哀歌).
또 하나,
이 드라마에서의 정치(政治)는 바로 정치(正置)이다.
정치(正置). 모든 것이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
자격이 없는 자가 남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
뒤가 구린 그들이 정작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들의 날개를 꺾어버릴 때,
자신들의 시커먼 속내를 위장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낼 때,
그 명분이 그들의 논리가 되고, 정치가 되고, 통치이념이 될 때,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거기서부터 인간들의 불행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백성들의 시련이 시작된다.
해와 달이 제 자리를 벗어나면 위험해지는 것처럼,
정(正)이 궤도를 벗어나면 세상은 위험해진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이 가장 높은 자리에,
백성의 근심을 끌어안는 자가 왕의 자리에,
군주와 백성을 사랑하는 자가 왕후의 자리에,
학문과 인격을 갖춘 자가 관리의 자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옆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만들어주는 것.
만물이 있어야 할 제 위치에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조선의 젊은 왕, 이훤이 가진 정치철학이다.
3. 드라마의 키워드 & 제작 포인트
가. 궁중로맨스 -왕세자의 첫사랑
한 통의 연서(戀書)로 시작된 왕세자의 첫사랑.
예동(禮童)으로 입궐한 연우와의 풋풋한 첫 만남.
아버지를 따라 궁궐 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만난 왕세자 훤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보경.
오라버니의 젊고 아름다운 스승을 사랑하게 된 민화 공주.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염,운,양명.
먼발치서 말없이 염의 수호천사가 되어주는 여비(女婢) 설.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풋풋한 첫사랑이
드라마 초반을 밝고 상큼하게 장식한다.
나. 미스터리 -세자빈 시해 사건
세자빈 허씨(연우)는 분명 8년 전에 죽었다.
세자빈에 간택된 직후 별궁(別宮)에서 병을 얻어 쫓겨나듯 출궁했다
들었다. 병이 있는 여식을 세자빈 후보로 올린 죄로 삭탈관직된
홍문관 대제학의 품에서, 어느 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들었다.
그런데...8년이 지난 오늘, 죽어 무덤에 묻혔다던 연우 낭자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아니란다. 연우 낭자가 아니라 무녀(巫女) 월이란다. 얼굴도, 말투도, 향기도 똑같은데 연우 낭자가 아니란다.
훤은 어떤 계시처럼 문득, 8년 전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의문이 생긴다.
사람을 놓아 사건을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연우와 월은 동일 인물일까?
과연 흑막 뒤에 숨은 인물은 누구인가?
세자빈 시해사건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을 흥미진진한 구성으로 그려내어 극의 흡입력을 높인다.
다. 기억상실증 -나는 왜 죽었는가?
어린 시절 신내림을 받다가 혼절했다 들었다.
워낙 큰 신을 몸주로 모셨기에 전사(前事)를 모두 잃은 거라 들었다.
그리 기억할 것도 없는 전사였다 들었다.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부모 없는 고아였고, 하여 신분도 알 수
없다 하였고,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나의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기(神氣)가 읽혀 내림굿을 해준 거라 들었다.
나를 거두어준 도무녀 장씨를 신모님으로 모시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신기(神氣)가 없는 듯하다. 신내림을 받은 기억도 나지 않으니 이상하다.
액받이 무녀가 되어 입궐 하였을 때, 처음으로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은월각(隱月閣)에 들어서면 그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신기(神氣)일까?
무녀 월(연우)의 정체를 알게 된 저들의 계략과 음모,
그리고 다시 시작된 죽음의 위기.
연우는 과연 기억을 되찾고 세자빈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훤과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연우가 기억을 찾는 과정을 훤의 추리와 함께 구성하여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연우가 기억을 되찾는 시점을 드라마의
터닝 포인트로 삼아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라. 판타지
다른 이의 액을 대신 받아내는 액받이 무녀(人間符籍).
인간 속죄양처럼, 주인집의 재앙이나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
무당 집에 헌납되는 대명노비(代命奴婢).
매흉(해골 등 흉한 것을 묻어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술법),
피병(질병을 옮기는 귀신이 근접하기 어려운 무당집이나 장군의 집으로
병을 피하는 것), 구식례 (일식이나 월식이 있을 때 임금이 해나 달을 향해
기도하며 자숙하는 의식), 휴지역, 결계, 정박령, 사독제, 기은제, 관상감,
성수청, 소격서 등등....
판타지적 소재를 적절히 활용하여, 독특하고 신선한 내러티브를 제공하고,
드라마에서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나 배경은 CG를 활용하여,
판타지적이면서도 신화적인(혹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 왕실문화
궁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드라마인만큼,
우리나라 고유의 색감과 질감을 잘 살려 화면을 산뜻하게 장식하고,
궁중 나례 의식, 제천행사, 옥추단제, 왕비의 친잠례, 구식례 등등...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왕실문화를 해외팬들에게 소개한다.
또한 조선의 가상 왕 시대라는 설정을 역사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활용, 상상력이 가미된 다양한 볼거리와 이야기를 제공한다.
<시대 설정>
조선 전기~ 중기 가상의 왕 시대
<공간 설정>
가. 궁궐(宮闕)
드라마의 중심 무대.
조선의 대표적인 法宮이었던 경복궁(景福宮)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대전, 편전, 중궁전, 대비전, 대왕대비전 등 궁중사극에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공간 외에, 다음과 같은 공간을 궐내 적절한
곳에 배치한다.
가) 비현각 : 세자시절 훤이 염에게 교육을 받던 전각.
나) 선전관청 : 운의 소속관청.
다) 관상감 : 지리학, 천문학, 명과학 교수들의 집무 공간.
라) 은월각 : 세자빈에 간택된 연우가 임시로 머물던 별궁(別宮).
나. 사가(私家)
가) 북촌(北村) 사가(私家)
연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염과 민화, 정경부인 신씨가 살고 있는 곳.
나) 양명의 군저(君邸)
양명에게 뒷줄을 대려는 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다) 운의 본가(本家)
운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정경부인 박씨가 살고 있는 곳.
라) 보경(중전 윤씨)의 사가(私家)
보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자, 현재 윤대형이 살고 있는 곳.
다. 은월각(隱月閣)
드라마를 위해 창조된 궐내 가상의 공간.
(*약간은 판타지가 가미된 공간.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공간)
‘연못 위에 비친 달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달이 뜨지 않는 밤에 가만히 연못 위로 꺼내어놓는다’
는 뜻을 지닌 전각으로, 8년 전 세자빈으로 간택된 연우가
임시 별궁(別宮)으로 쓰던 곳이다.
(*원래 별궁은 입출입이 까다로운 궁궐을 대신하여, 혼인을 준비하는
세자빈의 가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궁궐과 사가의 중간 위치에
따로 마련해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외척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는 연우를
보호하기 위한 선대왕의 은밀한 배려로 궐내에 연우의 별궁이 마련된다)
이곳에서 병을 얻은 연우가 출궁한 후 죽게 되자,
불길한 기운이 서린 곳이라 하여 사용을 금하고 폐쇄시킨다.
그 어느 전각보다 꽃과 과실수가 많았던 아름다운 전각이었으나,
지금은 무성한 잡초와 음산한 기운만이 깃들어 있고,
세자빈 허씨의 혼령이 떠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보태지자,
궁인들에게는 아예 공포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8년 후.
액받이 무녀로 입궐한 연우에게 이곳의 혼령을 위로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자신이 위로해야 할 혼령이 바로 자신의 혼령임을 모르는
연우는(기억을 잃었으므로) 매일 아침 그 곳에 정성으로 향을 올리고,
청소를 하고, 장원서에서 얻은 꽃씨로 삭막한 정원을 가꾸어 나간다.
어느 날 연우는 그 곳에서 한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저 궁녀들의 소문 속에 등장하는 혼령이 자신의 신기(神氣)에 의해
보여진 것이라고만 믿는다. 어느 날....늘 뒷모습만 보이던 아이가
연우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연우는 잃어버렸던 기억의 끈을 잡는다.
“저 아이는.....바로 나다!
이곳은.....내가 죽었던 곳이다!”
라. 활인서(活人署)
드라마 중반, 연우가 궁에서 쫓겨나서 생활하는 곳.
조선은 유교적 통치이념을 근간으로 했기에 무속과 불교는 좌도(左道)로
치부되어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국무(國巫)와 성수청 소속 무녀
들을 제외한 무격(巫覡)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도성 밖의 활인서나
각 지방의 관청에 소속되어 병자의 치료를 도와야만 했다(이를테면 유배
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무녀는 의원의 힘으로 안 되는 병을 주술로
치유하는 일을 했으나, 사실 무녀의 치병능력을 믿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정신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볼 수 있다.
역병 환자, 기근에 허덕이는 빈민, 노숙자, 유랑민, 죄수 등등,
그 시대 가장 빈곤하고 천대받던 최 하층민들이 모여 있던 이곳에서,
연우는 신기(神氣)가 아닌(실상, 그녀는 무녀가 아니므로) 그녀 특유의
따뜻한 심성과 유쾌함으로 고단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의 상처와 포한(抱恨)을 치유해주게 된다.
(*마치 ‘조선 최초의 여성 정신과 의사’처럼, 씩씩한 ‘나이팅게일’처럼)
이곳에서의 시련은 그녀가 국모로서의 자질을 갖춰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수업의 장이 되고, 그로인해 연우는 민초들의 고단함을 직접 체험하고
국모의 자리에 오르는 최초의 여인이 된다.
또한 활인서 무녀들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드라마적 상상력을 가미, 다양하고 독특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위기와 반전, 예측불허의 사건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공간으로 활용한다.
4-1. 등장인물
(1) 달을 그리는 해 - 이 훤(暄) (15세~23세)
7세 : 세자책봉 (왕의 유일한 적통이므로 별 문제없었음)
15세 : 보경과 국혼 (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결합)
16세 : 갑작스러운 부왕(父王)의 승하로 왕위에 등극
(암암리에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음)
16~19세 : 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 기간 (세도정권의 절정기)
19세 : 친정(親政) 실시 (왕권 VS 세도정권의 본격적인 대립 시작)
23세 : 현재 개혁을 꿈꾸는 조선의 젊은 국왕
나는 이 나라의 왕세자다 (세자시절)
잘 생겼다. 영리하다. 고집 무지하게 세다. 근자감 죽여준다.
(말 그대로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나는 왕세자니까!!!)
하루 일과를 떼쟁이 민화공주를 놀려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민화공주는 질색하지만 나름의 애정표현이다)
군저(君邸)에 살고 있는 양명이 문후 차 입궐이라도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갈 만큼 형을 좋아한다(서열 1순위, 2순위? 그런 거 모른다. 적장자와 서장자? 이미 그렇게 태어난 걸 어쩌란 말이냐? 형님은 그저 내게 좋은 형님일 뿐).
아직은 정치세계의 냉정함과 비열함을 모르는 훤은 노회한 정치가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 자체가 위협’인 양명 앞에서 언제나 티 없이 밝게 웃는다.
그 티 없이 밝은 모습이, 양명에게는 곧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자시절의 훤은 아직 모른다.
시강원의 스승들도 두 손 두 발 들게 하는, 못 말리는 악동에 개구쟁이다.
스승들 괴롭히기.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세자생활에 지친 훤이 개발한 유일한 즐거움이다. 세자의 장난에 안 당해본 스승이 없었고, 더는 못 견디고 낙향을 한 이가
수십 명이었다. 야생마 같은 세자를 길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이처럼 약간은 가볍고, 조금은 무책임하며, 아직은 왕재로서 미숙한 성정을 지닌
훤을 철들게 만든 이가 바로 염과 연우이다.
훤이 염을 통해 학문의 즐거움과 군왕의 도리, 올바른 정치가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연우를 통해서는 자신이 다스려야 할 궐 너머의 세상과 첫사랑의 설렘을 배웠다.
연우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왕세자의 첫사랑은 결실을 맺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외척가문의 보경이 대신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연우를 잃은 충격과 슬픔은 훤의 성격마저 변하게 만든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귀엽고, 철없던 왕세자가 아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권모와 술수가 무엇인지를 처절한 체험으로 배워나가는
스물세 살, 조선의 젊은 국왕이다.
과인은 조선의 왕이다 (현재)
차갑다. 시니컬하다. 별로 웃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까칠 냉미남이요, 솔직히 말하면 재수가 좀 없다.
종묘사직을 보존해야 할 왕 주제에 후궁을 품지 않는다.
후궁은커녕, 중전도 품지 않는다. 이유? 원자 생산을 목 놓아 기다리는 외척세력에
대한 반항심도 물론 있다. 중전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사랑 연우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남긴 아픈 상처가,
다른 이에게 마음이 가는 걸 허락치 않는다.
왕에게도 순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하는, 아니 아니, 상상 조차 못하는 궁인들
사이에 ‘어쩌면 왕이 남색가일지도 모른다’는 불경스러운 소문까지 돌 지경이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의심을 받는 자가 바로 왕의 최측근인 운검(雲劍),
운이다(미안하다. 오해했다). 운마저도 궁인들 사이에서는 빙운(氷雲)이라 불리니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 세트로 춥다. 얼어붙은 태양과 얼어붙은 구름.
잘 어울린다. 그림은 좀 된다.
가끔씩 훤이 피식 웃을 때가 있는데 차라리 안 웃는 게 낫다.
그 웃음에 새겨진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머리에 쥐가 나기 때문이다.
(성심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이 빈청에 모여 회의를 열 정도다)
훤의 포커페이스는 왕권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이자 위장술이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왕인 성조 대왕의 독살설이 암암리에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을 훤도 알고 있다)
3년간 대왕대비전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 열아홉 나이에 드디어 친정(親政)을 실시하였으나, 조정을 장악한 외척세력들의 견제로 훤이 품은 개혁의 꿈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저들의 세도로 인해 민생은 피폐해지고, 언로는 차단되고, 충신과 인재는 온갖 모반과 옥사에 엮여 줄줄이 사사되거나 위리안치 되었다. 이제 저들의 뜻대로
훤의 주변에 훤의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사방이 온통 적뿐인 고립무원 궐 안에서 훤은 날카로운 용의 발톱을 숨긴 채,
훤의 사람을, 훤의 군사를, 훤의 정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 포커페이스가 필요할 수밖에.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일까? 훤은 요즘 자주 아프다.
내의원의 권고로 온양행궁으로 피병을 갔다가 운을 꼬드겨 잠행을 나간다.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칠 때부터, 아니면 뒤이어 폭우가 쏟아질 때부터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어야 했다.
비를 피해 들어선 집. 음산한 무녀의 집에서 훤은 월을 만난다.
첫사랑 연우와 너무 닮은 사람! 그런데 아니란다. 자신은 무녀란다.
어떤 계시처럼 문득, 8년 전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의문이 생긴다.
사람을 놓아 사건을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월과 연우는 과연 동일 인물일까?
밝혀진 진실 앞에서 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2) 해를 품은 달 - 월, 허 연우(煙雨) (13세~21세)
홍문관 대제학의 딸. 염의 누이동생. 훤의 첫사랑.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신데렐라 아닌 신데렐라.
내 이름은 허연우
연우(煙雨).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안개비 또는 보슬비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정은 오히려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청량하고, 신선하고, 쾌활하다.
산천초목,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비, 세상의 온갖 것에 호기심이 많고 잡학에도
관심이 많은 엉뚱한 소녀다. 사대부가의 여식답지 않게 나무도 탈 줄 알고, 새총도
쏠 줄 아는 말괄량이 아가씨다. 집안의 노비 설과는 하루 종일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며 동무처럼 지낸다.
아버지의 서가에서 책을 훔쳐 읽다가 걸려 회초리를 맞은 것도 수십 번이건만,
하룻밤만 지나면 씨익 웃으며 다시 아버지의 서가를 기웃거릴 만큼 학구열도,
고집도 세다. 홍문관 대제학의 여식답게 영리하고 똘똘하다.
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그녀를 위로해주는 건 언제나 오라버니인 염의 몫이다.
오라버니가 세자 저하의 서찰을 처음 갖고 왔던 날, 처음 느꼈던 두려움은
서찰교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설렘으로 바뀌었다.
민화공주의 예동(禮童)이 되어 동무인 보경이와 함께 입궐하게 되었을 때,
공주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는 기대감보다, 혹시라도 궐 안에서 마주치게 될
훤의 모습이 더 기대되었다. (그때 보경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연우는 몰랐다.)
섣달그믐, 궁중의 나례의식 때....
그 날, 가면을 쓴 훤이 연우의 앞에 나타났을 때,
달빛 아래 가면을 벗은 훤이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이자, 너에게 서찰을 보낸
이훤이다” 하였을 때, 그렇게 훤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설렘은 마침내 첫사랑이 되었다.
세자빈에 간택되어 별궁인 은월각에 머물렀을 때,
궁인들을 따돌린 훤이 은월각에 나타났을 때,
영리하고 똘똘한 이 아가씨, 짐짓 도도하고 새침한 모습으로 사랑의 밀고 당기기도
할 줄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훤의 반쪽이 되어 행복한 날들이 이어질 줄 알았는
데.....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버린다. 국혼을 얼마 안 남겨두고 사가로 돌려보내진다.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가 건네는 약을 먹으며, 연우는 어쩐지 죽음을 예감한다. 미리 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눈을 감는다.
내 이름은 액받이 무녀, 월(月)
월(月). 비를 피해 잠시 내 집에 머물렀던 그 분이 지어준 이름.
추위에 얼었던 몸을 녹여준 술상에 대한 답례라며, 무심히 달을 보며 지어준 이름.
정말 연우가 아니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몇 번이나 내게 묻고 또 물은 후에 탄식처럼 지어준 이름.
나는 연우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나는 무녀일 뿐이라고, 몇 번이나 대답한 후에
얻은 이름. 그 분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술잔 위에 비친 달을 보며 나도 내가
무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연우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 이름. 어쩐 일인지 문득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아파왔던 그날의 만남....
훤에게 월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아가씨, 자신이 연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8년 전, 외척세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연우.
도무녀 장씨의 주술에 의해(대왕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은) 죽음의 문턱에 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도무녀 장씨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나, 무덤 속에 갇혔던
그 순간의 공포와 고통으로 전사(前事)를 모두 잃어버렸다.
8년이란 세월을 도무녀 장씨의 신딸이 되어 천한 무녀의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전사를 잃어버린 덕에 오히려 밝고, 씩씩했던 예전의 성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장씨의 말에 의하면 분명 신내림을 받았다는데(신내림을 받은 기억도 그녀는 없다), 전혀 신기(神氣)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대신 그녀에게는 직관력과 통찰력,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유쾌한 매력이 있다.
도무녀 장씨의 출타 중에 찾아온 몇몇 손님들을 본의 아니게 치유해 준적도 있다.
신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말투, 행동,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마치 셜록홈즈처럼 그 사람의 아픔을 읽어내고 충고를 해준 것뿐인데도 꽤나 용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걸 보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비오는 날의 그 만남 이후....이유를 알 수 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가슴이 아파왔던 그 날 이후, 어쩌면 자신에게도 신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분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느낀 것이었기
에....
어느 날, 낯선 세 남자(관상감의 세 교수)가 월의 거처를 방문한다.
도무녀 장씨의 허락을 받았다며(거짓말!), 그들은 월을 가마에 태워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인간부적이 되어, 액받이 무녀가 되어, 누군가의 액을 대신 받아주러 가는 길.
그 길이 낯이 익다. 또 다시 그날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아파온다.
마침내 가마가 도착한 곳은 궁궐! 월이 지켜줘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나라의 지존!
액받이 무녀가 되어 왕의 침전에 들어선 월은 잠들어있는 왕의 얼굴을 본 순간
기겁을 하고 만다. 비 오던 날, 비를 피해 내 집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
나에게 연우가 아니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냐고 슬픈 표정으로 물었던 사람!
밤새 잠들어 있는 훤의 머리맡을 지키며 월은 또 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또 다시 가슴이 아파져오는 것을 느낀다.
(3) 해에 가려진 슬픈 빛-양명군 (陽明) (17세~25세)
전왕의 서장자. 희빈 박씨의 소생. 훤보다 두 살 많은 이복형.
훤의 후사가 없는 지금,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의 왕자.
슬프지만 밝은 빛(陽明)
2년 전 첫 부인이 죽고 지금은 돌아온 싱글, 이른 바 자유의 몸이다.
유유자적, 풍류남아, 겉으로는 허허실실, 내면은 오리무중.
자유로운 영혼이다. 아니,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용을 쓰고 있는지,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왕위 계승 서열 1순위. 그 허울 좋은 명분 때문에 양명의 저택에는 늘,
언제나, 권력에 뒷줄을 대려는 도포자락들로 넘쳐난다.
훤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불경스럽게도 그 수와 빈도가 점점 더 늘어난다.
왕에게 후사가 없기에 양명은 더욱 더 그들의 관심대상이 된다.
늘 역모에 노출되어 있는 위험한 인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 자체가 위협’인 인물이다.
귀찮은 날파리들을 쫒기 위해 용쓰다 보니 위장술, 변장술만 늘었다.
장난이 아니라, 양명의 군저에는 비밀의 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변장에 쓰일
가체, 의상, 콧수염, 등등이 셀러브리티들의 명품 컬렉션처럼 쭈욱 걸려있다.
위장술? 끝내준다. 술 먹고 길바닥에 누워 자기, 옆 집 누렁이와 진지하게 대화
하기, 기생집 앞에서 기녀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삼류 패관소설의 주인공 흉내
내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연기력에 물이 오른다.
요즘 그는 기막힌 방법 하나를 더 개발했다. 바로 칭병을 하고 피방을 가는 것.
손님이 찾아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방 갔다 하여라!’ 이르고는
잽싸게 도망 나오는데, 이제는 거의 취미수준이 되었다.
양명이 피방을 적극 예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귀찮은 세도가 무리를 피해 숨어 있기 좋은 곳이며,
(양반놈들이 아녀자나 드나드는 무당집에 올 리가 없지!)
둘째, 그곳을 드나드는 아리따운 부녀자들에게 작업도 걸 수 있고,
(나는 돌싱이므로 당당하다!)
셋째, 기방 출입보다는 금전적으로도 훨씬 이익이며,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던가!)
