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프로듀사>
연출: 표민수, 서수민
극본: 박지은
출연자: 차태현, 공효진, 김수현, 아이유 外
1. 개요
‘너나 가져라’ 해서 여의도(汝矣島)라 이름 붙여졌다는 이 섬.
모래와 바람만이 가득해 천인들이 양을 치고 궁녀들의 화장터로 쓰였을 만큼 쓸모없던 이곳은 이제 누구라도 들어오고 싶어 하나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도도한 땅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권력이 모이는 곳, 증권가의 거대한 자본이 오가고 온갖 찌라시와 루머가 양산되는 곳. 그리고... 뉴스와 드라마와 쇼로 대한민국의 여가시간을 책임지는 방송국이 있는 곳이 바로 여의도다. 그러니 이제는 누구도 ‘너나 가져라’고 말할 수 없는 어마무시하게 귀하신 땅인 것이다.
자 이제..
여의도의 중심,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으며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고 있는.. KBS 한국방송... 그곳의 6층, 예능국으로 올라가본다. 그곳에는 <1박 2일> <개그콘서트> <슈퍼맨이 돌아왔다> <비타민> <연예가중계> <뮤직뱅크> <전국노래자랑>을 만드는 사람들이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사무실’이 있다. 그냥 사무실이다. 교무실이라든가 동사무소라든가 구로동 어느 무역회사와 뭐 그리 큰 차이가 없는.. 파티션 있고 복사기 토너 흔들어 써야하고 부장 눈치 보느라 어쩔 수 없이 회식 참석해야 되는... 그냥 사무실.
이곳에서 <1박 2일> 피디는 새로 들어온 조연출에게 “혹한기 야외 촬영 나갈 때 어느 회사 패딩이 가장 가성비가 좋은지”나 “어떻게 하면 까나리 액젓을 아메리카노랑 비슷하게 만들어 멤버들을 왕창 속일 수 있는지”를 어마어마한 영업비밀인 양 전수하며, <개그콘서트> 피디는 어떤 각도에서 박을 머리에 쳐야 깨지는 소리도 아주 그냥 시원시원하게 나면서 웃기게 얻어맞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수십 개의 박을 지 머리로 깨고 앉아 있다.
한때는 수재 소리 들어가며 서울대 연고대 나와서 방송국 들어갔다고 축하도 많이 받았는데, 죽자고 영어 공부해서 토익도 980점씩 맞았었는데... 거리 인터뷰 나가 외국인 만나면 버벅대기는 고딩과 매한가지고 독해도 해외 직구할 때나 유용하지 별로 쓸 일도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1등을 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건만, 정작 촬영장에서 가장 필요한 건 ‘눈치’와 ‘체력’이요, 취업하려고 ‘논술’과 ‘상식’ 후벼 팠지만 회의실에서 가장 필요한 건 ‘수려한 말빨’과 ‘핸드폰 전화번호부’임을 깨닫고 만... 예능국 근무 중인 고학력 바보들.
밤샘회의에 촬영에 편집에 마라톤을 뛰고도 시청률 떨어지면 밥버러지 취급을 받으니 오늘이라도 ‘너나 가져라’ 하고 싶지만.. 그래도 차마 그럴 수 없는 소중한 KBS 출입증.
그거 목에 걸고 오늘도 여의도 18번지 6층으로 출근하는 피디 아닌 직장인들의 사무실 이야기.
2. 등장인물
라경민 (36세- 예능국 10년차 1박 2일 피디)
“내 말이 어려워? 왜들 못 알아듣지?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경민은 오늘도 방통위에 불려와 있다. 한쪽 다리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달달 떨어가며. 첨 온 건지 잔뜩 주눅 들어 있는 후배 피디 긴장을 풀어주기도 한다. 여기도 처음이 힘들지 나중엔 별 거 아니라며. 릴랙스하라며.
여직원에겐 ‘늘 먹던 걸로’ 달라면서 익숙하게 차를 주문하는 경민. 자신은 언제쯤 선배님처럼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겠냐는 후배에게 유자차의 유자를 오독오독 씹어가며 말한다.
‘별거 없어. 그냥 들어가서 죄송합니다를 딱 스무번만 하고 나와... 이게 얼핏 쉬워보이지? 근데 거기 들어가면 생각이라든가 변명이라든가 그런 게 하고 싶어질거야. 그거를.. 하지 않는 게 포인트야”
잠시 뒤.. 방통위원들 앞에 앉게 된 경민. 굳이 가족들 식사하는 일요일 저녁 시간에 ‘코딱지를 먹는다’는 더러운 표현을 썼었어야 됐겠냐는 위원들의 폭풍지적에.. 몇 번은 죄송하다 죄송하다 하다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예민한 멘트 하나에 더는 못 참고 변명을 시작한다.
“실은 그게... 그 코딱지를 먹는다는 것이.. 진짜로 그런 물리적인 시식 행위를 한다는 게 아니라.. 나이에 비해 좀 모자란 행위를 하는 차원에서는 전국민적으로 이미 공감대를 획득한 표현이라는 판단하에... 그게 그... 어떤.. 분비물이라든가 하는 다른 단어로는 대체 불가능한 오서독스한 뉘앙스가 있어서...”
괜한 소리 했다가 태도가 진지하지 않다고 찍혀서 욕만 바가지로 얻어듣고 죄송하다고 따따블로 사과한다.
경민은 늘 그런 식이다. 그 몇 초만 참으면 될 걸 못 참아서 대사를 그르친다. 나는 그런 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가도 15초가 지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온다. 나가지를 말든가... 나갔으면 들어오질 말았어야 하는데.. 꼭 그걸 둘 다 해서 모양만 빠지고 만다.
예능국 입사 8년차. 그동안 거쳐간 프로그램들은 많지만 딱히 대표작이라고 내세울만한 프로그램은 없다. 또한 같이 프로그램 했던 연예인들은 많지만