넷째, 어줍잖은 신기로 혹세무민하는 무당을 색출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며,
(대외 선전용일뿐이다. 양반은 그럴싸한 명분도 필요할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속에 미쳐 무당집이나 드나드는 파락호란 소문을 널리 알려,
두 번 다시 권세에 빌붙는 파리떼들이 꼬이지 않도록 밑밥을 뿌리는 일이니
내 어찌 무당집 순례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 양명 <조선 무당순례기> -
이런 궤변을, 출판하지도 않을 자신의 수기집에 늘어놓으며,
‘오늘은 각심절본무당네로 갈까, 당골네로 갈까, 아니 노들본무당네로...’
흥얼흥얼 이 무당집, 저 무당집을 순례하는 것이다.
(*후에 양명의 이 해괴한 행동은 무녀가 된 월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쯤 되면 진상이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그를 믿고 거대한 꿈을 꾸던 몇몇 무리는 벌써 침을 퉤퉤 뱉고 물러났다.
그러나.....
모르는 이들의 눈엔 진상이지만, 양명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눈엔
슬픈 몸부림이다. 생존하기 위한 비참한 위장술이다.
해에 가려진 슬픈 빛
어린 시절 부왕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건 냉대뿐이었다.
양명의 영특함도, 뛰어난 재능도, 부왕에게는 세자인 동생을 위협하는 요소일 뿐
이었다. 자신을 아들로서가 아닌, 세자의 정적으로 간주하는 부왕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자신을 사심 없이 따르던 훤의 선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쌓이고 쌓인 설움과 울분으로 가슴 속에 칼 한자루 품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당시의 그는 어둡고, 무거웠으며, 말을 지나치게 아끼는 소년이었다.
부왕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홍문관 대제학의 사가에 드나들며 치유받았다.
그곳에서 대제학으로부터 학문과 아버지의 정을 배웠다.
박 운검대장으로부터 검술과 풍류를 배웠다.
염, 운과는 동문수학하며 벗으로서 함께 하는 우정을 배웠다.
염의 누이 연우를 만나서는 애타는 그리움과 연모를 배웠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훤과 양명은 또 다시 운명처럼 부딪힌다.
훤과 연우가 서로를 연모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양명은 또 다시 뒤로 한발자국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혼인을 꿈꾸던 양명은 그녀의 세자빈 간택에 좌절하고,
뒤이은 그녀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다.
훤에 버금가는 왕재를 타고나 서글프고,
훤과 같은 여인을 사랑해서 아픈 남자, 양명...
후에 양명은 무녀 월이 연우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훤보다 먼저 알게 되고.
한 발 뒤에 진실을 알게 된 훤과 또 다시 운명처럼 맞부딪치게 된다.
적장자와 서장자, 군과 신의 관계를 넘어, 이제는 사내 대 사내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양명은 이번에도 훤의 뒤로 물러서게 될까?
과연 양명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4) 비를 품은 구름 - 운(雲) (15세~23세)
본명 김제운. 23세의 젊은 무사.
운검(雲劒)이자 선전관청 소속으로 선전관 겸직.
조선 최고의 운검으로서 왕인 훤의 최측근에서 그를 호위한다.
이기적 유전자다. 뭘 해도 그림이 된다.
날카로운 눈매에 서늘한 콧날,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육척이 넘는 훤칠한 키와 긴 팔다리로 언제나 훤 뒤에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다.
그의 그림자도 그림이 된다.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이다.
그의 스펙 또한 예술이다. 뛰어난 무예실력(조선 팔도에 검술로 그를 따를 자가
없다. 거의 신기(神技)에 가깝다), 문과 급제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양,
병법의 지략, 단려한 외모, 게다가 과묵하기까지..... !
운검으로서, 왕의 남자로서 최고의 자격요건은 다 갖췄다.
궁녀들에게는 은밀한 엿보기의 대상으로 인기의 절정을 달린다.
그가 지나가면 궁녀들의 촉이 서고 시선이 쏠린다. 우연히 그의 음성 한 자락이라도 듣는 날엔 마치 승은이라도 입은 듯 미친 듯이 감격한다. 운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는 판구락부(眅俱樂部 :요즘말로 팬클럽)도 결성되었다. 그 아찔하고 서늘한 매력 덕에 빙운(氷雲. 얼음 구름)이라는 애칭도 얻었다(by 궁녀들).
하지만 그는 표정이나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다. 당장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절대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무표정하게 왕을 호위할 인물이다.
게다가 잘 웃지 않는다. 양명이 그의 웃음을 한 번 보고자 별짓을 다해보지만,
빙운은 빙운이다. 쉽지가 않다.
이기적인 유전자 김제운.
그의 이기적인 외모는 장안의 유명한 명기였던 어머니로부터,
그의 타고난 무사 기질은 오위도총관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으리라 짐작하겠
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운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그들은 정작 운에게 준 것이 없다.
아, 그들에게 받은 것이 아주 없지는 않다. 어미로부터는 학대와 냉대를,
아비로부터는 ‘서자’라는 주홍글씨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버림 받았다.
그의 훌륭한 유전자는 오히려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박씨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녀의 눈물겨운 애정과, 헌신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운의 나이 여섯 살.
친어미가 죽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본가로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줄곧 친 어미의 냉대 속에서 살아온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파도 울 줄 몰랐고, 심지어 그것이 아픔인줄도 모르는 아이였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 그것이 어린 운이 인식한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자애심을 모르는 운에게 박씨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알려주었다.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굳건한 의지를 심어주었고,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었다.
박운검(박씨 부인의 동생)에게는 검을,
홍문관 대제학에게는 학문을,
염과 양명에게는 고마운 벗들의 정을....
이 모든 것을 익히고 받아들이게 만들어준 사람....
심장에 피가 돌게 하고, 정이 스며들게 하고, 운검으로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그 사람이 바로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운의 어머니,
박씨 부인이다.
그리고....운을 남자로 만들어준 또 한 명의 여인.
연우.....아니, 무녀 월(月).....
훤을 수행하여 간 온양행궁.
문득 세자시절의 장난기가 발동한 훤을 따라 나선 잠행.
그리고 잠시 비를 피해 머물렀던 무녀의 집.
달빛 아래 앉아있는 무녀 월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천한 무녀의 신분에도 당당하고 해맑은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운은 처음으로 운검이 아닌 남자가 되었다.
마치 어떤 운명처럼 액받이 무녀가 되어 입궐한 월을 다시 보았을 때.....
얼음만 서걱거리던 그의 심장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운검으로, 그녀는 액받이 무녀로, 그렇게 함께 왕의 밤을 지켜주었을 때....
잠든 왕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쓰렸다.
월의 노비 설이 쓰는 검술이 자신의 검술과 동류임을 알았을 때,
그리하여 그녀가 바로 어린 시절 염의 사가에서 자신들의 검술 수련을 훔쳐보던
그 어린 여종임을 알았을 때.....그로 인해 누구보다도 먼저 월이 바로 연우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 가슴이 그토록 아픈 이유를, 아직도 연우를 잊지 못하는 왕에게 진실을 고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웠다.
무녀여서 다행이었다. 왕의 여자가 아니어서 감사했다.
그러나 그녀가 왕의 여자임을 알게 된 지금,
왕에게 그녀를 돌려주어야만 하는 지금....
운은 침묵한다. 침묵하며 아파한다.
주군에 대한 충심. 처음으로 품은 사내의 연심....
운은 갈등한다. 갈등하며 아파한다.
(5) 날개 꺾인 불꽃-허 염(炎) (17세~25세)
의빈 성록대부 풍천위. 훤의 스승이자 매제.
민화공주의 남편. 연우의 오빠.
아름다운 외모에 고결한 성품, 뛰어난 학식의 간세지재 (間世之材)로
성균관 시절 모든 유생들의 우상이었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초(超)절정 미모의 소유자다. 그를 처음 만난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의 외모에 넋을 잃고 빠져든다. (심지어 훤마저도!).
게다가 수재다. 보통 수재가 아니다.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초(超)천재다.
학문을 사랑한다. 활자중독증이라 할 만큼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문학, 정치, 역사, 철학, 잡학, 거기다 성(性)의학까지...그의 관심이 가지 않는
분야가 없고, 깊이가 없는 학문이 없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정도(正道)가 아니면 걷지 않는다.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성품이다.
화를 내는 법도, 거짓말을 하는 법도, 잔머리나 요령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한 마디로, 메이드 인 조선의 바른 생활 사나이.
살아서 움직이는 조선의 국정교과서다.
물론 그에게도 단점은 있다. 그의 장점이 곧 단점도 된다.
우선 고지식하다. 융통성이 없다. 개그 감각이 없어 썰렁하다.
남녀의 감정에 둔하며 내외법에 충실한 천하에 없는 유생 그 자체다.
그 최대 피해자가 바로 민화 공주다. 부부의 정을 나눌 때조차 예의와 절차에
지나치게 충실하여 그녀의 애를 태운다.
또 있다. 문사(文士)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대신 검술에는 취약하다.
오죽하면 어깨 너머로 배운 계집종 설의 실력이 더 좋을까.
그의 검술실력은 두고두고 운과 양명의 놀림감이 된다.
열일곱에 과거 장원 급제 한 염.
그해에 바로 중5품인 세자시강원의 문학에 제수되어 겨우 두 살 아래인
왕세자 훤의 스승이 되었다. 그 후 염은 석강(夕講)과 야대(夜對)를
오가며 훤과 사제의 정을, 군신의 정을, 그리고 동년배의 우정을 나누었다.
염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탄탄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축복의 날들....
그러나.....연우의 죽음 이후 비극의 시작점이 되어버린 그 시절....
지금도 염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훤과 연우를 연결해준 자신을
책망하고 후회한다.
그때 세자의 스승이 되지 않았더라면.....우리 연우는 죽지 않았을까?
그때 연우의 존재를 세자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우리 연우는 살아있을까?
그때 세자의 선물과 봉서를 누이동생에게 전하지 않았더라면....그랬다면
우리 연우는 지금쯤.....
지금도 염은 죽은 누이동생의 이름을 말할 때면 항상 ‘우리’ 연우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목이 멘다.
병이 있는 여식을 세자빈 후보로 올린 죄로 멸문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자신과 아버지를 유배로부터 구해준 이가 바로 민화였다.
염과 민화의 혼례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왕의 사위인 ‘의빈’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금고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정치적 활동과 발언도 용납되지 않는다.
대외적인 그 어떤 학문 활동도 할 수가 없다.
일평생을 몸을 사리며 조용히 살다 가는 것만이 그들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하여 염의 재능을 인정하고 깊이 아꼈던 선대왕이,
그를 훤의 오른팔로 삼겠다는 의지를 굳이 숨기지 않던 선대왕이,
왜 염을 의빈으로 간택했는지, 염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궁금해 했고,
안타까워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다!)
지금이라도 민화공주가 그를 놓아주기를, 그가 학문과 관직에 복귀하기만을
고대하는 선비들이 관직의 말단, 사림 등 곳곳에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외척세력의 수장 윤대형의 견제를 받는다!)
이따금 누군가와 뜻을 나누고, 학문과 정치에 대해 논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때면 염은 가슴 속의 불꽃을 다독이며 책장을 넘긴다.
민화에게 고마운 마음은 있었지만, 여인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긴긴 시간 자신만을 바라보는 민화의 모습이 언젠가부터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정방(대갓집의 목욕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당혹스럽게
하고, 규방 여인답잖게 과감한 애정 표현을 해놓고 두 뺨이 붉게 물드는 것도
귀여워진다. 계절이 흘러가듯, 단풍잎이 물들어가듯 서서히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염....뒤늦게 자신을 향한 설의 연심을 알고도 그녀의 마음 한 자락 받아줄
수 없는 것에 못내 미안해하면서, 그는 그렇게 공주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 사랑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6) 불꽃이 되지 못한 꽃-민화공주(旼花) (12세~20세)
훤과 양명의 동생. 염의 어린 신부.
귀엽다. 순진무구하다. 천진난만하다. 한마디로 타고난 공주다.
지금은 많이 양호해졌지만, 꼬꼬마시절에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에 천방지축,
철딱서니에 떼쟁이 응석받이였다(덤으로 고집이 센 건 집안 내력이라 봐준다).
최강 동안이다. 한 달 뒤면 스물한 살이 되는 데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 때문에
민화가 하는 짓은 뭐든지 귀여워 보인다.....라고, 남편인 염은 말한다.
하여, 염에게 민화는 부인이라기보다 귀여운 막내 여동생 같은 존재다.
민화에게 보이는 미소도 남자의 미소가 아니라, 언제나 오빠 같은 따뜻한 미소다.
공주라는 신분에 대한 예우차원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어린 민화의 성정 때문에
염은 더욱 더 예의를 지켜 민화를 대한다.
염의 이런 자세가 민화는 몹시 마음에 안 든다. 안 그래도 하구한날 사랑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어대는 통에 독수공방 외로운 날들을 보내는 민화인데,
의남매 맺자고 혼례를 올렸나, 자신을 여자로도 보지 않으니 애가 타서 미칠
노릇이다. 그러니 어쩌겠나. 목마른 자가 샘 판다고, 최강동안인 외모와는
심하게 어울리지 않지만 무척이나 적극적인 사랑의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다.
민상궁을 입궐시켜 관상감에서 받아온 택일 날짜를 열공하고 있는 염 앞에
불쑥 내밀지는 않나, ‘소녀는 잘 모르지만......, 진짜 잘 모르지만......’이란 말을
꼭! 앞에 덧붙인 후에 <포박자>, <옥방비결>등 성의학서에 나오는 정보를
천진난만한 얼굴로 읊어대지를 않나.....당황하는 염의 얼굴을 말똥말똥 바라보는
민화공주의 대책 없는 천진난만 덕에 옆에서 공주를 모시는 민상궁만
얼굴 화끈, 좌불안석, 나날이 늙어갈 뿐이다.
민화의 염바라기 사랑은 그 역사가 깊다.
민화는 유난히 어린 시절 병사가 많았던 공주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동딸이다.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편전에서는 오만상을 찌푸리던 왕도 민화만 보면 함박웃음을 지었고,
왕의 다리는 민화만이 앉을 수 있는 전용 의자였으며, 왕의 두 팔에 안겨 높은
곳에서 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민화였다.
당연히 민화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민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하여 그녀는 무엇인가에 욕심을 내어본 적이 없다. 욕심을 내어보기도 전에 이미
그녀의 손에 그 어떤 것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민화가 처음으로 욕심을 내었던 사람이 바로 염이었다.
열두 살 때, 오라버니의 스승인 염을 보고 민화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자신도 허문학에게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부왕(父王)께 청을 올렸으나,
왕세자와 공주가 함께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라며 부왕은 불허했다.
대신 부왕은 민화의 교육을 위해 예동을 들여주었다.
그렇게 들어온 예동이 연우와 보경이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염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민화는 절망하지만 이내 연우가 염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래 시누이에게 대하듯 지극정성으로 연우에게 잘해준다.
두 번째 민화의 청은, 염과의 혼례였다.
나라의 동량이 될 뛰어난 인재를 의빈으로 묶어둘 수는 없다며
이번에도 부왕은 엄격하게 불허하였다.
늘 원하기 전에 주어졌기에, 간절히 원한 적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올바른 방법을 몰랐으니, 떼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단식투쟁까지 해가며 시위를 해도 부왕은 꿈쩍 하지 않았다.
때마침 연우가 죽지 않았다면.....그녀는 영원히 염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끔....아무도 찾지 않는 썰렁한 동호(서재)에서 홀로 책을 읽는 염을 볼 때면
자신이 염의 날개를 꺾어버린 것만 같아 문득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민화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나도 그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단 며칠이라도 그의 품속에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억겁(億劫)의 세월도 지옥불 속에서 견딜 각오가 되어 있다.
그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은 드라마의 활력소가 된다.
그 활력이 주는 매력만큼,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얼굴만큼,
그녀가 가진 반전(!)의 충격은 크다.
(7) 불꽃을 품은 눈-설(雪) (12세~20세)
과거 허씨 가문의 노비. 본명은 이년. 현재 이름은 설(雪).
연우를 호위하는 보이시한 느낌의 소녀 검객. 염의 수호천사.
예쁘장한 얼굴과는 달리 터프하다.
목소리 크고, 힘도 세고, 필요할 땐 욕도 잘 하고, 싸움도 무지 잘한다.
도무녀 장씨와 대작하면 막상막하의 말술이다. 말빨에서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그녀가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대작 상대가 훗날 만나게 되는 운이다.
우연한 계기로 도무녀 장씨와 얽히게 되면서 연우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그 후 액받이 무녀가 된 연우와, 성수청의 국무로 복귀하는 장씨를 따라
함께 입궐한다. 그녀의 미소년 같은 외모는 곧바로 궁녀들의 레이더망에 포착,
운을 이은 궐내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한다. (그녀는 절대 남장한 것이 아니다.
검을 쓰기 쉽고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했을 뿐!)
기억을 잃은 연우에겐 더없이 위험한 공간 궁궐....
연우의 호위무사가 되어 그녀를 지켜주던 설은 어느 날 궐내에서 운과 마주친다.
어린 시절, 염의 사가에서 염과 양명에게 검을 가르쳐주던 운이었다.
어깨 너머로 그 검술을 익힌 설이었다. 자신의 검술을 알아본 운에게 설은 정체를
들켜버린다. 설의 정체는 연우의 정체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기에,
운은 곧 월이 연우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운은 침묵한다. 그 침묵이 연우에 대한 연모의 감정과 다르지 않음을 설은
간파한다. 그녀 역시 염을 향한 지독한 외사랑을 하고 있기에.....
숨기고 싶은 비밀 한 가지씩을 서로에게 들킨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로 서로의 비밀을 지켜준다.
그때부터였다.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가 형성된 것은.
괜히 상대의 심기를 툭툭 건드려 보는 쪽이 설이었고 (침묵하는 운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쪽이 운이었다. 무사의 의리와 우정을 내세워
가져온 술병을 넉살 좋게 턱! 내려놓는 쪽이 설이었고, 역시 무표정으로 대작해
주는 쪽이 운이었다. 항상 먼저 취해 쓰러지는 쪽이 설이었고, 말없이 설을 등에 업고 숙소 앞에 놓아주고 가는 것이 운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주인만을 섬기는 호위무사로서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짝사랑의 아픔을 함께 나눈다. 운다운 침묵과 설다운 깐죽거림으로....
(* 두 사람의 감정은 뭐랄까...사랑은 아닌, 우정과는 닮은, 동지애와는 많이 비슷한,
그러나 누군가 어느 한 부분을 톡 건드려주면 당사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랑이 될 것도 같은 기대감을 품게 하는.....그런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대충 눈치 챘겠지만 그녀는 소녀 보다는 소년에 가깝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그 어느 여인보다 지독하게 한다.
지독할 만큼 순수하게, 지독할 만큼 아프게, 지독할 만큼 모든 것을 바쳐.....
일곱 살 때 허씨 집안으로 팔려와 연우의 몸종이 되었다.
그 집 도련님 염으로부터 ‘이년’이 대신 ‘설(雪)이라는 예쁜 이름을 받았다.
종년인 자신을 여자로 봐주고, 다정스레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는 염이 처음이었다.
설레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염으로 인해 그녀는 사람이 되었고, 여인이 되었고, 이년,저년이 아닌 설이 되었다.
그 후 남몰래 염을 향한 연모의 마음을 키워나갔다.
감히 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올려다봐서는 안 될 상대임을 알기에,
감히 품어서도 안 되는 감정임을 알기에, 감정이 깊어질수록 염 앞에서는
오히려 더 퉁명스러워졌다. 그 흔한 미소도 보일 수가 없었다.
세자빈 간택 후 병을 얻어 나온 연우가 생사를 오가고 있을 때,
설은 다른 집 노비로 팔려가게 되었다.
가기 싫다고, 왜 나를 버리느냐고 물을 수도, 매달릴 수도 없었다.
주인이 가라면 가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것이 노비의 팔자였다.
설은 다시는 염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었다.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또 울었다.
연우가 걱정이 되어, 염이 보고 싶어 결국 팔려간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옛 주인집으로 돌아온 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연우의 죽음이었다.
자신을 동생처럼, 동무처럼 대해주던 연우의 죽음에 설은 또 다시 울었다.
늦은 밤. 들꽃을 꺾어들고 연우의 무덤을 홀로 찾아갔을 때,
설은 한 여인과 한 남자가 무덤에서 연우를 꺼내는 장면을 목격한다.
성수청의 도무녀 장씨라는 여인과 소격서의 혜각도사라는 남자, 그리고 설...
세 사람은 그렇게 연우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날, 설은 도무녀 장씨의 무노비(巫奴婢)가 되었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설이 요구한 일이었다.
그렇게라도 연우를, 사랑하는 염의 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 후 8년이란 세월을 연우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그녀를 지켜주었다.
염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홀로 검을 쥐고 그리운 마음을 베었다.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말아라.” 떠오르는 염의 목소리....
검으로도 그리움이 베어지지 않으면, 염의 사가 근처를 남몰래 서성거리곤 했다.
어둠 속에서 숨어 보는 염의 옆에는 귀엽고 어린 신부가 있었다. 민화공주였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노비와 가장 존귀한 공주....
옛날처럼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사랑을 마음껏
비웃어주었을 뿐....
그러나 설의 사랑은 포기를 모른다. 패배를 모른다.
애초에 포기할 대상도, 패배를 인정할 상대도 없는 천한 노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설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목숨을 바친다.
자신에게 이름을 주고, 여인의 마음을 준 그를 지키기 위해...
그를 위해 검을 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생각하며...
뜨거운 불꽃에 녹아버릴까 차마 다가가지 못했던 가엾은 눈꽃 설은
그렇게 자신의 몸을 불살라 불꽃을 감싸고 찬연히 녹아버린다.
(8) 달을 꿈꾸는 거울- 윤보경(寶鏡) (13세~21세)
중전. 훤의 정비(正妃). 윤대형의 딸.
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다.
몸가짐이나 행동 역시 다소곳하고 얌전하다.
깊은 효심으로 양전(兩殿) 어른들의 사랑을,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아랫사람들의 흠앙을 한 몸에 받는다.
‘저렇게 어진 중전이 용종을 잉태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냉정하고
싸가지 없는 왕 때문이다.’
‘저렇게 아름다운 중전을 품지 않는 왕은 남색가가 분명하다.’
궁인들 사이에 떠도는 여론 또한 모두 중전의 편이다.
종묘사직을 보존하라는 대신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고,
그녀를 가여워하는 왕실어른들의 독촉이 이어지지만,
끝내 꿈쩍도 하지 않는 훤을 그녀는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쏠리는 사랑과 동정을 향해서도, 그저 나는 괜찮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다. 그 미소가 또한 애처로워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자, 여기까지가 대외적인 그녀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요, 연출이다.
어른들의 사랑, 아랫사람들의 흠앙, 왕친들의 동정, 조정의 여론형성....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녀의 선한 미소 뒤에는 서릿발 같은 칼날과 야심이 숨어있다.
영리한 그녀는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굳이 천의 얼굴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 지고지순하고 자애로우며 순종적인 국모의 얼굴.
딱 그 하나의 가면을 선택하여 많은 이의 사랑과 동정을 받는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음모와 계략은 조상궁을 수족으로 부리며
진행시킨다. 영악하다. 지능적이다. 한 차원 높은 권모와 술수를 부릴 줄 아는
그녀는 과연 윤대형의 여식답다.
어린 시절 보경은 꿈도, 야망도, 정치색도 없었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보경을 지금의 야심가로 키워낸 건 아버지 윤대형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궐 구경을 해보고 싶지 않으냐?
아버지를 따라 궁궐 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만난 훤에게 첫눈에 반해버린다.
딱 그 또래 소녀의 순수한 설렘이었고, 느닷없이 시작된 첫사랑이었다.
궐에서 살아보고 싶지 않으냐?
꿈이 없던 보경에게 꿈이 생긴다. 궐 밖에서 살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훤을 가까이
서, 오랫동안 보고 싶다는 소녀의 순수한 열망이었다.
예동(禮童)이 되어 공주의 동무가 되어보지 않으련?
훤의 누이와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훤의 짝이 되기 위한 첫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시선은 항상 보경이 아닌 연우를 향해 있었다.
게다가 훤과 연우는 이미 같은 감정을 키워가고 있었다.
질투가 생긴다. 경쟁심이 생긴다. 보경에게 처음으로 목표가 생긴다.
너는 세자빈이 될 것이다.
세자빈으로 내정되어있었건만, 연우에 의해 간택에서 밀려난다.
분노가 생긴다. 참을 수 없는 패배감이 느껴진다.
연우만 없다면......저 아이만 없다면......
마치 기적처럼 연우의 부고가 들려온다.
내침을 당했던 보경이 다시 세자빈의 자리에 오른다.
행운의 여신은 자신의 편이라고 보경은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분노 따위, 이런 패배감 따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고, 보경은 결심한다.
이제부터 마마는 이 나라의 국모이옵니다.
전왕의 승하. 훤의 왕위 등극. 보경의 왕비 책봉.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행운의 여신은 여전히 보경의 편이었다.
그러나 보경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나,
내 마음은 이미 다른 이에게 주었으니 내 마음까지 바라지는 말라’던 훤의 말은
단순한 겁박이나 거짓이 아니었다. 훤은 단 한 번도 보경을 품지 않았다.
죽은 망령과 연적이 된 자신의 처지가 보경은 비참했다.
그럴수록 가슴에 품은 칼을 갈아댔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연우가 나타난다. 액받이 무녀 월의 모습을 하고서!
생각해보면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은 행운의 여신이 아니라,
아버지 윤대형의 권모와 술수였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마저 역모를 꿈꾸며 나를 내치려 한다.
참고 참았던 분노와 설움이 폭발한다. 마침내 그녀의 가면이 벗겨진다.
평범한 소녀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야망의 화신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패악이다. 비극이다.
(9) 日月을 섬기는 巫女- 도무녀 장씨
성수청에 속한 국무(國巫). 조선의 최고 무당.
세자빈 시해 사건에 대한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최고의 신력을 가진 조선의 머리 무당. 그중에 으뜸 실력은 주술이기에
알 만한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혁파요구로 존폐위기에 놓인 성수청을 보호하기 위해,
왕대비 윤씨의 사주를 받아(왕대비 윤씨는 성수청의 막강한 비호세력이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연우를 시해하는 일에 공모한다.
자신의 흑주술로 연우를 병에 걸려 쓰러지게 만들고, 아비인 홍문관 대제학에게는
그것이 신병(神病)이라 속여 (*연우의 병이 신병이라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홍문관 대제학뿐이다. 중요한 이야기다!) 스스로 딸에게 약을 먹이게 만든다.
하지만 연우의 마지막 눈빛에 흔들려 결국 무덤까지 간 연우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게 되고, 이 과정에서 혜각도사와 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비밀을 공유
하게 된다.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연우가 기억을 잃었음을 깨닫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지만,
차라리 아픈 기억은 모두 잊고 편안히 살아가라는 마음에서 연우에게 신내림을
받다가 혼절한 거라 거짓말을 한다.
8년 동안, 연우를 자신의 신딸로 삼아 잔인했던 과거로부터 보호해주지만,
비오는 날 훤과 연우의 재회 이후,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여, 액받이 무녀가 된 연우의 뒤를 따라 입궐, 다시 국무의 자리에 앉으면서
또 다시 시작된 죽음의 위기 속에서 연우를 성심으로 보호해준다.
입이 거칠고 속내를 잘 말하지 않아 무뚝뚝하고 괴팍해 보이지만, 실상은 정이
많은 인물이다 (하여 설과는 성정이 맞아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낸다).
왕과 백성을 잇고, 백성과 하늘을 잇고, 하늘과 왕을 잇는 것이 성수청의
본분이라 믿으며, 유학자들의 지탄과 멸시 속에서도 왕실과 백성의 구복을
기원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10) 윤대형
훤의 국구. 보경의 부친. 외척세력의 수장이자 노회한 정치9단.
한성부 판윤을 지내다가 보경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파평 부원군에 봉해진다.
국모가 된 딸과 대왕대비 윤씨를 뒷배로,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 까지 오르지만
그는 아직도 목이 마르다.
권력에의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 냉정하고 탐욕적인 인물로
그의 과거 역시 권모와 술수로 얼룩져있다.
과거 선대왕의 치세 시 의성군의 역모를 조작하여 발고한 뒤,
반란 기밀을 알아낸 공로로 공신이 되었다.
이후 딸 보경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혀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하지만,
공신인 자신을 무시하고 연우를 세자빈으로 간택한 왕에게 분노하여
대왕대비 윤씨와 결탁, 세자빈 시해 음모를 꾸민다.
이어 자신의 권력에 걸림돌이 되어 온 선대왕마저 독살하기에 이른다.
(이미 오래전부터 품은 계획이었다. 공신에게 면사첩을 주진 못할망정,
외척이라는 이유로, 왕권과 신권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왕은 너무
오랫동안 공신들을 홀대해왔다!)
훤이 보위에 오른 후, 마침내 외척 세력의 정점이 되어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지만, 중전이 된 보경이 훤의 냉대로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젖비린내 나는 젊은 왕이 건방지게 왕권강화와 외척세력 배척을 선언하자
그의 심사가 또 다시 뒤틀린다. 게다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연우가 살아서 궐내,
그것도 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일처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결국 화근을
남긴 대왕대비 윤씨도 이제는 못 미덥다.
그가 또 다시 연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진행하고 있을 때,
훤은 세자빈 시해 사건의 진실에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마저 본격화시킨다.
이제 그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든다. 바로 양명군을 내세운 역모!
그 일로 자신의 딸이 희생된다 할지라도,
그간 자신을 비호해왔던 대왕대비 윤씨를 배신하는 일이 될지라도,
한 번 권력의 단맛을 본 그의 집념은 꺾이지 않는다.
(11) 대왕대비 윤씨
외척세력의 대지주. 성조대왕의 어머니. 훤의 할머니.
윤대형과는 정치적 연대 관계.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훤의 뒤에서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영리한 훤에 의해 결국 철정을 선언하고 뒷방으로 물러난다.
섭정기간동안 선대왕 때의 충신들을 제거하고, 그녀의 친정인을 정부에
포열해놓아 외척세력의 기반을 다져놓은 인물이다.
뒷방 늙은이로 물러난 뒤에도 친정 가문의 권세를 도모하기 위한 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여 친정가문의 보경을 대신하여 연우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자 장씨 도무녀에게 흑주술로 세자빈을 시살하라는 명을 내린다.
지금은 윤대형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 이 빠진 호랑이처럼 보이나
한때는 정희왕후 같은 철의 여인이었다.
후일 역모를 일으키는 윤대형에게 토사구팽 당한다.
(12) 성조 대왕
훤, 양명, 민화의 아버지. 문무를 겸비한 왕.
딸인 민화공주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 또한 지극하다.
과거 아끼던 이복동생 의성군이 역모에 연루돼 눈물을 머금고 사사한 기억이 있다.
하여 서자인 양명의 총명함을 마음으로는 아끼나 겉으로는 유독 싸늘하게 대한다. 훤과 양명 만큼은 훗날 세도가의 표적이 되어 역풍에 희생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홍문관 대제학의 학문과 성품을 높이 사 윤대형에 맞설 세력으로 등용한다.
또한 세자인 훤이 강력한 군주가 되어 마음껏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염과 연우를 훤의 사람으로 만들어주고자 하나, 외척세력의 음모로 좌절되고 만다.
훗날 의성군의 역모마저 윤대형의 조작이었음을 알게 되지만,
이미 자신 또한 그의 또 다른 음모에 의해 독배를 마신 뒤였다.
(13) 대비 한씨
훤의 어머니. 온화하고 지고지순한 조선시대 여인의 전형.
대왕대비 윤씨나 보경과는 달리 세도가의 여인이 아니며,
야망이나 정치색이 없어 윤대형의 견제를 덜 받는 인물이다.
민화의 예절교육을 위해 예동으로 들인 연우와 보경을 함께 교육시키면서,
내심 똘똘한 연우를 세자빈으로 점찍어두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연우의 어머니인 정경부인 신씨와는 서찰로 교우할 만큼 친분이 두텁다.
훗날 훤의 건강 악화가 처녀귀로 죽은 연우의 원혼 때문이라 여겨
연우의 혼령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제안하나, 이것이 거사로 이어질 줄은 모른다.
(14) 정경부인 신씨
연우와 염의 모친. 민화 공주의 시어머니. 홍문관 대제학의 처.
가난한 이를 보면 신고 있던 비단신을 냅다 벗어 던져주고는 후다닥 도망가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를 보면 포도청으로 달려가 누가 청하지도 않은 증언을 하고,
내 집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뭐 더 퍼줄 것 없나 곳간 열쇠를 들고 들락날락하고,
성정이 이러다보니 ‘대제학 집의 곳간은 도성 사람 모두의 것이요,
그 집 마나님은 여자 일지매다’라는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의 그런 성격을 딸 연우가 그대로 빼닮았다.
살아생전 남편의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딸과 남편의 연이은 죽음으로 그녀의 성격이 완전히 변해버린다.
시든 꽃처럼 활기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준 것이 민화공주다.
민화공주의 명랑함과 활기로 그녀는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공주라는 신분임에도 보잘 것 없는 사가로 들어와 살아주는 것도 고맙고,
무뚝뚝한 아들을 애달프게 해바라기하는 모습도 안쓰럽고,
공작은 닭으로, 학은 오리로 만들어버리는 극악의 자수솜씨도 귀엽다.
고지식하고 대쪽 같은 남편을 쏙 빼닮은 염의 성정을 알기에
민화공주의 외로움 또한 이해하고 친딸처럼 사랑으로 대한다.
(15) 허영재
연우와 염의 부친. 홍문관 대제학.
청렴결백한 성정과 높은 학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선비이자 관료이다.
왕에게 간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충직한 성품 덕에 선대왕의 총애를 받지만,
바로 그 올곧은 성정 때문에 윤대형을 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신분의 귀천보다 인품의 귀천을 더 중요시
하는 인물로, 前운검대장 박인걸이 운에게 글을 가르쳐주십사 부탁하였을 때도
그는 거절하지 않는다. 아들인 염과, 염의 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양명을
운에게 소개해주어 친구의 정을 알게 해 준 것도 그다.
연우의 신병(神病)으로 인해 가문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해지자, 아들의 앞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제 손으로 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딸을 죽인 슬픔과 죄책감으로 남은 인생을 고목처럼 지내다가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른다.
(16) 희빈 박씨
양명군의 어머니. 선대왕의 후궁.
선대왕의 승하 후 정업원에 머물고 있다.
대비 한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야심이 없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선대왕이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하여 양명에 대한 선대왕의 진심을 그녀는 알고 있다.
늘 역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양명이 안쓰럽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없는 사람처럼 위장하고 사는 양명의 모습이 가슴 아프지만,
‘권력을 탐하지 말고, 존재를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가끔은 원망스럽다.
양명이 역모에 가담했음을 눈치 채고 비구니가 되면서까지 그를 말리려 한다.
(17) 정경부인 박씨
운의 계모. 즉, 운에게 성(姓)을 준 남자의 정실.
여섯 살 때부터 운을 키워준 인물이자 마음으로 낳아준 사람.
다혈질이다. 힘 무척 쎄다. 목소리 무지하게 크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다.
무인 집안에서 무인의 피를 받고 태어나 그런지 여인답지 않은 기골과 배포를
지녔다. 하여 어린 시절부터 동생 박인걸과 함께 온 산을 휘젓고 다니며 사냥을
즐겼고, 검술 실력 또한 뛰어나 웬만한 자객이나 닌자 쯤은 혼자서 가뿐이
처리할 수 있다. 꼬꼬마 시절부터 기질이 남달랐던 이들 남매에 관한 믿지 못할
무용담이 수백 전해진다. 지금도 방 안 벽에는 어린 시절 전리품인 소뿔, 호랑이
가죽 따위가 심드렁하게 걸려있어 남매의 비범하고 늠름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런 그녀에게도 심장에 새겨진 깊은 슬픔이 있다.
무능한 남편을 집안의 힘으로, 내조의 힘으로 오위도총관까지 끌어올려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은혜를 버리고 장안 제일의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거느린 여자만도 수십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을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이었다.
운에게서 결코 ‘어머니’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운이 내뱉는 ‘마님’이라는
말이, 남편의 계집질보다 오히려 그녀에겐 더 큰 상처고 아픔이다.
역모를 진압한 공으로 훤에게 허통(서얼의 신분에서 벗어나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윤허 받은 운이 처음으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자
강인한 그녀의 눈에 17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진다.
드라마 후반, 윤대형의 역모를 진압하는데 숨은 공헌을 한다.
(18) 박인걸
정경부인 박씨의 동생. 前 운검대장. 현재는 대도호부사(정3품으로 지방 무관).
뼛속까지 무인이다. 우스갯소리 잘하고, 술 잘 마시고, 용감무쌍하고,
무인들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 부하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무인 가문 출신답게 누나와 만나면 용쟁호투를 방불케하는 액션을 선보인다.
‘누님 성정이 그 모양이니 매형이 도망을 간거 아니욧!’ 먼저 비위를 긁어놓는
쪽이 그이고, ‘그게 지금 누나한테 할 소리냐?!’ 불끈해서 먼저 챙! 검을 뽑아드는
쪽이 박씨다(장난이 아니라 이 남매, 정말 사소한 일로 마당에서 격검을 펼치기도
한다). 남매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담소도 밖에서 들으면
‘곧 사람 하나 시체 돼서 나오겠구나’ 싶은 싸움 소리로 들린다.
그런 누나의 부탁으로 운에게 검을 가르치고, 홍문관 대제학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게 한다. 내키지 않는 부탁이었지만 운의 총명함과 운검으로서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혈육 이상의 정을 느끼게 된다.
늘 반응 없이 무뚝뚝하기만 한 운이 내심 섭섭하여 ‘하나도 안 귀여운 놈’,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놈’등을 입에 달고 살지만, 운에게 처음으로 숙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골이 장대한 그도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만다.
드라마 후반, 훤의 밀서에 의해 어명을 받고 사병을 움직여 윤대형의 역모를
진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19) 홍규태
의금부 도사.
좀 튄다. 행동도 말투도 외모도 하여튼 여러 면에서 튄다.
성격 독특하다. 눈치가 없는 건지 자애심이 지나친 것인지 남의 시선을 별로,
아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이단아다.
의금부 내의 비리를 발고하는 상소를 올려 의금부 내에서 왕따를 당한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한마디로 독고다이(獨固多異)다.
그의 당돌함과 패기, 상소문에 적힌 논리 정연함이 훤의 눈에 든다.
‘임금의 지우(知遇:임금이 재능과 인격이 우수한 사람을 특별대우하는 제도)를
구하려는 사특한 상소이니 엄중히 벌하라’는 대신들(그들 중 대다수가 상소에
언급된 비리의 인물들이다)의 청을 무시하고 훤은 그에게 밀지를 내린다.
‘前상선내관의 자결을 조사하는 척 하면서,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가 죽은
허씨 처녀의 죽음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하여 매일 보고하라’는 것.
변복을 하고, 칡뿌리를 개껌처럼 씹고 다니며 탐문수사를 벌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조선의 셜록홈즈, 동양판 필립말로우 같다.
(20) 혜각도사
소격서의 도사.
우연한 기회에 대왕대비 윤씨와 도무녀 장씨가 결탁하는 장면을 목격하여
본의 아니게 ‘세자빈 시해사건’에 연루된다.
처음엔 도무녀 장씨를 오해하나 이내 그녀의 계획을 눈치 채고 목숨을 건
공범자(?)가 되어준다. 그 후 궐을 떠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있다. 장씨 도무녀와 함께 비밀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로,
중요한 시기에 등장하여 연우가 중전의 자리를 되찾는 데에 일조한다.
(21) 오혜성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천문 관측이나 측후, 역서(달력)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 분야의 일인자.
그의 집안은 삼대째 관상감에서 천문 관련 일을 해왔다.
이름도 혜성(慧星), 지혜로운 별... 하늘을 사랑하고, 별을 사랑하는 남자.
밤하늘의 별똥별을 보면서도 눈물 흘리는 풍부한 감수성을 지녔다.
하늘을 상대하는 일을 하기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꿈꾼다.
(22) 문지방
관상감의 지리학 교수.
풍수학을 토대로 왕궁, 왕릉 등의 명당 터를 잡는 일을 하는 지리학 분야의 일인자.
능청스럽고, 수완이 좋다. 관상감에서 편찬한 역서를 따로 챙겨뒀다가
‘오늘의 운세’ 따위를 곁들여 몰래 민간에 돈을 받고 팔기도 한다.
왕이 남색가라는 본인의 추측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여 매번 보람도 없이 왕과 중전의 합궁일을 택일해 바치는 명과학 교수를
안쓰러워한다.
(23) 나대길
관상감의 명과학 교수.
왕실의 합궁일이나 길일 택일, 길흉화복의 점복을 담당하는 명과학 분야의 일인자.
왕족의 사주를 관장하는 일을 하므로 허가 없이는 궐 밖 사람들과의 접촉이
제한되고, 세자빈 간택이나 역모, 반정 등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어
행동 제약이 많다. 하여 꽤 스트레스를 받는 인물이다. 신중하고, 과묵한 성격.
왕의 건강을 위해 액받이 무녀를 들이자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다.
(24) 상선내관
대전 상선 내관. 세자 시절부터 훤을 보필해오던 인물.
세자시강원 시절 훤의 연애를 도와준 일등공신.
젊은 날, 사도목(四都目: 승정원에 의해 1년에 4차례 받는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 끙끙거리던 그에게, 열세 살 어린 세자 훤이
시험과목인 <중용>을 집중 과외 시켜준 적이 있다. 덕분에 시험에서‘통(通)’을
받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이 족쇄가 되어 개구쟁이 세자의 장난에 참
많이도 불려 다니고, 참 많이도 뒷수습해줬다.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의 알프레도와 토토처럼 그렇게 우정을 쌓아간 두 사람.
훤의 첫사랑과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로,
연우의 죽음 이후 냉랭하게 변모한 훤의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25) 민상궁
북촌 염의 사가에서 민화 공주를 모시는 상궁.
매사 철없고, 고집불통인 공주 자가를 모시느라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은 인물.
밤마다 어여삐 치장하는(떡줄 사람(염)은 생각도 않는데!) 민화 공주 덕에
화장술과 미용술이 일취월장하여 그 실력이 가히 조선 최고라 할 만 하다.
(26) 조상궁
보경(중전 윤씨)이 세자빈으로 입궐할 때 친정에서 데리고 온 본방내인.
입이 무겁고 머리 회전이 빨라 보경의 수족이 되어 움직인다.
보경이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인물.
(27) 잔실
무노비(巫奴婢). 도무녀 장씨의 신딸.
약간의 신력이 있으나 워낙 겁이 많아 오히려 자신의 신기에 휘둘리는 스타일.
그 심약함 때문에 오히려 귀신에 빙의되거나 미쳐버릴 수 있다고 판단, 도무녀
장씨가 자신의 신딸로 삼았다.
평소엔 어리바리하지만 문득 그녀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면, 긴장하라.
혹시 당신의 어깨 위에 앉은 귀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4-2. 줄거리
<시대적 배경>
문무를 겸비한 군주 성조대왕은 선왕 대부터 지속되어 온 외척세력의
권세를 제한하고, 그들을 조정에서 배제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이 총애하던 이복동생 의성군이 역모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정국은 급반전을 맞게 된다.
외척세력의 거두인 윤대형이 모반의 기밀을 사전에 적발하여 발고한 뒤,
신속히 난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에 책록되자(이는 모두 윤대형의
조작이었다!), 그를 위시한 외척세력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도정권을
형성한 것이다. 게다가 윤대형의 뒤에는 일문(一門)의 수장인 대비 윤씨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어 명분 없이 함부로 그를 건드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왕에게 충의 교리는 없어도 효의 교리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조대왕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짐을 보이는 정국을 타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하여 윤대형에 맞설 만한 인물로 일찍이 학문과 인품을 눈여겨보았던
허영재를 홍문관 대제학으로 등용하고,
세자인 훤이 강력한 군주가 되어 마음껏 바른 정치를 펼 수 있도록,
훤의 사람이 될 만한 인재들을 요소요소에 은밀히 포열해 놓는다.
그 시작은 바로 홍문관 대제학의 아들이자 연우의 오라버니인 염을
세자시강원의 문학에 제수하는 것이었다.
제 1 막 첫사랑
왕세자 vs 어린 스승
열다섯 살 왕세자 훤은 요즘 심기가 편치 않다.
이번에 새로이 세자시강원에 임명받아 오는 허염이라는 자 때문이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문학에 제수된 간세지재.
자신 보다 고작 두 살 많은 사람을 스승으로 모셔야 하다니.....
훤은 자존심이 상한다. 머리 좋기로는 자신도 조선 팔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판인데, 이 허염이라는 자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하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훤 자신이었다.
최초의 발단은 얼마 전 절반의 실패로 끝난 궐밖 외유였다.
조강, 주강, 석강, 소대, 야대.....밤낮 없이 매일 반복되는 공부와
답답한 궁궐 생활... 마음을 터놓을 벗 하나 없는 외로움...
사실, 세자의 일상이란 궐에 갇혀 왕이 될 때까지 공부만 하는
무미건조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에게 궐 밖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겠느냐는 동궁 별감의
꼬드김은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답답한 궐에서 잠시 벗어나 자유를
맛보고 싶었다.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간 자주 볼 수 없었던
양명군을 만나 회포를 풀고 싶었다.
결국 별감의 유혹에 넘어가(실은 덥썩 받아들여) 밤에 몰래 궁을 빠져나간 뒤
양명군을 불러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외유의 기쁨에 들뜬 나머지,
미처 뒷일을 예상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다시 궐로 끌려들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세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명만 부왕에게 혼이 난 것이다.
안 그래도 양명을 지독히도 냉대해 왔던 부왕이었다.
부왕의 계속되는 냉대로 그 선한 웃음을 잃어버린 양명이었다.
훤은 아무 잘못 없이 부왕의 질책을 받고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서던
양명의 얼굴이 한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훤 자신도 당분간 행궁이나 능행에 동행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안 그래도 지루하던 궁궐의 일상이 더더욱 무료해졌다.
이후 훤은 삐딱해졌다.
세자시강원의 스승들을 골탕 먹이는 악동짓에 박차를 가했다.
예전의 장난이 대머리 스승의 관모를 낚시줄로 낚아서 벗겨버린다든지,
비현각 입구에 함정을 설치해 넘어뜨리는 등 일차원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한층 더 지능적인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강독할 때 일부러 틀리게 읽어놓고 스승이 그냥 넘어가면 개망신을 준다거나,
스승의 언행의 불일치와 모순을 지적하여 신료로서 자격 없음을 비아냥거리
고, 수업 시간엔 내내 불량한 학습태도를 보이다가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
하면 왕 앞에선 더 없이 성실하고 똑똑한 모습을 보여 스승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늘 따분하고 뻔한 소리만 해대며 틀에 박힌 지식을 주입시키던
스승들이 부왕 앞에서 쩔쩔매며 당황하는 모습은 잠시나마 훤에게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일에 중압감을 느낀 보덕(정3품)이 낙향을
하고 만다. 세자시강원의 관리들은 차기 왕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임무의 막중함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거기에 훤의 장난으로
인해 그 정신적인 병이 가중된 것이었다.
그렇게 비워진 보덕 자리는 아래에 있던 필선(정4품)과 문학(정5품)이 차례로
승직을 하고, 비어 있는 문학의 자리에 바로 그 허염이란 자가 제수된 것이다.
훤은 단 며칠 만에 염을 쫓아내고야 말리라는 의욕을 불태운다.
그러나....염의 얼굴을 본 순간 훤은 넋이 나가고 만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너무나도 아름다운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염을 내쫓아야 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자칫 잊을
뻔 했지만 훤은 이내 삐딱함을 되찾고는 홀로 성과 없는 기싸움을 펼친다.
염은 훤의 삐딱한 태도에 전혀 굴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천자문부터
가르치겠다 말한다.
세상에.....! <중용>과 <자치통감>을 배우는 자신에게 이미 4살에 다 뗀
천자문을 배우라니...!
훤은 자존심에 다시 한 번 큰 타격을 받는다.
이제껏 세자인 자신을 이토록 무시하는 자는 없었다.
이제껏 자신을 이토록 당황시킨 자는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어이없이 말문이 막혀버렸던 상대는 더더욱 없었다.
한번 읽으면 다 외워버리는 훤의 영특함은 스스로를 오만이란 함정에
빠뜨렸고, 그로 인해 그간의 천편일률적인 수업들은 지겹고 따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염은 달랐다. 그의 학식은 깊이와 방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그럼에도 겸허한 그의 성정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던 훤마저도
감화시켰다.
많은 책을 함께 읽으며 군왕의 도와 세상의 이치를 배워나가는 사이,
훤의 삐딱하던 자세가 바로 세워졌다. 서서히 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루하기만 하던 수업 시간이 기다려졌고, 석강이 짧게만 느껴졌다.
훤은 어느덧 염을 자신의 스승이자 벗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저녁을 함께 하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훤이었지만,
염은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칼같이 일어섰다.
서운한 마음에 이유를 묻자 염은 얼굴 한 가득 기분 좋은
표정을 담고서 ‘누이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워서’라고 대답한다.
“보통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하는데, 그 아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가지 의문을 제기 합니다. 그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기 위해 저는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습니다.
제 누이는 제게 가장 소중한 스승입니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넘치는 지식욕으로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이 인정한 스승인 염과 동등하게 배움을 나눈다는 소녀의 이야기는
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떼쟁이에다 하늘천 따지 밖에 모르는 내 여동생 민화와는 천지 차이구나...!”
훤이 감탄했을 때, 느닷없이 생각시 복장(!)으로 비현각에 난입해
‘나는 떼쟁이가 아니라 정숙한 여인이다!’ 울부짖던 민화공주의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왕세자의 첫사랑
훤이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소녀의 이름은 허연우.
지금 옆구리에 서책을 끼고 노비 설과 함께 들판을 달리고 있는 저 소녀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밖으로 뛰어나와 관찰하고 확인해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 그래서 오늘도 역시 들판을 달리고 있는 아이.
책에서 본 야생초나 곤충, 특이한 흙을 발견하면 당장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펼쳐들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확인해보는 아이.
탐구와 관찰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치마끈을 바싹 묶고 나무를 타는 아이.
새둥지를 공격하는 뱀을 발견하면 자못 정의로운 표정으로 새총을 쏘아
명중시키는 아이. 기절한 뱀이 또 신기하여 한 손으로 말아 쥐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요리조리 관찰해보는 아이.
하여 늘, 언제나, 항상! 연우를 모시는 노비 설의 심장을 공포감으로
쫄깃거리게 만드는 아이.
“아가씨, 서두르세요. 대감마님이 퇴궐하실 시각입니다.”
아버지의 퇴궐시간이 가까워 오면 연우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옷매무새를 바로하고는 수틀 앞에 앉았다.
사대부가 여인답지 않은 연우의 성정을 걱정하는 아버지 허영재를
안심시키기 위한 연우의 귀엽고 깜찍한 위장이었다.
그러나 허영재는 속지 않았다. 연우의 머리에 붙어있는 나뭇잎 한 장이
오늘 하루 연우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수틀 밑에는 분명 서책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허영재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연우는 얼마 전부터 아버지의 명으로 금서(禁書)를 당한 처지였다.
여자인 몸으로 너무 많은 책을 읽기 때문이었다.
금서를 당한 후에도 연우는 매일 동호(독서당,서재)에 숨어들어 책을 몰래
훔쳐내 읽곤 했다. 매일 종아리를 맞아도 다음날이면 또 책을 훔쳐 읽으니
허영재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지만,
오늘도 역시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 훌쩍이는 연우를 위로해주는 것은 언제나 염의 몫이었다.
늘 다양한 방법으로 연우를 위로해주던 염이 오늘은 불쑥 죽통 하나를
내밀었다. 죽통 안에는 검은엿이 들어있었다. 세자 저하가 누이와 함께
먹으라며 보내준 것이라 했다.
‘세자’라는 말에 연우는 어쩐지 두려움을 느꼈지만,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검은엿의 달콤함이 마치 세자 저하의 위로처럼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음 날 염은 서책을 들고 왔다. 아버지에게 혼이 난 연우를 위해 세자
저하가 직접 춘방책고(세자의 전용 도서관)에서 직접 빌린 서책이라 했다.
‘직접 빌린 서책’이란 말에 연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음 날, 세상시름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염이 내민 것은 봉서였다.
덧붙이는 말 하나 없이 딱 한 편의 시만 적혀있는 서찰이었지만
세자의 마음이 전해져 연우의 심장은 전날보다 조금 더 두근거렸다.
황진이의 시 한편을 적은 서찰과 죽통 화분을 답례로 보내며
연우는 세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잠이 오지 않았다.
답서를 기다리는 연우의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더 뛰었다.
그 심장의 박동이 ‘설렘’이라는 사실을 연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연우의 답서를 받은 훤의 심장 역시 뛰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사춘기 소년다운 호기심이었다.
누이 생각에 간식을 먹지 못하는 염을 위해 간식을 따로 보내주었고,
누이가 아버지의 동호(서재)에서 몰래 책을 가져다 읽었다가 회초리를
맞았다는 말에 서책을 빌려 보내주었다.
그리고 돌아올 반응이 궁금해 이번에는 시를 한 수 적어 보냈다.
염은 서찰을 가져가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지만, 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연우의 답서를 받았다.
정갈하고 어여쁜 연우의 서체....
보슬비 혹은 안개비라는 뜻의 어여쁜 이름....
그리고 그녀가 보내준 화분....
연우의 서찰을 읽어내려가는 훤의 심장은 흥분으로 고동쳤다.
죽통화분에 정성껏 물을 주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화분에서 자라난 것은 놀랍게도 꽃이 아니라 상추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 연유를 묻는 서찰을 썼다.
이번에도 서찰을 가져가지 않겠다는 염을 상선내관과 세자익위사들까지
나서 설득해야 했고,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야 겨우 연우의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상추를 키우며 기다리신 그 기다림에 몇 갑절을 더하면 조선의 백성인
농부들의 마음이 되옵니다. 잎이 몇 개가 났사옵니까?’
이후 두 사람의 질문과 대답이 서찰을 통해 이어졌다.
훤이 궐 밖 세상과 민초들의 생활에 대한 궁금함을 봉서로 보내면,
그에 대한 답신이 왔다. 세상만물에 대한 호기심, 여종 아이와 함께 산과 들,
저자거리를 누비며 보고 느낀 점들, 활인서의 빈민들을 보며 가슴 아팠던
사연 등등.....
언제부터인가 훤은 서찰 끝에 ‘이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그러나 단 하나 자신의 이름인 ‘훤’을...
연우와의 서신교환이 계속되면서 훤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문장이며 학식이 염 못지않은 연우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훤은 밤새
책을 들여다보며 공부했다. 부왕의 아침 문안과 시선(세자가 왕의 수라를
살피는 것)도 꼬박꼬박 챙겼고, 민화공주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일도 그만
두었다. 그리고.....언제인가부터 연우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상추처럼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마음이 간절한 열망으로 바뀌었을 때,
때마침 황금빛 햇살이 가득한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현각에 앉아 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고 있던 훤은 갑자기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주위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훤은 팔을 벌려 보슬비를 품에 안아보았다.
훤의 품안에 뛰어든 보슬비는 열다섯 소년 훤의 얼굴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조선의 왕세자 훤, 그에게 찾아온 첫사랑이었다.
공주의 예동(禮童)
연우를 좋아하는 마음, 보고픈 마음이 커질수록 훤은 연우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누이는 혹여 그대를 닮았는가? 그렇다면 굉장히 예쁠 것 같은데...”
말없이 미소만 짓는 염의 얼굴에서 연우의 모습을 상상하던 훤은
때마침 또다시 비현각에 숨어 들어온 민화공주를 옆에 붙들어 앉히고는
다시 물어본다.
“그럼 혹 얘보다 어여쁘냐?”
헉! 염은 당황한다.
“솔직히 답하여도 내 그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답해 보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꿀꺽 삼키며 염의 대답을 기다리는 민화 공주!
똑같은 표정으로 눈빛을 초롱초롱 밝히고 염을 바라보는 훤!
이 난감한 남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염은 마침내 구국의 결단을
내리듯 애매한 멘트를 날린다.
“어....어찌 공주마마의 미려하심에 비하리이까?”
(실망하는 훤!)
(꺄~속으로 환호작약하는 민화공주!)
훤은 ‘얼굴이 뭐....그리....중요....하겠....는가....?’ 스스로를 위안한다.
염과 닮았을 것이란 기대감에 연우에게 마음이 간 것은 사실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의 누이라면 더 아름다울 것이란 기대감...
하지만 실망에만 그쳤을 뿐 연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접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연우에 대해 얼굴만 빼고 다른 것은 너무나도 많이 알고 난
뒤였다. 서찰을 통해 알아온 연우에게 온통 마음이 빼앗긴 훤이었기에,
연우의 얼굴이 설사 박색이라 하여도 싫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염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민화는 걸음걸이도 당당하게
궐안을 걷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웃음이 만발했다.
사실, 민화는 얼마 전부터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 상대는....물론 염이었다.
늘 자신을 못살게 굴던 훤 오라버니의 장난이 뚝 끊겼던 무렵이었다.
(이때 훤은 연우를 의식하여 막 멋있어지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평소 치를 떨며 싫어했었지만 막상 장난을 걸어오지 않으니 왠지 심심해졌다.
하여 괜히 훤이 수업 중인 비현각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서책을 들고 월대 아래로 내려서는 아름다운 청년이 보였다.
순간 넋을 잃고 그 청년을 바라보는 민화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앞으로 민화의 전부이자 유일한 것이 될, 허염이라는 세상이...
그냥 보기만 해도 좋았다. 괜히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려 했지만, 왠지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염을 보기 위해 생각시 옷을 훔쳐 입고 몰래 비현각에 잠입했다가
자신을 떼쟁이라 모욕하는 오라버니의 말에 울며불며 난동을 부렸던
그날 이후... 민화는 부끄러워 다시는 염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염이 자신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염에게서 어여쁘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민화공주는 그 길로 부왕을 찾아간다.
홍문관 대제학 허영재와 한성부 판윤 윤대형이 입시해 있었지만,
민화공주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공주의 청이라면 달나라의 토끼라도
잡아다 줄 부왕이었다.
“아바마마, 저도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세자 저하의 스승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부왕은 법도에 어긋난다며 엄하게 불허했다.
민화는 이제껏 자신을 애지중지하며 무슨 말이든 들어주던 아버지가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자, 대단히 실망해 삐졌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며 돌아갔다. 그런 딸을 보며 난처해하는 왕에게 윤대형이
“공주님을 위하여 예동을 들이심이 어떠하시온지....”
넌지시 제안하며 자신의 딸 보경을 추천한다.
(물론 보경을 세자빈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다)
왕은 속으로 비소를 날린다. 윤대형의 검은 속내를 왕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세자 훤이 가례를 치를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외척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들여 그들의 세를 이 이상 늘려주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계속 미뤄오던
왕이었다. 왕은 짐짓 좋은 생각이라는 듯 윤대형의 말을 받았다.
“배동은 왕자군을 위해서만 들이는 법, 전례에 없지만 민화공주의 예법을
위해서 학문과 예법이 뛰어난 사대부가의 여식을 예동으로 들이는 것도
나쁠 것 없겠지.....”
윤대형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허면, 대제학의 여식도 함께 예동으로 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순간 윤대형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안 그래도 사사건건 자신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허영재가 눈엣가시였던
윤대형이었다. 자식일로 또 다시 얽히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이번 예동 건이 과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골치가 아파지는 그였다.
한편, 부왕에게 청을 거절당한 민화는 민상궁이 전하는 말을 듣고
짜증이 만발한 상태였다.
“뭐라 하였느냐? 예동이라 하였느냐? 나는 스승이 필요하다 하였지 예동이
필요하다 말한 적이 없다. 나는 허문학에게 배울 것이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단 말이다!”
“대제학의 따님이시라면 틀림없이 공주님의 좋은 예동이 되어드릴
것이옵니다. 허문학의 누이기도 하니 의심의 여지가 있겠사옵니까?”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민화는 순간 눈이 동그래지고
얼굴빛이 환해진다.
“허문학의 누이.....? 그렇지! 대제학의 여식이면 곧 허문학의 누이가 되겠구나!
그렇다면 그 아이는....세상에!!!! 곧 나의 시누이뻘이 아니냐!!!”
철없는 민화공주 덕에 민상궁은 뒷목 잡고 쓰러질 지경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화는 연우에게 정말정말 잘해주어야겠다 결심하며
선물로 줄 노리개며, 궁낭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동이 되어 만나는 민화,연우,보경....
얽히고설킨 비극적 운명의 시작이었다.
잘못된 첫만남
공주의 예동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연우는
공주와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는 기대감보다, 혹시라도 궐 안에서 마주치게
될 지 모를 훤의 모습이 더 기대되었다.
마침내 시작된 예동 수업.
예동들의 교육을 담당한 중전 한씨는 연우의 똘똘함이 마음에 들었다.
민화 역시 결심한 바대로 연우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보경은 왠지 모를 초조함과 불안을 느꼈다.
혼자 후원 뜰에 걸터앉아 화풀이하듯 연못에 돌을 던져 넣고 있을 때였다.
내관 한 명이 다가와 누군가 보경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였다.
내관을 따라 간 그곳에....왕세자 훤이 서있었다....!!!
보경을 향해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이는 훤.
어색한 듯, 반가운 듯, 수줍은 그 미소에 보경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시강원의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곧 세자익위사가 세자 저하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는 내관의 재촉에 훤은 불쑥 봉서 한통을 보경
앞에 내밀었다.
“여유가 없어 서른세 번째 봉서로 첫인사를 대신한다. 나의 마음이다.”
씨익 웃어보이며 돌아서는 훤.
보경은 떨리는 심정으로 봉서를 열어본다.
그 어떤 말보다 ‘그동안 만나고 싶었다’는 말과
‘섣달그믐 나례 의식 때 만나자’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경은 가슴 벅찬 설렘을 느꼈다. 그러나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
서찰 속에 적힌 ‘연우 낭자’라는 글자를 발견한 순간,
보경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훤은 자신을 연우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훤과 연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서찰을 교환하며 같은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던 것이었다. 충격이었다. 상처였다.
중전과 공주, 거기에 왕세자 훤까지.
모두가 연우만을 바라보고, 모두가 연우만을 원했다.
보경은 연우를 향한 터질듯 한 분노와 질투를 느꼈다.
사실 보경은 오래 전부터 훤을 마음에 품어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궁궐 구경을 왔던 보경은(윤대형은 딸 보경을
세자빈으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포석으로 딸을 궐로 데려와 훤과의
만남을 조장했다) 우연히 만난 왕세자 훤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예동이 되어 기뻤던 이유도, 중전과 공주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유도 모두 훤 때문이었다. 궐 밖에서 살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훤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보고 싶어서....세자빈이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된
보경이었다. 예동으로 입궐한 이 기회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초석이
되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보경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연우라는 복병이 나타난 것이었다.
‘연우만 없다면......저 아이만 없다면.....’
그때부터 보경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전략이 때로는 권모와 술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경은 자신의 행동 노선을 수정했다. 연우에게 경쟁심을 느껴 보다 똘똘해
보이려 애쓰던 예전과는 달리 더없이 얌전하고 순종적인 모습으로 바꾸었다.
적당히 미숙한 척 현숙함을 강조하며 외척 출신으로서의 정치색을 싹 지웠다.
중전 한씨도 애초의 기우와는 달리 순진해 보이는 보경에게 차츰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그 후 보경은 치밀한 계획과 계략으로 끊임없이 연우를 곤경에 빠뜨리지만
그때마다 연우는 특유의 엉뚱함과 지혜로움으로 그 위기를 벗어나곤 한다.
꽃잎처럼, 불꽃처럼
한편, 뒤늦게 상선내관이 실수로 보경을 연우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훤은 분통을 터뜨린다. 연우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렇게 어이없이 날려버리다니...새삼 화가 날 때마다 훤은 찌릿
상선내관을 노려봤고, 그때마다 상선내관은 찔끔 오금이 저려왔다.
(이 일로 상선내관이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는 뒤에 가면 알 수 있다)
주인을 잘못 찾아간 봉서 또한 걱정이었다.
봉서를 전해주었는지 물어 볼 수도,
봉서를 전해 받았는지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똑 같은 내용의 봉서를 또 다시 보내는
것도 왠지 뻘쭘했다. 안타까운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마침내 섣달그믐.
궁궐은 나례, 처용놀이, 잡희의 공연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온 종친, 관료, 외국 사신들로 북적거렸다.
세자인 훤 역시 왕과 함께 참석해 있었고, 한켠엔 종친인 양명군과
시강원의 스승인 염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막역지우인 운도 어딘가에 와있을 터였다.
(*섣달그믐의 하이라이트는 대궐 후원에서 시행하는 불꽃놀이였는데,
불꽃놀이의 준비는 병조와 군기시의 전문가들이 했다.
이 날 운은 숙부인 운검대장 박인걸과 함께 궐에 들어와 저녁에 있을
불꽃놀이 준비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공주의 예동인 연우와 보경도 특별히 구경을 허락받아 민화와 동석해 있었다.
연우가 태어나 처음 보는 진기한 볼거리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였다.
누군가 연우의 팔을 낚아챘다. 놀라 돌아본 얼굴은 무시무시한 처용가면!
비명을 지르려는 연우를 향해 가면의 사람은 한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댔다. 무언가에 홀린 듯 비명을 꿀꺽 삼킨 연우의
손을 움켜쥐고 처용 가면은 어딘가로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궁궐 후원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 속을 달리는 두 사람.
마침내 후미진 공간에 도착한 처용가면이 연우의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그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훤이었다....!
달빛.....쏟아지는 불꽃....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이자, 너에게 서찰을 보낸 이훤이다”
가면을 벗은 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숨이 멎은 듯 훤을 바라보는 연우의 머리 위로,
캄캄하던 전각 주위에 초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하늘에서는 때 아닌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실상은 꽃이 아니라 한지를 잘게 잘라 만든 종이꽃으로,
훤과 연우의 첫 만남을 더욱 낭만적으로 장식해주기 위해
상선내관이 지붕 위에 올라가 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소품(처용가면), 조명(초롱불), 무대 효과(종이꽃비)까지 전담하며
훤의 연애 도우미 노릇을 톡톡히 하는 상선내관의 수고는 눈물겹다.)
아련한 초롱불빛과....
마치 눈 같기도 하고, 매화꽃 같기도 한 꽃비가 내리는 속에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꽃처럼 어여쁘고, 불꽃처럼 강렬한,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어긋난 연심(戀心)
하지만 그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 날, 그 시각, 그 장소....두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하나는 갑자기 없어진 연우를 찾아 나선 보경의 질투어린 시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훤보다 먼저 연우를 마음에 품었던 양명의 서글픈 시선이었다.
어린 시절 양명은 외로운 아이였다
부왕은 그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따뜻한 시선 한 자락 준 적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시선과 호통뿐이었다.
부왕이 자신을 동생인 훤의 정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양명은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했다. 아버지의 정 역시 체념했다.
그 상처를 치유 받은 것은 열 살 되던 해 홍문관 대제학의 사가를
드나들고부터였다. 엄하지만 자상한 대제학을 통해 아버지의 정을 배웠고,
염과 운을 만나 함께 학문과 검술을 수련하며 벗들의 정을 배웠다.
아름다운 벗 염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양명의 호기심과 관심이 쏠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염은 절대로 연우를 보여주지 않았다. 행여 실수로도 만나지는
법이 없었다. 하여 양명이 선택한 방법이 월장이었다.
첫 번째 월장은 실패였다. 운에게 망을 봐줄 것을 부탁한 것이 실수였다.
운의 성격상 ‘월장을 할테니 망을 좀 봐달라’하면 거절할 것 같아 그냥
담장 아래 서있기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빌어먹을, 정말 서있기만 했다.
결국 운을 수상히 여긴 노비 설이 염에게 고하는 바람에 양명은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 그러나 연우를 보겠다는 양명의 무한도전은 포기를 몰랐다.
서너 차례의 시도 끝에 양명은 드디어 연우를 보았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연우의 맑은 눈동자를.....
야무지게 강상의 도리를 설교하던 연우의 똘똘한 모습을.....
그렇게 그녀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왔던 그 순간을....
양명은 평생토록 잊지 못했다.
그 후로도 양명은 염의 삼엄한 경계와 감시망을 피해 월장을 했다.
늘어나는 월장의 회수만큼 양명의 마음도 깊어졌다.
마침내 양명은 부왕을 찾아가 연우와 혼인시켜줄 것을 청하기에 이른다.
그로서는 대단히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부왕은 선뜻 세자의 가례가 끝나면 생각해보겠다고
허락하였다. 부왕의 선심에 양명은 감격했다. 그간의 설움을 다 잊고
세자의 국혼이 치러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그 기다림의 끝은 너무도 처참했다.
훤과 연우가 서로를 연모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한들, 이제 와서 연우를 포기할 수 없는 그였다.
이제 양명은 부왕의 약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 처참히 깨져버렸다.
세자빈 간택을 위한 금혼령이 내려지자 ‘생각해 보마고 했지, 성사시켜주겠다
한 적은 없다’며 부왕은 태도를 달리 하였다.
양명은 홀로 피눈물을 쏟아냈다.
양명의 서러움 속에 세자빈 간택이 시작되었다.
세자빈 간택
가례도감이 설치되고,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훤은 한껏 들떠있었다. 전국에서 올린 처녀 단자 속에는 연우의 것도
분명 있을 터였다. 영리한 연우는 무사히 삼간택을 통과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두 사람은 이제부터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염은 달랐다. 어두운 표정으로 석강에 나타난 염은 훤에게
연우의 처녀 단자를 제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염에게 서운함을 느낀 훤은 화를 내며 염의 청을 물리친다.
그러나 상선내관을 통해 알게 된 세자빈 간택의 흑막은
훤의 생각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긴 하지만 결국은 이미 정치적으로 약속된 내정자가
간택되는 것이 전례였고, 최종 간택에서 탈락된 두 명의 여인 또한 세자의
여인이라 하여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숙명에 놓이는 것이었다.
연우의 처녀단자를 제하여 달라던 염의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이번 내정자는 할마마마의 먼 친척 중 한 명일 것이었다.
훤의 어머니가 외척의 일파가 아니니 이번 훤의 세자빈 자리만큼은
내어주지 않으려 기를 쓸 것이었다.
훤은 외척의 세도를 용납지 않는 부왕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간택은 대비전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할마마마가 강경하게 나온다면 아무리 부왕이라 해도 효의 도리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었다.
훤은 성균관 동장의(후에 의금부 도사 홍규태)를 비밀리에 동궁으로
불러 들인다.
“세자빈 간택이 한 일족의 세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쓰여도 되는 것인가?”
마치 화두와도 같고, 어쩌면 시제(試製)와도 같은 훤의 도발적인 질문에
동장의는 잠깐 당황하지만, 이내 그 질문에 담긴 의중을 파악한다.
다음 날 부터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상소는 권당(捲堂, 학생데모)으로, 권당은 다시 호곡권당(號哭捲堂, 궐밖에서
곡소리를 내며 시위하던 데모)로 그 수위가 점차 높아졌다.
이는 곧 삼사를 움직여 대간들이 왕을 압박하기에 이르렀고,
경연에서는 세자빈 간택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이 훤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러나 훤은 겉으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평소대로 생활하며 외척들의 눈을 피했다.
초간택 날이 다가올 즈음, 훤은 염을 불러 봉서를 건넨다.
그 속에는 금으로 만든 봉잠(봉황 비녀. 왕비나 세자빈에 간택된 여인에게
하사하는 패물 중 하나)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해를 품은 달이다!”
“무슨 말씀이온지....”
“왕은 해라 하고, 왕비는 곧 달이라 한다. 나의 마음의 정비는 연우낭자로
이미 삼아 버렸으니 그에 대한 나의 정표로 이 봉잠을 보내는 것이다.
연우낭자가 나를 가슴에 품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자빈 간택에 최선을
다해 나에게로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마침내 연우가 삼간택 최종 후보 세 명 안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삼간택 당일, 장소가 교태전에서 강녕전으로 바뀌고, 왕과 종친, 삼사 관원,
대신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정한 절차로 삼간택이 치러진다.
보경의 술수에 넘어가 연우를 곱지 않게 보던 중전 한씨로 인해 연우는
한때 난관에 봉착하지만, 특유의 현명함과 지혜로움으로 중전 한씨의
오해마저 불식시키며 마침내 세자빈으로 간택된다.
간택에서 탈락한 보경은 대례복을 입은 연우에게 큰 절을 올리며
절망감에 무너져 내린다.
세자빈 시해사건
연우에게 세자빈 자리를 내준 윤대형은 분노한다.
그 상대가 허영재의 여식이기에 그 분노는 더욱 컸다.
일문의 영예와 영달을 위해 외척세력을 키워나가며 세도를 부리는
윤대형을 늘 못마땅해 하던 허영재였다. 이제 세자빈이 된 여식을 등에
업은 그가, 또 그 입바른 소리로 자신을 내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기 정국을 구상하며 요소요소에 훤의 사람을
심어놓고 있다는 것을 윤대형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허영재와 허염 그리고 앞으로 훤의 정비가 될 연우라는
사실 까지도. 이대로 연우가 세자빈이 되게 놔둔다면 앞으로 윤대형을
위시한 외척세력들은 설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었다.
허니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는 윤대형이었다.
윤대형은 외척세력의 수장인 대비 윤씨를 비밀리에 만난다.
그리고....두 사람은 용서받지 못할 간악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대비 윤씨는 성수청의 국무 장씨를 부른다.
장씨는 대비의 부름을 받는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너의 주술로 허연우란 아이를 죽여라!’
도무녀 장씨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왕과 백성을 잇고, 백성과 하늘을 잇고, 하늘과 왕을 잇는 것이
성수청의 본분이라 믿어왔고, 왕실과 백성의 구복을 기원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는 장씨였다.
‘주상이 물 샐 틈 없이 호위를 하고 있기에 독살도, 암살도 할 수 없으니
접근하지 않고 행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너의 능력뿐이다.’
세자빈 역시 이미 왕실의 사람....
구복을 기원해야 할 사람에게 살(殺)을 날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수청이 아무리 왕실을 위해 일한다 하여도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혁파요구에 지금은 존폐위기가 아닌가? 그런 성수청을 내가 더 이상
비호해주지 않는다면 어찌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하지만.....아무리 강력한 흑주술이라 하여도 사람 목숨을 그리 쉽게
빼앗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때 말하였던 조건을 말함이냐? 주술에 필요한 흉물(저주에 사용되는 물건)
중 불가능하다 했던 그 마지막 조건이 준비되어 있다면?’
순간 장씨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깨닫는다.
대비 윤씨의 명을 거절한다면 자신의 목숨은 이미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흑주술이 아니라면 다른 방법으로
라도, 반드시 세자빈을 해칠 대비였던 것이다.
그때 연우는 별궁인 은월각에 머물고 있었다.
세자빈으로서 익혀야 할 예절교육과 가례연습에 지칠 때쯤이면,
궁인들을 요리조리 따돌린 훤이 몰래 은월각을 찾아오곤 했다.
(물론 이때도 상선내관의 눈물겨운 노력이 동반된다)
때로는 별궁 상궁에게 들켜 걱정을 듣기도 하지만, 이 귀여운 커플에게
무장해제 된 나인들의 도움으로 훤과 연우는 은월각에서 추억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그러나 행복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느 날 연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버린다.
어의조차도 병명을 알아낼 수 없었다.
궐 안에 병자를 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병이 있는 여인이
국본(國本)의 배필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연우는 사가로 돌려보내진다.
며칠 동안 앓았는지 알지 못할 시간이 지나갔다. 의식을 잃었다가 잠시
깨어나기를 되풀이하며 연우의 생명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은밀히 허영재를 찾아왔다. 도무녀 장씨였다.
장씨는 연우의 병이 신병이라 말한다.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이대로
고통을 받을 것이며, 신내림을 받는다면 무녀로 살아야 한다 말한다.
허영재는 눈앞이 아득해져옴을 느낀다. 연우를 저대로 고통 속에 놓아둘 수도,
신내림을 받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연우가 신내림을 받는다면
왕실을 능멸한 죄가 되어 연우의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까지 모두 사약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장씨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신병이 있는
여인을 처녀단자에 올리고 세자빈으로 간택하게 만든 죄의 대가는
멸문지화뿐이었다. 허영재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문을 위해, 왕을 위해, 세자를 위해, 조선의 종묘사직을 위해,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연우를 위해.....
그날은....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늘 탕약을 달이던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연우의 탕약을 달이고 있었다.
며칠 전, 아버지와 장씨가 나누던 대화를 엿들은 연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 달이고 있는 것은 약이 아니라 썩어
떨어진 아버지의 심장덩어리와 눈물이라는 것도 연우는 알고 있었다.
영원히 훤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생각이 연우에게 붓을 들게 하였다.
힘겹게 쓴 서찰을 서안 서랍에 넣었다. 어쩌면 오라버니가 찾아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훤이 건네준 정표인 봉잠을
저고리 안의 가슴에 숨겨 넣었다.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가 건네는 약을 먹으며 연우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아버지의 통곡소리와 절규를 들은 것도 같았다.
부활
연우가 눈을 뜬 곳은 사방이 막힌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그곳이 어딘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속이었다. 순간 숨이 막혀왔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연우를 덮쳤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관 뚜껑이 열리고 달빛이 들어왔다.
한 남자(혜각도사)와 한 여자(도무녀 장씨) 그리고 한 소녀(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연우를 품에 안았다.
달빛과....바람과....맑은 공기에 안도하며 연우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연우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장씨의 집이었다.
‘누구십니까.....?’
장씨는 침묵한다. 차마 내가 너를 죽인 사람이라고, 네 아버지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너는....누구니?’
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연우를 보며 충격을 받는다.
너무 충격이 커서 일거라고, 아직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일거라고,
그렇게 설은 불안함을 잠재운다.
‘저는....누구입니까....?’
기억을 잃은 연우를 바라보며 설은 한순간 멍해진다.
한동안 충격과도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장씨는 연우에게 거짓을 말한다.
너는 신내림을 받다가 혼절한 거라고....워낙 큰 신을 몸주로 모셨기에
전사(前事)를 모두 잃은 거라고....너는 부모 없는 고아였다고...하여 신분도
알 수 없다고...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네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기(神氣)가
읽혀 내가 직접 내림굿을 해준 거라고....
장씨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한다.
이왕지사 잃어버린 기억, 차라리 이렇게 아픈 기억은 모두 잊고 편안히
살아갔으면 싶었다. 그렇게라도 잔인했던 과거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나마 자신이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대비의 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장씨였지만,
홍문관 대제학의 집에서 연우를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이 날린 살(殺)에 시름시름 죽어가면서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맑았던 연우.
장씨는 연우만이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상임을 알아보았다.
연우만이 훤의 사주에 허락된 유일한 배필임을 알아보았다.
해와 달이 한 하늘에 있을 순 없어도 천지만물의 순리를 위해 어느 한쪽을
해할 수는 없는 법.... 흔들리던 장씨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신기(神氣)를 죽음 뒤엔 사라지게 하는 약제’라 속여
홍문관 대제학에게 건넨 약은 사실 맥과 심장박동이 멈춰 잠시 죽은 듯
보이게 하는 약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연우가 죽었다 생각했을 때, 우연히
공범자가 된 혜각도사와 설의 도움으로 연우를 살려내었다.
장씨 역시 성수청 국무의 자리를 버리고 궐을 떠났다.
연우가 살아있음을 안다면 또다시 연우를 죽이려들 저들이었다. 이렇게라도
연우가 또 한 번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고 싶은 장씨였다.
그 후 연우는 도무녀 장씨의 신딸로, 무노비가 된 설과 함께 성장한다.
자신 대신 보경이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제 손으로 여식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고목처럼 말라가던 허영재가 결국은
눈을 감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연우를 끔찍이도 아꼈던 염이 공주의 남편이
되어 날개가 꺾인 지도 모른 채....왕위에 등극한 훤이 여전히 자신을 그리워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전사를 잃어버린 덕에 오히려 밝고, 씩씩했던 예전의 성정으로 살아가는
연우를 보며 장씨는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 2 막 액받이 무녀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흐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훤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5세에 보경과 원치 않는 국혼을 올렸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승하로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물론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외척들에 의해, 대왕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이
3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영리한 훤의 계략으로 인해 대왕대비는 쫓겨나듯
철정을 선언하고, 훤은 19세에 드디어 친정을 실시한다.
스물세 살 젊은 국왕이 된 지금, 외척세력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권과
왕권강화를 내세운 훤의 기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이어지는 모반, 옥사, 사화, 정배...
왕권과 신권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정치적 소모전이 이어졌다.
훤의 심신은 고단해진다.
외로운 태양
왕의 건강은 종묘사직의 중대 사안이었다.
때로는 역모의 빌미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신권강화의 명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여 훤은 자신의 심신이 지쳐있음을 절대 들키지 않는다.
덕분에 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훤의 건강은 악화일로였다.
그러나 궐 안에 훤이 기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빈이 된 염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금고(禁錮) 상태였다.
덕분에 그를 중심으로 결집되던 사림파들 마저 재야로 숨어들었다.
양명군 역시 역풍의 위험으로부터 몸을 사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조정의 중심을 잡아주던 홍문관 대제학마저 몇 년 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중전.....
훤은 보경에게 부부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 훤이 가끔씩 부인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조정을 통째로 먹으려 드는 자신의 장인, 윤대형을 볼 때뿐이었다.
왕실 어른들의 사랑과 아랫사람들의 흠앙을 받는 그녀이지만, 훤은 본능적으
로 그녀의 위선과 가식이 느껴졌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의 야망과 본색을
드러냈다면 적어도 그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진 중전을 외면하는 훤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훤은 보경을 품지 않는다. 아니, 품지 못한다.
첫사랑 연우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죽음이 남긴 아픈 상처가....
다른 이에게 마음이 가는 걸 허락치 않았다.
하여 고립무원인 궁궐 안에서 훤이 유일하게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운검인 김제운(이하 ‘운’으로 표기)뿐이었다.
어의(御醫)와 명과학 교수의 끊임없는 권유에 의해 마침내 온양행궁으로
온천욕을 떠날 때에도 훤은 운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다.
운검으로서의 뛰어난 자질도 있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염과 양명군의
지친(至親)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세자시절의 장난기가 발동한 것도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늦은 밤. 온천욕을 마친 훤은 만류하는 운을 꼬드겨 잠행에 나선다.
세자시절 별감의 꼬드김에 넘어가 궐 탈출을 시도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도전해보는 세상구경이었다.
슬픈 재회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칠 때부터, 아니면 뒤이어 폭우가 쏟아질
때부터라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했어야 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두 사람은 길을 잃는다.
왠지 아까부터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듯도 싶었다.
사위가 안개에 잠겨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농무로 인해 시야가 흐려진 훤의 눈에 저 멀리 낮게 떠있는 보름달이 보였다.
“이 빗속에 달이라니... 이것이 현실이냐, 환영이냐?”
달이 둥실 움직이더니 훤을 향해 다가왔다.
달빛 뒤로 어렴풋이 허름한 민가의 대문이 보였다.
문 앞에 솟대가 서있는 걸로 보아 무녀의 집이 분명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달... 그런데 훤의 앞에 멈춰선 달은 달이 아니라 보름달
모양의 초롱을 든 여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초롱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을 보던 훤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버렸다.
그녀는.....연우였다!!!
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녀의 집으로 들어선 훤은
술상을 내온 무녀에게 진정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고 묻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녀는 모른다고 대답한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훤은 다시 한 번 묻는다.
뵌 적도 없는 분이라고 무녀는 대답한다. 아니, 도리어 눈을 반짝이며
‘혹시! 저를 아십니까? 천지간에 피붙이 하나 없는 제가 누구인지 선비님은
아십니까? 제 부모가 누구인지 선비님은 혹시 아십니까?’ 물어온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훤보다
오히려 더 간절하고 절박해보였다.
훤은 절망한다. 이 여인은 연우가 아니었다.
연우는 고아가 아니었다. 연우가 무녀가 되어 있을 리 없었다.
연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는 8년 전에 이미 죽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빗속에서 무녀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훤은 그것이 8년 동안 자신을 기다려 온 연우의 목소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가 기다린 사람은 훤이 아니라 그녀의 신모(神母)와
무노비 잔실이었다. 이 따뜻한 술상 역시 자신을 위해 준비해둔 것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줄곧 무녀에게 향해있던 훤의 시선이
마침내 창밖으로 돌려졌다. 마침 창밖으로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창밖에 시선을 둔 채 훤은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으로 물었다. 연우....보슬비라는 뜻을 지닌 연우라는 이름을 모르느냐고....
참으로 어여쁜 이름이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무녀는 대답한다.
그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름 따위는 없다고, 신모님은 그저 자신을 ‘애기씨’라고 부른다고,
큰 신을 모신 ‘애동’이라는 의미로 어린 시절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대답한다.
잠시 비를 피하게 해준 답례라며, 몸을 녹여준 따뜻한 술상에 대한 답례라며
훤은 연우를 닮은 이 무녀에게 ‘월(月)’이란 이름을 지어주고는 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은 왕이 가여워졌다. 8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연우를 잊지 못했던 왕이었다.
무녀에게서 연우의 모습을 찾던 그 간절하고도 절박했던 왕의 눈빛이 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한편으론 안심했다. 얼음만 서걱거리던 운의
심장에 처음으로 피를 돌게 한 여인이 천한 무녀여서 다행이라고, 왕의 여자
가 아니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불충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운은 낯설었다.
무녀의 집을 나서는 훤과 운을 설이 배웅해주었다.
설과 운의 찰나의 스침. 운은 설에게서 검(劍)의 기운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운이 설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은 좀 더 후의 일이었다.
(* 어린 시절 연우의 별당을 월장하던 양명과는 달리 운은 연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신분도 달랐고, 기본적으로 이성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연우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양명의
망을 봐주던 운을 한량으로 오해한 설과는 한 번 스친 적이 있었다.)
훤이 떠난 후, 홀로 남은 술잔 위에 비친 달을 보며 월은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냐고 슬픈 표정으로 묻던 훤의 눈빛에,
나도 내가 당신이 찾는 그 연우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무녀임에도 신기가 없음을 늘 이상하게 여겨왔던 월이었지만,
알 수 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가슴이 아파오는 지금,
어쩌면 자신에게도 신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분명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느낀 것이었기에....
불길한 예감
저녁에 오겠다던 도무녀 장씨는 다음날 아침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폭우에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 훤이 다녀갔다는 말을 설로부터 전해들은 장씨는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설은 운이 차고 있던 운검을 보았기에 그가 호위하고 있는 훤이
왕임을 간파했다)
8년 전, 연우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성수청 국무 자리를 버리고 궐을 떠나
관상감에서 지정해준 휴지역을 관리하며 살아온 장씨였다.
가끔씩 혜각도사로부터 전해 듣는 궐 소식이 과거와 연결된 끈의 전부였다.
4년 전, 친정(親政)을 시작한 훤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
던 것이 실수였다.
“애기씨만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시겠소?”
“미력한 신력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그리 해야지요.
헌데 저만이 살릴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
온양의 휴지역에 결계를 치고 연우를 정박령으로 두었던 것은
연우의 사주만이 훤의 액을 눌러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어제 그 결계가 깨어졌다. 그 결계를 깨고 훤이 나타난 것이다.
천기(天氣)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가....?
신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가.....?
장씨는 머지않은 날에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장씨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온양행궁 이후 훤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 휴지역의 결계가 깨졌기 때문이었다)
내의원과 관상감에는 비상이 걸렸다. 어의가 올리는 어떠한 처방도
관상감이 내놓는 어떠한 대책도 훤의 건강을 좋게 만들지는 못했다.
관상감의 교수들은 8년전 성수청을 떠난 장씨만이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장씨를 찾아온다. 세 교수는 장씨에게 다시 성수청의
국무로 돌아와 줄 것을 요청하지만, 장씨는 궁을 떠나 있는 동안 신력도 이미
다 되었고, 잡귀가 붙어 돌아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실망하여 돌아서던 명과학 교수의 눈에 월의 모습이 들어온다.
본능적으로 월의 관상을 살피던 명과학 교수는 전율한다.
왕의 사주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왕후의 상이었다...!
‘장씨의 신딸이니 그 신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고, 주상 전하와도
기막히게 합이 맞으니 장씨가 안 된다면 대신 저 아이라도 데려가리라...’
명과학 교수는 장씨에게 월을 왕의 액받이 무녀로 달라 청한다.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장씨는 ‘이 아이는 아직 그럴 만한 신력이 되지 않는다’
는 말로 거절하고는 월과 함께 황급히 방 안으로 사라져버린다.
“왜 그러시었소. 낯선 사람이 오면 반드시 숨어 있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하지 않았소.”
“창밖으로 보니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살쾡이에게 물리고 있기에
도와주려다가 그만.....”
“..........”
어린 시절, ‘나는 왜 숨어 살아야만 하느냐?’ 울먹이며 묻는 연우에게
‘아직 신기를 능숙히 다루지 못하니, 애기씨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해가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변명하며 연우를 꽁꽁 숨겨 키워왔던 장씨였다.
이렇게 어이없이 들켜버린 것도 신의 뜻일까?
일련의 사건들에 불안함을 느낀 장씨는 그날로 짐을 싸 도성 근처로
거처를 옮겨버린다.
달을 찾는 구름
한편, 훤은 온양행궁 이후 내내 월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론 월은 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었다. 모두가 말했고, 염도 확인시켜
주지 않았던가...죽어서 무덤에 묻힌 연우가 살아 돌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훤은 어쩐지 월을 다시 한 번 만나봐야 될 것만 같았다.
만나서 묻고, 또 묻고, 다시 한 번 확인해봐야 될 것만 같았다.
결국 훤은 운에게 은밀히 월을 데려오라 명한다.
왕명에 의해 온양에 도착한 운이 월의 거처를 찾았을 때, 그 곳은 이미 빈집
이었다. 월의 세간도, 방 안 가득 차있던 책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빈집을 떠도는 은은한 난향만이 그날의 만남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근 마을의 백성들 중에 그녀가 옮겨간 거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방의 관령들에 속해져 있는 무적(巫籍, 무당의 호적)을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월과 같은 여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운은 빈집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려보았다. 기다리면서 귀신으로라도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를 위한 마음인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난향과 달빛으로 인해 마음 한 구석이 아프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자신의 마음은 더욱더 알 수 없었다.
사흘을 기다렸지만 월은 나타나지 않았다.
온양을 떠나 한양에 도착한 운은 곧바로 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는 왕을 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궐로 향하던 운의 발길이 양명의 군저로 돌려졌다.
슬프지만 밝은 빛, 양명
비밀의 방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변장 도구들을 손질하고 있던 양명은
운이 방문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운! 자네 왔는가!’ 버선발로 반갑게 달려
나와 번개처럼 두 팔을 벌려 운을 안으려했다.
하지만 운이 누구인가. 조선 최고의 검술실력을 지닌 운검이 아닌가.
놀라운 순발력으로,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 유지한 채, 빛의 속도로 몸을
피하여, 늘 양명을 뻘쭘하게 하는 운이었다.
“야박하기는... 자네를 이품에 한번 안아보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건만....
풍천위는 알면서도 늘 당해주는 척 안겨주는데 말이지...”
풍천위란, 7년 전 민화공주와 혼례를 올려 의빈이 된 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염의 부친인 홍문관 대제학을 중심으로 뭉쳐 죽마고우가 된
운, 양명, 염.... 이 세 사람은 서자로서, 종친으로서, 의빈으로서 날개가
꺾인 서로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왕의 최측근(운)
과 종친(양명), 의빈(염)이 어울리는 것은 자칫 정치적 야합으로 비쳐질 위험
이 컸기에, 그들의 만남은 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 진행되곤
했다.
“그나마 풍천위를 안는 것도 요즘은 여의치가 않다네. 민화공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태워죽일 듯 쏘아보니 말일세. 어디 풍천위가 공주 혼자만의
사람인가? 의빈으로 주저앉힌 걸로도 모자라 오라비인 나한테마저 눈을
부라리다니... 저번에는 내 일부러 밤새 풍천위의 방에서 묵고 간 적도
있네...”
늘어지는 양명의 수다에도 여전히 무표정한 운.
기운이 빠져 한숨을 푸욱 내쉬는 양명.
“이보게....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웃어야 되는 것 아닌가?”
여전히 무표정한 운.
“에휴......자네가 괜히 빙운이 아니구만.”
그때 문밖에서 ‘공조 참의 영감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양명은 얼른 갓을 목 뒤로 넘겨쓰더니 하인에게는 ‘피방 갔다 하여라!’
이르고는 잽싸게 후원의 담 위로 올라섰다.
“ 기대하시게, 제운. 다음번에는 내 자네를 꼭 웃게 하고 말 터이니!”
담장 밖으로 휘리릭 사라지는 양명을 보며 운은 그제서야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운의 미소는 이내 서글픈 미소로 바뀌었다.
역풍을 피하기 위한 양명의 슬픈 몸부림이, 비참한 위장술이,
운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양명은 왕위 계승 서열 1순위라는 그 허울 좋은 명분 덕에 늘 권력에
뒷줄을 대려는 도포자락들의 방문을 받는 처지였다. 왕에게 후사가 없는 지금,
특히나 지금처럼 훤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그 수와 빈도가 더 늘어났다.
양명이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일부러 파락호 행세
를 하거나 살짝 맛이 간 행동으로 뭇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약발이 다 하였다. 하여 요즘 그가 열을 올리는 위장술은
바로 무당집으로 피방을 가는 것이었다.
오늘도 귀찮게 따라붙는 날 파리 떼를 피해 집을 나선 양명은 저자거리의
국밥집에서 우연히 귀신들린 백정아들놈의 ‘쇠붙이 공포증’을 용하게
치유해주었다는 아기무당의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럼 오늘은 그 아기무당이나 찾아가볼까?’
그렇게 즉흥적으로 양명은 아기무당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 아기무당은 바로 연우, 아니 무녀 월이었다.
얼마 전 장씨를 따라 도성 근처로 거처를 옮긴 월은 정박령으로 지냈던
지난 4년간의 생활과는 달리, 세상 구경도 마음껏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생활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월은 장씨의 출타 중에 찾아온 몇몇 손님들을 본의 아니게
치유해 주기도 한다. 신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말투, 행동, 상대방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아픔을 읽어내고 충고를 해준 것뿐인데도 꽤나
용하다는 소문이 퍼져, 요즘은 간간이 월을 찾는 손님까지 생겨났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씨는 월을 엄하게 꾸짖는다.
장씨의 꾸중에 월은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친부모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월에게 있어 장씨는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씨는 월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신딸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설이나 잔실과는 스스럼없이 지내는 장씨였지만
월을 대할 때만큼은 태도를 달리하였다. 그것이 늘 서운했던 월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화를 내며 야단을 치는 장씨의 모습을 보니 정말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월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무뚝뚝함 속에서도 언제나 연우를 걱정하는 장씨의 따뜻한 마음은
훗날 기억을 되찾은 연우가 장씨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충격과 배신감으로 통곡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월은 웃으며 알았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장씨는 앞으로 낯선 사람이 오면 절대 나서지도, 얼굴을 보이지도 말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한다. 혹시라도 연우의 정체를 아는 자로 인해 위험에 빠질까
두려워한 장씨의 처사였다.
그럴 즈음에 양명이 아기무당을 찾아 월의 거처를 방문한 것이다.
어쩌면 월의 과거가 밝혀질 수도 있었던 절대 절명의 순간...!
월은 장씨의 당부를 떠올리고 천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채 양명을 맞는다.
피방을 온 손님이니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함이라 둘러대면 될 터였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마주하게 되는 월(연우)과 양명.
월은 ‘아직 손님을 받을 만한 신력이 아니니 돌아가셨다가 신모님이
돌아오시면 그때 다시 오라’고 말하지만 양명은 냉큼 신당으로 올라가
‘내가 병을 하나 앓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병이며, 어떻게 하면 치유가
가능한지 말해보라’며 무당에게 기싸움(?)을 건다.
혹시라도 무당이 혹세무민하는 말로 사짜기질을 보이면, 바로 논리적으로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 바닥을 영원히 뜨게 만드는 것이 양명의
별난 취미였다. (뭐, 굳이 정의의 사도를 흉내 내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그냥 별 의미는 없는 취미다, 취미!)
월은 평소대로 몇 마디 충고를 건넨다.
영리한 양명은 무녀 월이 사실은 신기도 무엇도 아닌 직관력과 통찰력,
그리고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그러나 상대방의 마음을 치유해주려는 그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 느껴졌다.
하여 사짜인지 어쩐지 판단이 안서는 양명, 일단 질러놓고 본다.
“실로 영리한 여인이기는 하나 신력이 없는 자가 무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국법으로 엄히 다스려야할 일, 내 당장 너를 토포해가라 포도청에 고해야
겠다!”
그때였다. 월의 머릿속에 양명의 어린 시절 모습이 파편처럼 떠오른 것은!
그것이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의 파편이라는 것을 모르는 월은 당황한다.
이것은......신기(神氣)인가?
“보아하니 지체가 높으신 분 같은데, 어찌 야심한 시각에 서인의 복장을
하고 월장을 하셨는지요? 연모해서는 안 될 분을 마음에 품었으니
마음에 병이 생긴 게지요....”
순간 양명의 표정이 굳는다. 8년 전 삼간택을 앞둔 연우를 찾아간 기억
때문이었다. 당시 양명은 서인의 옷차림으로 월장을 했고, 연우에게 함께
도망갈 것을 청했었다. 그러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자신의 마음에도 하나의 태양만이 있다 말하던 연우의 거절에 양명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늘 아래 그날 일을 아는 자는
양명과 연우,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해선 아니 되나, 해야만 했던 건지도 모르지. 그랬다면..그리 보내지 않았을
지도....네가 이제 보니 아주 신통한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넘겨짚는 재주가
일품이구나. 내 예전에 이미 출가한 아녀자를 사모하여 보쌈을 하려던 때가
있었지. 이미 기억도 가물가물한 일인데, 그건 또 어떤 추리법으로 알아
맞힌 것이냐?”
아픔을 애써 감추며 껄껄껄 소리내어 웃는 양명을 보며 월은 말한다.
“다른 이들을 속이기 위해 자신마저 속이지는 마십시오.
그것이 곧 나으리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입니다.”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진 양명은 무녀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잠깐의 망설임 후에 ‘월’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월...비록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총명하고, 유쾌하고, 유난히 그리움을
자극하는 맑은 눈동자를 지닌 무녀.....월에 대한 기억은 이후로도
두고두고 양명의 뇌리에 남아 다시금 그녀를 찾게 만든다.
그날 밤, 월은 장씨에게 오늘 피방 온 손님의 과거가 보였다고 말한다.
이제 자신에게도 작으나마 신력이 생겼으니 신모님처럼 힘없고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해 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월...
그런 월을 보며 장씨는 죄책감과 안쓰러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날, 월은 마당에 나가 달을 보며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가 지어준 ‘월’이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기분이 묘해지는 월....그리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향한 아릿한 그리움을 느끼는 월....
액받이무녀
그러던 어느 날, 관상감의 세교수가 다시 월의 거처를 찾아온다.
‘네가 살려야 할 사람이 있으니 우리와 함께 가주어야겠다’는
명과학 교수의 말에 월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다.
(* 교수들은 장씨의 승낙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일부러 장씨가 출타하기를 기다렸다가 월을 찾아온 것이다)
월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지리학 교수가 나섰다.
‘이미 네 신모인 장씨의 허락은 받아두었으며, 그 동안 네가 해왔던 휴 지역
에서의 정박령과 비슷한 임무이고, 이는 성수청 무적에 이름을 올린 무녀
로서 응당 해야 할 일’ 이라며 못을 박는 지리학 교수.
결국 월은 세 사람을 따라 나선다.
어디로 가는지, 누구의 목숨을 살리러 가는지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세 교수가 준비해놓은 가마에 태워지는 월.....
인간부적이 되어, 액받이 무녀가 되어, 누군가의 액을 대신 받아주러
가는 길... 월은 어쩐지 그 길이 낯이 익었다. 게다가 또 다시 비 오던
날의 그날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아파왔다.
마침내 가마가 도착한 곳은 구중궁궐!
월이 지켜줘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나라의 지존!
그렇게 월은 훤이 있는 그곳, 자신의 과거와 비밀이 묻혀 있는 그곳,
자신의 전생을 마감하게 한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또한 그곳에서 어떠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관상감 교수의 안내를 받아 왕의 침전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들어선
월은 잠들어 있는 왕의 얼굴을 보고 기겁한다.
비 오던 날, 비를 피해 내 집에 잠시 머물렀던 사람!
나에게 연우가 아니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냐고 슬픈 표정으로
물었던 사람!
밤새 잠들어 있는 훤의 머리맡을 지키며 월은 또 다시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또 다시 가슴이 아파져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연우를 바라보는 운의 마음도 쓰려왔다.
그는 운검으로, 그녀는 액받이 무녀로, 그렇게 같은 공간에서
왕을 지켜주는 밤.....
함께 있음에도 잠든 왕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운은 창에 비친 달그림자로 시선을 던졌다.
새벽이 밝아오기 전 월은 훤의 침소를 떠났다.
잠든 후에 왔다가 깨기 전에 떠나는 달.....
그렇게 만났으나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
다음 날 훤은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밤사이 누가 내 옆을 다녀갔느냐?”
“관상감의 명과학 교수가 잠시 부적을 쓰러 다녀갔사옵니다.”
“대체 무슨 부적을 쓴 것이냐? 훨씬 낫구나.”
간만에 혈색이 도는 용안(龍顔)을 살핀 주위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
오랜만에 건강을 회복한 훤은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편전에 나가
만기친람(왕이 수많은 정치 일을 몸소 살핌)을 시작하였다.
훤이 건강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은 윤대형에게는 결코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수시로 나빠지는 훤의 건강 덕분에, 무시로 쏟아지는 공문서와 상소문, 탄원서
등을 자기 입맛에 맞게 처리할 수 있었던 윤대형이었다. 이는 곧 조정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여 건강을 회복한 훤이
지난 한 달간의 승정원일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또 그리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그간 건강을 핑계로 보경을 품지 않았던 왕이었다. 이번 기회에 관상감을
독촉하여 합궁일과 입태시를 받아낸다면 왕 역시 중전과의 합방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었다. 보경이 한 시라도 빨리 원자를 생산해야 외척세력의 입지
또한 굳건해질 것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윤대형이었다.
훤이 건강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관상감에서 내린 비책덕분이란 소식을
전해들은 윤대형은 겸사겸사 관상감의 명과학 교수를 찾아온다.
처음에는 대답을 거부하던 명과학 교수였지만 극품(정1품)의 영의정이자,
훤의 국구(國舅)인 윤대형의 압박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액받이무녀의 존재를 알게 된 윤대형이 관심을 갖고 (그 무녀가 설마
연우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좀 더 캐물으려는 찰나,
하얗게 질린 명과학 교수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교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명과학 교수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몸소 관상감에 친림한 훤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속으로 비소를 날린다.
외척세력의 수장 윤대형!
왕의 사주를 관장하는 명과학 교수!
두 사람의 조합은 훤의 눈에 ‘정치적 야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저들의 대화 속에 등장했던 액받이무녀......
그 또한 저 두 인물이 만들어낸 정치적 야합의 부산물임이 분명할 터.....
위험한 거래
그날 밤도 월은 달그림자처럼 조용히 훤의 방에 들어섰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화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훤을 바라보는 월....
왕권의 고단함을 보여주듯 언제나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훤이 안쓰러워
지는 월.... 그 미간을 펴주고 싶어 저도 모르게 왕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는 월.... 왕의 침소를 지키던 궁인들이 놀라 월을 저지하려는 순간,
월의 팔을 거칠게 낚아채어 확 끌어당기는 훤!
가까이서 마주치는 훤과 월의 얼굴!
겁에 질린 월을 향해 싸늘한 미소를 짓는 훤.
“분명 눈과 귀가 달린 부적이구나. 누구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자냐?
월을 윤대형 일파가 보낸 간자라 의심하고 있는 훤...
그때였다. 창밖으로 구름 뒤에 숨어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달빛에 월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월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훤은 충격을 받는다.
‘그 빗속에서의 만남조차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었던가? 죽은 연우와 너무나도 닮은 여인.....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윤대형 그 자는 도대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훤은 잠시나마 그녀를 연우로 착각하고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어찌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냐?! 널 보낸 자가 누구냐?! 대체 언제부터,
누구의 명으로,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한 것이더냐?!!!”
훤의 호통에 부리나케 입시한 관상감 교수들이 월은 단순한 인간부적에
지나지 않는다, 설명해 올리지만 훤의 의심과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불같은 성노(聖怒)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궁인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은 바로 월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녀, 미욱하나마 전하의 용체를 지킬 임무를 받자온
액받이무녀이옵니다. 하여 저의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이대로 나갈 수
없사옵니다. 애초에 한 달을 기약하고 왔사오니, 아직 보름이 남았사옵니다.
이 천한 것의 신력이 전하께 도움이 될지 어떨지 일단 보름만 더
지켜보시옵소서.”
공손하지만 당돌한 월의 말에 모두가 경악하였다.
훤은 월을 차갑게 노려보며 비소를 날렸다.
“좋다. 네 말대로 보름의 말미를 주겠다. 단, 너는 너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보름 뒤에도 너에 대한 나의 판단에 변함이 없다면,
너의 목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순간 침소 안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꺼이..... 내어 놓겠습니다.”
국무 복귀 (國巫 復歸)
한편, 뒤늦게 관상감 교수들의 만행을 알게 된 장씨는 한걸음에 그들을
찾아가 ‘어서 내 신딸을 돌려달라!’며 호통을 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미 액받이무녀로서 임무를 시작했고, 덕분에 주상 전하의 환후가 많이
좋아졌으니 한 달 동안만 조용히 지켜보라’는 말뿐이었다.
장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벌써 왕을 만난 것인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궁궐 안에 갇혀버린 월....
이미 왕을 만난 월이 저들을 만나지 못하리란 법도 없었다.
물론 궁궐의 도린곁(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에 숨겨져,
밤에만 비밀리에 거동하는 인간부적이기에 상시로 사람들과 마주칠 가능성은
적었지만, 결정적으로 월은 자신이 연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조심과 경계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시라도....만에 하나....그들과 마주치게 된다면....’
피가 내리고 살이 내리는 장고 끝에 장씨는 마침내 입궐을 결심한다.
다시 성수청의 국무가 되어 월, 아니 연우를 보호해주기 위하여.
설, 잔실과 함께 입궐한 장씨는 그 날로 대왕대비전을 찾아간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대결로 돌파하리라.....!)
예상대로 장씨를 본 대왕대비 윤씨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장씨만한 신력을 지닌 국무는 조선 천지 어디에도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윤씨이기에, 짐짓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왕실의 구복을 위해
힘써줄 것을 장씨에게 당부한다.
그렇게...과거일은 모두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윤씨였다.
구름, 달의 정체를 알게 되다
바로 그 시각, 왕 앞에 목숨을 내놓은 월이 걱정되어 그녀의 처소를 찾은
운은 그곳에서 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운을 낯선 침입자로 오인한 설의 공격
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격검을 펼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운은 설이 자신의 검술과 동류임을 간파한다.
하지만 스승의 제자 중에 분명 여인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무노비 신분의
여인이 자신과 동류의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인가?
“어디서 검술을 익혔느냐?”
“이런 젠장! 날 시험했군. 어쩐지 철옹성 같은 틈이 쉽게도 보인다 했더니만.
혼자 익혔수다. 운검 나으리의 검술과 비슷한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입니다.”
툴툴대며 사라지는 설.
순간, 운은 처음 설을 만났을 때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어린 시절 염의 사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어린 계집종...!!!
염의 사가에서 세 남자(운,염,양명)가 함께 하던 검술 수련 과정을 몰래
훔쳐보던 연우의 어린 몸종.....!!!
그 여종이 더 이상 그들을 훔쳐보지 않게 된 시점은 염의 누이가 죽은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 그즈음 그녀가 다른 곳으로 팔려갔다는 말을
염에게서 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어쩐지 낯이 익었던 월의 그 얼굴.... 허 염과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분위기, 심지어 말투까지 닮아있는 월의 그 모습...
비록 연우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염을 통해 가끔씩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그녀의 학식이었다.
월 역시 처음 만났을 때, 방안에 있었던 서책들과 입에서 흘러나왔던
말들이 상당한 학식임을 드러내 놓고 있었기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었다.
게다가.... 연우와 월은 같은 나이였다. 연우가 죽은 지 일 년 뒤에 월은
무적에 올랐다. 단 일 년의 시간만이 비어있었다. 도리어 연우에서 월로
가기엔 그 일 년의 시간이란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운은 그길로 염을 찾아간다.
노비 설의 존재에 대해, 연우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는 운.
염과의 대화에서 운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다.
죽은 연우의 염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죽은 연우의 몸이 굳지 않고 따뜻했었다는 사실....
운의 머릿속은 충격과 혼란으로 멍해진다.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월은.....그가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무녀
월은.....8년 전에 죽은 세자빈, 허연우였다...!!
갑작스러운 운의 방문으로 다시금 연우를 떠올리게 된 염은 오랫동안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연우의 방을 찾아든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연우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
이미 숨을 거둔 연우를 품에 안은 아버지가 피눈물을 쏟아내던 곳....
살아생전 연우가 사용하던 물건이 그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멈춘 채
8년 동안 봉인되어 왔던 그곳.....
연우가 사용하던 책이며 서안 등을 쓰다듬으며 또다시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켜내던 염은 문득 서랍 안에서 연우의 서찰을
발견한다. 그것은 죽음을 예감했던 연우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세자에게
쓴 마지막 서찰이었다!
연우의 방을 나와 사랑채로 향하던 염은 저만치 사랑채를 향해 달려가는
민화 공주를 발견했다.
“공주 자가! 부디 체통을, 체통......”
민화의 뒤를 따르던 민상궁이 염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끼이익---
멈춰 섰다. 그 뒤를 이어 민화의 온혜(왕족이 신는 비단신)를 들고 따르던
여종도 끼이익---멈춰섰다. 마침내 염을 발견한 민화도 끼이이익---멈춰섰
지만 차마 염 가까이 오진 못하고 부끄러움에 몸을 돌려 섰다.
그제서야 염은 오늘 밤 민화 공주의 방에 들러 함께 책을 읽기로 한 약속을
떠올렸다. 아마도 기다리다 지친 민화 공주가 민상궁의 만류를 뿌리치고 염의
사랑채를 향해 전력 질주해 온 모양이었다.
염은 민화 공주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공주는 버선발 차림이었다.
염은 여종에게 손을 내밀어 공주의 온혜를 받아들고는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온혜를 신겨주었다. 기분이 좋아 씨익 미소 짓던 민화의 눈에 염이
잠시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서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서찰은 혹시....소첩에게 보내는 연서이옵니까?!!!!”
우울한 미소로 염은 아니라고.....8년 전 죽은 우리 연우가 세자저하께
마지막으로 쓴 서찰인 듯 싶다고....조만간 주인을 찾아 돌려줄 생각이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어쩐 일인지 민화공주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버렸지만,
어두운 밤이었으므로 아무도 민화공주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민화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나도 좀 읽어볼 수 없겠냐고....주상 전하가
읽기 전에 내가 먼저 읽어 볼 순 없겠느냐고.....염에게 부탁하지만,
염은 서찰의 주인은 주상전하이시니 그럴 수는 없다며 미소 짓는다.
(민화의 표정이 어쩐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지만 이 역시 밤의 어둠에
가려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었다 - 민화는 반전의 인물!)
세헤라자데
8년 동안 ‘죽음’이란 단어에 묻혀있던 연우의 존재가 이렇듯 서서히 살아있는
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무녀 월은 목숨을 담보로 한 밤을 이어
가고 있었다.
보름이라는 유예기간 동안 월은 자신이 간자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고,
액받이무녀로서의 임무를 결과로서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무녀가 아닌 월이 신기로서 왕의 건강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떠한 의술적 행위도, 어떠한 주술적 행위도 할 수 없는 그녀였지만,
왕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치유해주기 위해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 노력하는 월이었다.
마치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는 정신과 의사처럼.....
“억지로 잠을 청하지 마소서.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과제가 되어버리면 어려워지는 법입니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시고 그냥 지나가게 놔두소서.”
어느 날 부터인가 월은 불면의 밤을 보내는 훤에게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마치 세헤라자데처럼.....
서찰을 통해 흥미진진한 궐 밖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린 연우처럼....
어떤 날은 산가지 놀이나 승람도 놀이를 훤에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특히나 승람도 놀이를 할 때 그녀는 기발한 규칙을 새로 만들어 게임을
더욱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고는 했다. 상대방이 읊는 시조의 뒤를 이어야만
앞으로 한 칸 전진할 수 있다거나, 그 지역의 특산물을 알아맞히어야만
벌칙을 면할 수 있다거나 하는.... 궐 안에만 갇혀있던 훤은 게임을 하면서
월이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마치 나라 곳곳을 유람한 기분이 들었고,
그곳 백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훤은 월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머리를 써가며 게임을 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유치한 승부근성이 생기기도
했고, 마치 세자시절의 훤처럼 웃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천한 무녀 신분인 그녀가 어떻게 이리도 해박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면서,
때로는 감탄하면서 스르르 눈이 감겼고, 그녀의 이야기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웃음을 찾고, 숙면을 취하니 훤의 건강도 더불어 좋아졌다.
훤은 월이 윤대형 쪽에서 보낸 간자라는 의심을 풀었다.
훤의 건강이 좋아졌으니 월 또한 그녀의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그렇게 약속된 유예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밤이 다가올수록....어쩐지 훤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졌다.
마치 연우와의 두 번째 이별을 앞둔 것처럼....
월은 연우와 닮아있었다.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월에게는 연우를 연상케 하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훤은 자신이 품은 연모의 감정이 무녀 월을 향한 것인지, 연우를 향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훤을 바라보며 운은 고통스러웠다.
월이 곧 연우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 가슴이 그토록 아팠던 이유를,
아직도 연우를 잊지 못하는 왕에게 진실을 고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군의 것인데 어찌하여 심장은
따로 노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웠다.
연우의 마지막 서찰
다음날, 염이 입궐하여 왕의 알현을 청하였다.
훤의 스승이자, 매제이자, 연우의 오라비였던 사람.....
의빈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뛰어난 재상이 되어 훤을 보필하고
있었을 사람....스승으로서 훤을 엄하게 꾸짖어가며 힘이 되어주었을 사람.....
염을 볼 때면 마치 세자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한 없이 밝아지는 훤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
지 마음이 아파지는 훤이었다.
염은 훤에게 연우의 마지막 서찰을 전해주었다.
“이미 지난 일이라 그저 묻어두려 하였사옵니다만, 누이가 살아생전 지아비로
여긴 유일한 분이 전하이시옵고,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길에 남긴 유서인지
라... 설령 죄인의 문서라 하여 태워 없앨지언정 전하께옵서 해주신다면 누이
가 저승에서나마 기뻐할 듯하여...”
염이 돌아간 뒤 훤은 떨리는 손으로 연우의 봉서를 펼쳐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연우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던 훤이었다.
월을 통해 연우를 보는 자신의 모습에 혼란스러웠던 훤이었다.
8년 만에 전해진 연우의 서찰은, 마치 이승을 떠난 연우가 훤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세자저하 보시오소서.
마지막 힘을 내어 서신을 남깁니다. 혹여 폐가 될지, 아니면 세자저하께 미처
안 전해질는지 모르겠지만 이리 적어봅니다. 이제 곧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젠 영영 세자저하를 뵈옵지 못할 것이옵니다.
딱 하나 소원이 있다면 세자저하를 뵈옵고자 하는 것뿐이었사온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음이옵니다.
부디 만수무강 하시어 이 소녀의 몫까지 살아주시옵소서. -허연우
아버지가 약을 가져 오시면 영영 세자저하를 뵙지 못할 것이다.....?
그 한 줄의 문장이 훤의 마음에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곧 아버지가 약을 가져오는 약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이 높았던 홍문관 대제학이었다.
그런 자가 자식을 죽일 약을 먹이다니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당시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강한 낭자였다. 그런데 그 건강하던 여인이 갑자기 죽었다. 그럼에도
그 병의 원인조차 모른다고 했다. 간택된 세자빈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덮어버렸다. 하찮은 평민이
죽었어도 그리 소홀하게 사인 조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 품은 의혹은 점점 증폭되었다. 연우의 편지가 마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달라, 훤에게 구원 요청을 하고 있는 듯싶었다.
연우의 죽음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감지한 훤은, 비밀리에 사람을
놓아 (그가 바로 의금부 도사 홍규태이다) 8년 전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관한 진상을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교태전에 날아든 살(殺)
한편, 왕의 건강이 날로 좋아지자 관상감에서는 중전과의 합궁일과
입태시를 정하느라 분주해졌다. 마침내 정해진 합궁일은 공교롭게도
월이 액받이무녀로서 궁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날 밤, 월은 관상감의 지시대로 훤의 이불이 깔린 빈 방을 홀로 지켰다.
왕의 방을 홀로 지켜 왕의 액을 누르며, 무사히 합방이 이뤄지길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달빛만 스며드는 방....월은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다.
교태전으로 향하는 훤의 발걸음도 무거웠다. 머릿속은 더욱 복잡했다.
8년 동안 보경과의 합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은 중전에 대한 애정이
없는 훤의 탓도 있었지만, 하늘이 도운 탓(?)도 있었다.
관상감에서 어렵게 합궁일을 잡아 올리면 그날은 어김없이 왕과 왕비 중에
어느 한쪽이 심하게 아프거나, 아니면 하늘이 날씨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대신들은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리고, 이에 맞서 안 된다며 버티는 외척간의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자칫 후궁에 게서 왕자를 보게 되는 날엔 외척세력의 중심인 윤대형의 위치가 흔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싫어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원자를 보아야 하는 것.
이것은 왕이 된 자의 의무였다.
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보경이 있는 교태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그날의 합방 역시 훤의 급작스러운 흉통으로 무산되고 만다.
어의 진맥 결과 이는 단순한 어환(御患)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명과학 교수가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진상을 알려왔다.
“아뢰옵기 두렵사오나, 북소리가 울릴 즈음에 주상전하의 옥체를 겨냥한
살(殺)이.... 날아온 듯하옵니다.”
(* 후에 밝혀지지만, 이날 훤에게 살을 날린 이는 소격서의 혜각도사였다.
‘교태전의 진정한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교태전에 주인 아닌 자가
들 수 없게 해달라’는 선대왕의 유지를 받든 그는 훤과 보경과의 합방을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8년 전 선대왕은 모든 음모를 알고 있었다.
연우만이 유일한 교태전의 주인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이 날의 소동으로 궁궐 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죽을 듯이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던 훤은 자신의 침전으로 돌아와
월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관상감의 교수들과 왕의 침전을 모시는 궁인들 모두가 그 모습에 놀란다.
얼굴조차 못보고 헤어질뻔한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고...
훤은 오늘 일을 핑계로 ‘아직은 액받이무녀가 소용이 있으니 조금 더 두어
과인을 향해드는 나쁜 기운을 막게 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오늘 밤만 넘기면 드디어 월을 궐 밖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 있다 안심했던
장씨는 뜻밖의 왕명에 눈앞이 깜깜해진다.
왕명에 정해진 기한은 없었다. 앞으로 특별한 왕명이 없는 한 월은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날까지 적으로 둘러싸인 이 궁궐 안을 오가며 왕의 침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머리가 아파오는 장씨와는 달리
월은 내심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중전과의 합방이 무산된 것이나, 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살(殺)이 날아든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궐을 떠나면
다시는 못 보게 될 훤을 이렇게라도 조금 더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
해하는 월이었다.
한편 보경은 또다시 무산된 합방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을 가까스로 다독이고
있었다. 훤의 급작스러운 흉통은 자신과의 합방을 거부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꾀병임이 분명했다. (요 최근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던 훤이었다.
어의도, 관상감의 교수들도, 아버지도 모두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보경은 조상궁에게 훤의 현재 상태를 알아오라 지시한다.
보경의 지시대로 은밀히 대전을 다녀온 조상궁은 ‘주상전하의 갑작스러운
발작은 침전으로 돌아간 뒤 차츰 진정이 되었으며, 액받이무녀 옆에서
평온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액받이무녀.....? 지금 액받이무녀라 하였느냐?”
조상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흠칫 입을 다물었으나,
보경의 다그침이 한 발 더 빨랐다.
결국 조상궁은 궐내에 퍼져있는 훤과 월의 소문을 보경에게 말해준다.
액받이무녀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 사안이었으나, 아무리 궁금(宮禁)
이라 하여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옮기는 법이었다. 이미 궐내에는
왕과 액받이무녀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수근 대는 입들이
많았다. 액받이무녀가 들어온 후로 왕의 환후가 놀랄 만큼 호전되었으며,
밤마다 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무녀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불경한 소문까지....
조상궁의 이야기를 들은 보경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죽은 망령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천한 무녀와 연적이 되라는 말인가!’
피가 거꾸로 솟는 보경이었지만, 이제까지 힘들게 지켜온 ‘착하고 어진 중전의
가면’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보경은 조상궁을 성수청으로 보내어 액받이무녀를 데려오라 명한다.
표면상의 이유는 왕의 침전을 잘 모신 공을 치사하는 것이었지만,
실은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혹시라도 허튼 마음을 품는다면
그 즉시 죽음으로 치죄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픈
여인의 가련한 마음.....
중궁전의 명을 받은 장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보경은 궐내의 그 누구보다 연우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연우를 죽음으로 내몬 윤대형의 여식이었다!
보경이 월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 사실이 윤대형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터! 그 후에 벌어질 일들은....아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장씨였다.
조상궁을 따라 나서려는 월을 만류하고 장씨는 혼자서 중궁전으로 향한다.
“액받이무녀는 인간 부적이므로 함부로 그 얼굴을 보면 부정을 탈 수
있사옵니다. 뿐 아니라 받아낸 액이 잘못 전해질 수도 있사오니
앞으로 원자마마를 생산하실 옥체에 이보다 위험한 일은 없사옵니다.”
앞으로 원자를 생산하실 옥체에 더 없이 위험한 일....!
장씨의 임기응변은 실로 탁월한 것이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요사스러운 무녀를 잡아다 제대로 단도리를 하리라
분노처럼 타올랐던 보경의 결심은 장씨의 그 말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린다.
모함(謀陷)
그러나 여기서 손 놓고 포기할 보경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못한다면 남의 손을 빌려서라도 하리라!’
보경은 그길로 대왕대비전을 찾아간다.
대왕대비전에 입시한 보경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얼굴로 맑은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놀라 연유를 묻는 대왕대비에게 보경은
‘주상 전하께 누가 되는 불경한 소문이 궐 안에 퍼져 있으니,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이 황망한 일을 어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운을 뗀 후 궐내에 퍼져있는 불경스러운 소문에 대해 소상히 아뢰기
시작한다. 액받이무녀라는 요사한 무녀가 신기로 왕을 홀려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 거기에 넘어간 주상이 한 달을 약속하고 들어온
액받이무녀를 기한도 없이 옆에 더 두라 명했다는 전언....주상 전하의 성명
(聖明)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요사한 신력이나
주술에 속아 무녀를 품기라도 하신다면 종묘사직에 이보다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걱정까지.....
점점 표정이 굳어가는 윤씨에게 보경은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말씀드리기 실로 망극하오나.....합방일 날 주상 전하께 날아온 살(殺) 역시
그 무녀의 소행이라는 망언이 궐내에 돌고 있다 하옵니다.”
순간 하얗게 질린 윤씨의 얼굴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한다.
보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물론 거짓이지만!) 이것은 무고(巫蠱)!
당장 능지처참에 처해질 대역무도죄였다!
“실은 신첩이 한방일 전 날 꿈을 꾸었나이다. 흰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나타나 신첩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주상전하의 침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몫이니 너는 평생토록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리라는 말을.....”
그길로 당장 훤을 청대한 윤씨는 궐내 소문을 전하며, 그 요사한 무녀를
당장 쫓아내라 말한다. 대왕대비 윤씨를 움직이게 한 자가 보경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훤은 ‘의심되는 바가 있어 곁에 두고 감시하는 중이니
심려치 마시라’는 말로 윤씨의 간섭을 일축해버린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훤의 태도에 노여워진 윤씨는 윤대형을 불러 조정을
움직인다. 보경을 통해 이미 대충의 내용을 파악하고 있던 윤대형은 조정의
대신들뿐만 아니라 성균관의 유생들마저 움직여 궐내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들끓기 시작한다.
편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요사한 무녀들을 도성 밖으로 축출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대왕대비의 압박, 유생들의 상소, 들끓는 여론.....
훤은 코너에 몰린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왕이,
침전에 무녀를 두었다는 것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설득이 불가한 일이었다.
액받이무녀의 비밀이 만천하에 밝혀진 이상, 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결국 훤은 ‘성수청의 국무를 제외한 무격을 도성 밖으로
축출하고, 동서활인서에 두어 병든 사람을 치료하게 하라’는 전지를 내린다.
월은 합궁일 날 함께 왕의 빈 침전을 지켰던 운의 증언으로 끔찍한 처벌은
면하게 되었지만, 보경의 모함에 의해 결국 ‘요사한 무녀’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긴 채 도성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제 3 막 활인서에 뜬 달
활인서의 달(月)
도성 밖으로 축출된 월이 보내진 곳은 동․서 활인서 중에서도 서활인서였다.
활인서(活人署)는 말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活人)’ 관서.
역병 환자, 기근에 허덕이는 빈민, 노숙자, 유랑민, 죄수 등...
그 시대 가장 빈곤하고 천대받던 최 하층민들의 구휼과 치료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무의(巫醫)라는 명목으로 소속된 무녀 역시 천대받는 신분이긴
마찬가지였다.
월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활인서로 내쫓긴 자신의 처지보다도,
앞으로 훤을 볼 수 없다는 현실과 무고(巫蠱)의 오명을 쓰고 쫓겨난 사실에
깊이 상심하여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마치 삶의 의지를 잃은 듯 축 늘어져 있는 월을 보며 설의 마음도 아팠다.
한번 죽었다 살아난 8년 전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월이었다.
보다 못한 설은 자신이 먹여 살릴 테니 차라리 함께 멀리 도망가자고 한다.
무녀의 신분 따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예전처럼 숨어 살자고...
그때 월의 귓가에 병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는 월의 눈에 들어오는 피폐한 병자들과 굶주린
백성들...
‘아비를 살려주소서.... 아이를 살려주소서....’
월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활인서에서 민초들의 삶과 직면하게 된다.
비루한 삶일지언정 살고자 하는 민초들의 강한 의지와 아우성을 들었다.
그 질긴 생명력 이면에 짙게 깔린 쓰디쓴 눈물을 보았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품은 그들의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월은 그들을 살리고 싶어졌다. 그 의지가, 희망이 꺾이지 않길 바랐다.
밑바닥 인생이라고 해서 삶에 대한 열망마저 밑바닥은 아니었다.
병막으로 오다 쓰러진 병자를 부축해 일으키며 그제야 눈빛이 돌아오는 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곳은 내게 있어 유배지가 아니라 신성한 일터이다!'
월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행동으로 옮긴다.
공수병으로 오인 받는 환자의 물에 대한 트라우마,
자신의 불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아이를 치료시키지 않으려는 어미,
높은 전세징수에 시달리다가 결국 유랑민이 되어버린 농민들,
빈민들을 구휼할 활인서의 물자와 비용을 빼돌려 축재하는 관리,
병이 들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주인집에서 쫓겨난 노비...
민초들의 갖가지 아픈 사연들과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부패, 외척들의 전횡을
직접 체험하며, 신기(神氣)가 아닌 그녀 특유의 따뜻한 심성과 유쾌함으로
고단한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의 상처와 포한(抱恨)을 치유해주는
월... 그러한 월의 모습이 마치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달과 같다 하여
‘활인서의 달(月)’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 가는데...
외사랑
그런 월의 모습을 비밀리에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운이었다.
월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왕명에 의한 일이었지만,
실은 운 자신이 월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힘든 활인서 생활 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월을 보며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란 생각에 마음이 아릿해지는 운...
그러나 민초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치유자로서 칭송받는 월의 모습에
그녀야말로 진정 중전의 자리에 있었어야 할 여인이란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 때면 애써 뇌리에서 떨쳐버리곤 하는 운이었다.
“왕명으로 움직인 것이요, 사내의 연심으로 움직인 것이요?”
설이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정곡을 찔렀음이 분명한데도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운의 모습에 흥이 깨어진 듯 툴툴거리는
설.
“쳇, 재미없기는... 한 잔 합시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감추어둔 술병을 턱 내려놓는 설.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운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설.
성가신 한숨으로 마지못해 설과 술잔을 마주하는 운.
늘 같은 패턴이었다. 궁에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묘한 우정, 독특한 동지애....
예전에 자신의 검술을 알아본 운에게 정체를 들켜버린 설은
운이 월의 정체 또한 알아버렸다는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졌었다.
그러나 운은 침묵했고, 그 침묵이 곧 월에 대한 연모의 감정과 다르지 않음을
설은 간파했다. 그녀 역시 염을 향한 지독한 외사랑을 하고 있었기에...
운 역시 염을 향한 설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과거 그는 염의 사가 근처를 배회하는 검의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고,
얼마 전 그 검기(劍氣)의 주인이 설임을 알게 되었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된 옛 주인을 멀리서 지켜보는 노비 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연심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운.....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한 주인만을 섬기는 호위무사로서의 고단함과 외로움,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짝사랑의 아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지독하게 외로운 밤이면, 외사랑이 못 견디게 아픈 날이면,
그들만의 동병상련을 그렇게 한잔 술에 담아 함께 나누는 운과 설이었다.
달을 찾다
한편, 활인서의 영험한 무녀에 대한 소문은 양명의 귀에도 들어갔다.
양명은 ‘활인서의 달’로 일컬어진다는 그 무녀가 어쩐지 자신이 아는
‘월’과 동일인물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월과의 인상 깊었던 그 첫 만남 이후, 양명은 다시 그녀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진 후였다. 설마 그녀가 왕의 액받이
무녀가 되어 입궐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양명은 그녀의 거처를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명은 특유의 필살기를 발휘하여 허름한 차림으로 변복을 하고
활인서로 향한다. 이미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연기력을 발휘하여
병막에 잠입한 양명은 유명하다는 무녀를 콕 찍어 지목하며
꼭! 그 무녀에게 치료를 받겠다 진상을 부린다.
‘노숙자 주제에 별 그지같은 꼴을 다보겠네’쫓아내려는 관리와
실랑이를 벌이던 양명은 어느 순간 충격으로 그대로 굳어버린다.
저 멀리...수용된 빈민들과 병자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는
저 여인은...연우였다!!
양명은 저지하는 관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달려가 연우의 팔목을
덥썩 잡아 돌려세운다.
놀란 눈으로 양명을 바라보는 연우의 맑은 눈동자.....
8년 전 월장을 한 자신을 바라보던 그때의 그 눈동자.....
떨리는 목소리로 ‘저를...저를 기억하십니까?’ 묻는 양명에게
연우는 미소를 지으며 물론 기억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양명의 눈가가 붉어지고 심장의 고동이 더욱 거세어졌을 때,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그때 저는 천가리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손바닥으로 얼굴의 반을 가려보이며 미소 짓는 연우.
순간 양명은 멍해진다. 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월이었다.
아닌가? 연우가 월인 척 하는 것인가? 아니면 월이 곧 연우인가? 아니면....
양명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우의 아니, 월의 양팔을 거세게
움켜쥐고 양명은 묻고 또 묻는다. 정말 나를 모르느냐고,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정말 연우가 누구인지 모르느냐고.......
그녀는.....연우는 아니었지만 연우를 알고 있었다.
“나으리와 똑같은 눈빛과 목소리로 제게 연우가 아니냐고 묻던 분이 계셨습
니다. 혹시 그때 보쌈이라도 하려 하셨다던 그 분이 연우라는 분이십니까?”
나와 똑같은 눈빛과 목소리로 월에게서 연우를 찾던 사람......?
누굴까....? 염일까? 운일까? 아니면 설마......훤일까.....?
양명은 왠지 불안해졌다. 월이 연우이건 아니건 이번만큼은 왠지 훤보다
자신이 먼저이고 싶었다. 자신이 먼저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다.
월이 연우이건 아니건 이번만큼은...이번만큼은 제발.....
월은 다시 도움을 요하는 환자들에게로 달려갔다.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월의 모습을 지켜보던 양명은 가슴 속에
작은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월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꿈...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는 꿈...
8년 전 한 여인을 품었다 놓쳐버린 뒤로 오래도록 비어 있던 양명의 마음에
또다시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날 이후 양명은 수시로 활인서를 들락거리며 하루는 곡식을 실은 수레를,
또 하루는 자신의 변장 컬렉션에서 신중히 엄선한 의복들을 가져와
자랑스럽게 월 앞에 내놓으며 한마디 한다.
“내가 진정 아끼는 것들이다. 추운 날씨에 요긴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요란하거나 튀는 그 의상에 월은 난감하기만 하다.
‘이건 좀...’이라며 완곡히 거절하려는 찰나, 그 옷을 홱 채가는 유랑 청년.
보는 눈이 있다며 청년을 칭찬하는 양명의 넉살에 결국 월은 웃어버리고
만다. 어디에든 양명의 전위적인 패션 감각이 통하는 이들은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삭막하던 활인서에 웃음과 활기를 전파하는 두 사람......
양명으로 인해 잠시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는 월....아니 연우.....
질투
그 사이 서활인서에서의 월의 활약상이 조정에 보고되었다.
무녀 월에 대한 평가 또한 높아졌다.
훤은 이제 월을 불러들일 명분이 충분해졌다 여겼다.
사실 훤은 그 동안 운의 보고를 통해 활인서에서의 월의 행적과 활약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성수청으로 복귀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하여 월이 서활인서로 간 뒤 그곳의 구휼 실적이 높아졌다는
보고를 들은 훤은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월은 역시 범상치 않은 무녀였다. 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그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할 방법을 찾아 주었다.
월의 공적을 명분으로 다시 입궐시킬 적절한 시기를 두고 보자 생각하며
훤은 운과 함께 서활인서로 잠행을 나간다.
그곳에서 말로만 듣던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도한 훤은
경악한다. 자신의 백성들이 이렇듯 처참하게 살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훤이었다. 물자 부족과 관리들의 비리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월의 모습을 보며,
훤은 울컥해짐과 동시에 마음 한 켠 애틋함을 느끼는데...
그때 곡식을 실은 수레와 함께 양명이 도착하고,
그런 양명을 반기는 월의 모습이 훤의 눈에 들어온다.
양명을 향해 티 없이 환하게(마치 연우처럼) 웃어 보이는 월.....
둘 사이에 흐르는 남다른 친밀감과 따뜻한 분위기를 감지한 훤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듯한 충격을 받는다.
왠지 마음이 상한 훤은 결국 차갑게 돌아서서 궁으로 돌아가 버리고....
과거에 양명이 연우를 연모했던 사실을 아는 운은 설마 양명마저
월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지는데...
궁으로 돌아온 훤은 관료들을 불러 활인서 병자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추가 지급하라 이르고, 비리를 저지른 활인서 관리를 엄중히 벌한다.
또한 서활인서의 구휼실적을 올린 월이라는 무녀를 성수청으로 복귀
시켜 왕실의 구복과 백성의 안돈을 기원하는 임무를 맡기라 명한다.
훤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월과 양명의 다정한 모습에 알 수 없는 짜증
을 느낀다. 마치 양명에게서 월을 빼앗아오듯이, 서둘러 월의 입궐 명령을
내린 것 또한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월과 양명이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도대체 언제 처음 만났으며
얼마나 깊은 사이인 것인지...월에게도, 양명에게도 왠지 모를 분노와 배신감이
치밀었다.
어릴 때부터 마음으로 좋아하던 형 양명이었다.
그가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부왕의 홀대를 받았을 때에도 언제나 그것이
마음 아팠던 훤이었다. 형제의 우애보다는 군신의 도리를 먼저 행하는
양명의 태도가 서운하긴 했었어도 이제껏 이런 감정이 든 적은 없었다.
그 감정이 바로 사내의 질투라는 걸 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증폭되는 의문
그때 의금부 도사 홍규태가 입시하였다.
훤의 비망기를 받고 비밀리에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홍규태는 前상선내시관의 자결 소식을 훤에게 알린다.
훤은 충격을 받는다. 얼마 전 훤은 선대왕의 친신(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이었던 전상선내관을 불러 세자빈 허씨의 죽음에 대해 몇 가지
하문을 한 적이 있었다.
‘세자빈 허씨의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세자빈 허씨가 죽은 뒤에 선대왕이 따로 조사시켜 보고 받은 기무장계
(機務狀啓, 비밀리에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중요 문서)를 기억하는가?’
단 두 가지 질문에 전상선내관은 필요이상으로 당황하고 긴장했다.
그의 당황과 긴장은 결국 실수를 불렀다. 그의 실수로 인해 훤은 연우의
죽음이 병사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추측으로만 존재했던 기무장계가 실제로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를 더 강하게 취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혀를 깨물고 자결을 할지언정
선대왕이 묻어버린 일을 발설하진 않을 자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훤의 짐작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훤은 앞으로 이 사건을 어떻게 조사해 나가야 할 지 막막해졌다.
세자빈 간택에 참여했던 관상감의 교수 세 명은 사약을 받았다.
연우의 병을 진맥했던 어의도 죽고 없었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을 것 같은 선대왕도 죽고 없었다.
연우에게 약을 준 홍문관 대제학도 죽고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물어보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조사할 수 없는 어려움이 더 막막하였다.
그러나.....전 상선내관은 많은 것을 숨기기 위해 자결을 했지만,
그로 인해 훤에게 드러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선대왕이 세자빈의 죽음
을 둘러싸고 조사했던 것이 뭐였는가는 덮었지만, 왜 그것을 덮어버렸는가
하는 것을 죽음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대왕이 사실을 덮어야 하는 이유,
그것을 전 상선내관이 자결을 하면서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
답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연우의 죽음에 개입한 인물들은 왕족일 가능성이 확실했다!
세자빈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대역죄였다. 그것이 왕족이란 것은 일대풍파
가 일어날 사건이었을 테고, 아무리 왕족이라고 해도 중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기에 선대왕은 사건을 덮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왕족이 누군가 하는 것인데.....연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쪽일 테고 이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대왕대비 윤씨!
하지만 심증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증거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왕족의 소행이라면 연우의 마지막 봉서에 적혀있던 사실,
홍문관 대제학의 손으로 연우에게 약을 먹인 건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수사의 끝이 비극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엇갈림
한편 세간에서는 굶주림에 못이긴 유랑민들이 무덤을 파헤쳐
수의마저 훔쳐가는 사태들이 출몰하고 있었다.
염의 사가를 방문한 양명은 청지기에게 대제학 어른과 연우 낭자의 무덤을
잘 보살필 것을 당부한다.
“암요...우리 불쌍한 연우 아가씨 무덤이 몇 번이나 파헤쳐지게 할 수는
없지요.”
청지기의 무심한 한마디에 양명의 표정이 굳어 내린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해보라며 청기기를 다그치는 양명.
“가슴 아프실까봐 윗분들께는 소인네가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연우 아가씨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후 제가 봉묘를 둘러보러 갔었는데,
까마귀떼인지, 들짐승인지 우리 아가씨 봉묘를 파헤치다 말았더라구요.
제가 다시 안 가봤다면 큰일이었을 겁니다.”
양명은 놀라움과 충격, 희망과 기대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연우를 꼭 닮은 얼굴, 자신과 연우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던 월....
곁에서 보면 볼수록 연우와 비슷한 월의 표정, 말투, 행동...
그리고.....장례를 치르자마자 파헤쳐진 무덤!
어떤 음모에 의해 연우가 산 채로 묻혔다가 누군가에 의해 다시
파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단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미 양명은 활인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양명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월은 또다시 사라진 뒤였다.
제 4 막 되살아나는 기억
은월각에 숨은 달
양명이 애가 타는 심정으로 월을 찾아 활인서로 달려가던 그 시각,
월은 왕명에 의해 다시 궐로 들어가고 있었다.
월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대비 한씨는 대왕대비전을 찾는다.
“중전에게 원자가 생기지 않는 것이나, 합궁일만 되면 주상의 환후가
심각해지는 것이 아무래도.....비명에 간 허씨 처녀의 원혼 때문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월이라는 아이의 신력이 참으로 신통하다 하니,
은월각에 보내어 허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는 일을 맡기면 어떠하겠사
옵니까?”
대왕대비 윤씨는 마음이 흔들린다.
윤대형을 움직여 월을 내쫓은 장본인이었지만 그 아이 덕에
훤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던 것이나, 활인서에서의 공적으로 보나,
그 아이의 신력이 탐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보경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내렸다는 여인이 아무래도 오래 전
자신이 죽음으로 내몬 연우인 것만 같아 내심 찜찜했던 윤씨였다.
(게다가 그날의 운의 증언으로 월은 무죄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대왕대비전의 허락을 받은 대비 한씨는 당장에 성수청에 명을 내린다.
대비전의 명을 받은 장씨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이 아이는 어찌하여 한 순간도 위기와 시련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가....!’
안쓰러움과 죄책감에 남몰래 눈물을 삼키는 장씨였다.
그렇게 월은 8년 전 세자빈의 신분으로 들어갔던 그곳,
은월각에 무녀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끼이익...음산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은월각의 문이 열리고,
잡초만이 무성한 전각의 뜰이 눈앞에 펼쳐지자 월은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빠져든다.
자신이 위로해야 할 혼령이 바로 자신의 혼령임을 모른 채
매일 아침 그 곳에 정성으로 향을 올리고, 청소를 하고, 장원서에서
얻은 꽃씨로 삭막한 정원을 가꾸어 나가는 월.....
(*이 모든 것은 액받이무녀 때처럼 비밀리에 진행되는 임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월은 그 곳에서 한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저 궁녀들의 소문 속에 등장하는 혼령이 자신의 신기에 의해
보여진 것이라고만 믿는다.
어느 날....늘 뒷모습만 보이던 아이가 월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어쩐지 낯이 익은 여자아이의 얼굴.....!
‘연우 낭자...’ 이번엔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명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활짝 미소짓는 여자 아이의 얼굴....
(* 세자와 세자빈 시절의 훤과 연우의 모습)
월은 또다시 찾아온 기시감에 어지러움을 느낀다.
‘연우 낭자...’
또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월, 그곳에는 성인이 된 훤이 서 있었다.
월을 본 훤 역시 놀란다.
연우의 죽음에 관한 수사가 난관에 부딪히자 심란해진 마음을 추스르려
밤 산책을 나선 훤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향기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당도한 곳이 이곳 은월각이었다.
분명 자신이 직접 폐쇄할 것을 명한 곳인데,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은월각으로 들어선 훤의 눈앞에 전각 가득히 꽃들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마치 환영처럼, 달빛 아래 월이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연우와의 추억이 담긴 이곳에 월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월의 모습에 어린 시절 연우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훤.
자신도 모르게 연우의 이름을 불렀다.
‘연우 낭자...’
인기척을 느낀 듯 돌아보는 월.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여는 훤.
“너는...누구냐?”
역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가까스로 대답하는 월.
“전하께서 직접 월이라 이름하여 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너는...대체 무어냐?”
“무녀 월이옵니다.”
“정녕, 연우가 아닌 것이냐?”
“그 여인이기를......바라시옵니까?”
“아니...모르겠다. 이제는...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제 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인이 월이든, 연우든, 그 누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이 여인을 원할 뿐이었다.
내 눈앞에 살아 있는 이 여인을 사랑할 뿐이다.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훤은 처음으로 월을 품에 안으며 추억 속의 연우에게 묻는다.
‘연우 낭자, 내가.....이 여인을 마음에 품어도 되겠습니까?’
천변(天變)
해가 달을 품었던 그 날 이후.....
성수청 뜰에서 하늘을 보며 천기(天氣)를 읽던 도무녀 장씨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천기가 움직이고 있다... 곧 해와 달이 만나니...
사람이 끊어놓은 인연을 하늘이 다시금 이어주려 하는구나...
천변(天變)을 거친 후에 만물은 제자리를 찾아가리니.....
곧....피바람이 몰아치리라....’
그 시각, 소격서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던 혜각도사 역시 어떤 예감에
소격서 뜰로 나온다.
텅 빈 뜰 저 끝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선대왕의 뒷모습에 놀라는 혜각.
서글픈 미소로 혜각도사를 바라보던 선대왕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그 손끝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던 혜각도사의 표정은
뭔가를 발견한 듯 하얗게 굳어 내린다. 혜각도사가 다시 시선을 내렸을 때
선대왕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
그 날... 선대왕으로부터 무언의 계시를 받은 혜각도사는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冥界叩聲(명계고성) 日月遭遇(일월조우)
鏡戒滿月(경계만월) 雙日於天(쌍일어천)
雲斬日月(운참일월) 一日歸天(일일귀천).....
‘저승 문 두드리는 소리에 해와 달이 서로 만나네.
거울이 보름달을 경계하니,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도래하리라.
구름이 해와 달을 참하면, 하나의 태양이 명을 다할 지어다.......’
혜각도사는 거기서 잠시 쓰는 것을 멈추었다.
‘세상 만물은 반드시 제자리(正)로 돌아가야 하는 법......’
한 줄의 글귀를 덧붙인 혜각도사는 마지막 글자에 힘주어 방점을 찍었다.
‘......正’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역시 천문을 측후하며 왠지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이때 관상감에서는 조만간 있을 일식과 구식례 준비로 분주하던 참이었다.
일식이나 월식을 하늘의 경고라 생각하여 천변(天變)으로 여겼던 그 시절,
일식이 일어나면 왕은 월대에 나아가 자숙하며 태양을 가린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의식을 거행했고, 그것이 바로 구식례(救食禮)였다.
관상감에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역산을 통해 일식을 예측하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추산해냈지만, 만의 하나 예보가 빗나가면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일식 당일까지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그런 절차상의 복잡함과는 별도로 천문학 교수는 일식이 일어난 뒤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심란해진 천문학 교수가 명과학 교수를 찾아갔을 때,
명과학 교수 역시 의혹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월이 액받이 무녀로 들어온 뒤로 연이어 발생한 불가해한 사태(왕의 건강이
좋아졌음에도 대신 액을 받아낸 무녀에게는 해가 없는 점, 합궁일에 날아든
살 등등)와 월의 관상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식이 다가옴에 따라, 앞으로 있을 격변을 예고하듯 월을 둘러싸고
수많은 상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련
한편, 그날 은월각에서 훤과 월이 만났던 일은, 이번에도 발 없는 말이 되어
궁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요사한 무녀가 다시 왕을 홀렸다는 소문....
그리하여 착하고 어진 중전만 더 불쌍하게 되었다는 동정....
이 일로 월은 중전 윤씨를 흠앙하는 궁녀들뿐만 아니라,
성수청 소속 수종무녀들에게 까지 미움을 사게 된다.
사사건건 월을 괴롭히는 궁녀들의 행동이 중전 보경에 대한 충성에 의한
것이었다면, 성수청 수종무녀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성수청의 수종무녀들은 다른 관청에 비해 누리는 혜택이 많아 그 경쟁이
치열하였고, 그 만큼 신력이 높은 무녀들이 선택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월은 너무도 쉽게 무적에 올랐고, 비밀리에 왕의 침전까지 모셨으며,
성수청의 국무인 장씨의 특혜마저 받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엣가시였던 월이 더욱 더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바로 소문 때문이었다.
나름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진 수종무녀들은 소문의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음사를 행하고, 무고의 의심을 받는 월이 자신들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여 언제든 제대로 손봐줄 기회를 벼르고 있는 무녀들이었다.
이렇듯 궁녀들과 수종무녀들의 괴롭힘은 예상치 못한 월의 또 다른
시련이 되었다.
훤과 월이 은월각에서 밀월을 나눴다는 소문은 보경의 귀에도 들어간다.
월에게 은월각의 혼령을 위로하라는 임무를 내린 것이 대왕대비전과
대비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보경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경은 더욱더 월이라는 무녀가 궁금해졌다.
천한 무녀의 그 무엇이 그리도 냉랭한 훤의 마음을 훔쳤는가, 그 얼굴을
직접 보고 확인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장씨의 경고 따위 땡무당의 헛소리라
여기고 치워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용종을 잉태할 몸으로 나쁜 기운을
잔뜩 품은 액받이무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는 차마 없는 보경이었
다. 결국 보경은 내일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구식례에 쏠려있
을 때 은밀히 은월각을 찾아가 몰래 월을 엿보기로 결심하는데.....
일식(日蝕)
마침내 일식 당일이 되었다.
근정전 앞 뜰에 큰 깃발이 세워지고, 각 방위마다 북, 창, 도끼 등의 기물이
배치되었다. 잠시 후 군사들이 두 줄로 진을 치고 늘어섰다.
관상감의 관원들뿐 아니라 특별히 왕의 친신들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그 속에는 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관청에서도 소복을 입은 관리들이 구식례를 행하는 왕을 응원할 것이었다.
이번 구식례는 훤의 지시에 따라 전례 없이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사실 일식은 더 이상 천변이 아니었다. 역산으로 예측 가능한 우주의
순리였다. 그러나 일식을 재이(災異)로 여기고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동요
를 막기 위해 치르던 의식이 예법으로 정착된 것이었다.
이를 아는 훤은 이번 일식의 경우 해가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이기에
보다 더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으로 구식례의 규모를 키운 것이었다.
또한 조정 백관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보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1각 후 일식이 시작될 것이라는 관상감의 예보에 드디어 소복을 입은 훤이
근정전 월대(月臺)로 나와 해를 향해 앉았다.
마침내.....해와 달이 만나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때 성수청에서도 도무녀 장씨가 신당에서 기도를 올리며 나름의 의식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식의 자질구레한 뒷수발을 위해 성수청에
들었던 월은 사소한 시비 끝에 수종무녀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군기를 잡으려 드는 무녀들....
월의 호위무사인 설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월을 은월각의 골방에
밀어 넣고 가두어버리는데.....
그렇게 월이 은월각에 갇혀 있던 그때,
일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군사들이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둥둥둥...! 마치 전쟁을 개시하는 신호처럼 크게 울리는 북소리.
(북소리는 식(蝕)의 시작부터 해의 복원까지 계속 이어짐)
해를 향해 꼼짝도 하지 않고 정좌한 채 구식례를 거행하는 훤.
하늘의 해와 달이 서서히 겹쳐지고...
해가 가려지는 하늘은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은월각 역시 점점 어둠에 묻혀 가고...
둥둥둥...!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은월각의 낡은 방안에 갇힌 월은 울컥 두려움이 치솟았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월.
군사들의 북소리와 월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마치 저승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하고...
월은 언제,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둠 속에 갇혀 느꼈던 공포가
기시감처럼 되살아났다.
해와 달이 만나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 순간,
천지가 한순간 어둠에 잠긴 그 순간,
북소리 드높아지며, 구식례가 최고조에 이른 그 순간,
마침내 섬광처럼 기억을 떠올리는 월!
둥둥둥!!!! 8년 전 무덤 속에서 눈을 뜨는 어린 연우의 모습!!!
쾅쾅쾅!!!! 관에 갇힌 채 공포에 질린 연우가 관의 문짝을 두드리던 모습!!!
둥둥둥!!!! 은월각에서 종종 보았던 어린 아이의 혼령!!!
무덤 속의 아이와 은월각의 아이는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간 월은 잃어버렸던 기억의 끈을 잡는다.
“저 아이는.....바로 나다!
이곳은.....내가 죽었던 곳이다!!!”
되살아난 기억
해가 복원되어 천지가 광명을 되찾자 북소리가 멎고, 훤은 구식례를 마친다.
한편 기도를 마치고 나온 도무녀 장씨는 수종무녀들의 분위기와
월이 보이지 않음에 곧바로 사태를 알아차린다.
장씨의 매서운 눈빛에 쫄아든 어린 수종무녀가 사실을 실토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한 장씨는 설을 대동하고 은월각으로 향하고...
두 사람은 은월각의 방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연우를 발견하는데...
그 시각 간발의 차로 은월각에 당도한 보경은 마침 장씨와 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월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 걸음을 멈춘다.
한순간이었지만 월의 얼굴을 본 보경은 경악과 충격으로 굳어버린다.
그것은....연우였다!
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성수청 도린곁에 있는 월의 처소였다.
장씨와 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월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8년 전 무덤에서 부활한 뒤 처음으로 눈을 뜬 그날과 같은 상황....
월은 왠지 서늘한 표정으로 장씨를 바라본다.
마치 기억을 잃었던 그날처럼, 낯선 사람을 보듯이...
“......왜 그러셨습니까?”
담담하지만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그 질문에 장씨는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음을 직감한다.
“왜 저를 죽이셨습니까? 왜 저를 살리셨습니까?”
모든 것을 감내하듯 담담한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는 장씨....
“왜 그러셨습니까? 왜! 왜!! 왜!!!”
격앙된 연우의 목소리는 결국 절규가 되고...
장씨는 이제 더 이상은 진실을 숨길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연우가 겪게 될 더 큰 상처와 아픔을 더 이상 늦출
수도, 막을 수도 없음을 깨달은 장씨는 결국 연우가 모르는 과거의 내막들을
하나둘 풀어놓기 시작한다.
새로이 알게 된 감당 못할 진실들 앞에서 연우는 끝내 오열하고 마는데...
한편, 연우를 본 충격에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교태전에 돌아온 보경은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연우는 분명 8년 전에 죽었다.
아니..... 죽.였.다.
당시 연우가 병으로 죽은 줄만 알고 있던 보경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나의 편이라 여겼던 보경이었다.
그러나....아니었다.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은 행운의 여신이 아니라,
아버지 윤대형의 권모와 술수였다.
중전에 책봉되었던 그 해, 문후 차 입시했던 대왕대비전에서 보경은
아버지와 대왕대비가 꾸민 그 무서운 음모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들의 주구가 되어 흑주술을 날린 무녀가 누구인지도.....!
그 저주받을 흑주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족이 누구인지도....!
보경은 두 귀로 똑똑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 무덤에 묻혔던 연우가 어떻게 되살아난단 말인가?
연우의 생존가능성을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젓던 보경의 표정이 어느 순간
하얗게 질려버린다.
도무녀 장씨......!!!
월의 신모이자 성수청의 국무, 8년 전 연우를 주술로 죽인 장본인!
그렇다. 보경이 월을 만나고자 하였을 때 온갖 핑계를 갖다 붙여 기어이
만나지 못하게 방해했던 장씨였다. 마치 어떤 비밀을 숨기기라도 하듯...
죽이는 주술을 썼으니, 살리는 주술도 가능할 터!!!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뭔가 모종의 비밀이 있을 것이었다!
연우와 월, 그리고 도무녀 장씨! 그들 사이에 분명히 어떤 연관성이 있다!!!
어쩌면 죽은 줄 알았던 연우가 살아 있으며,
액받이 무녀 월이 바로 연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훤은, 설마 훤도 월이 연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인가?
공포와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던 보경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아버지 윤대형에게 전갈을 보내는데...!
이후 기억을 되찾은 연우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인물들의 갈등,
월의 정체를 알게 된 외척세력들에 의해 또다시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는 연우,
서서히 진실에 다가서는 훤,
훤의 추리에 의해 밝혀지는 반전의 인물,
양명을 내세운 윤대형의 역모,
엇갈린 사랑에 가슴 아파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 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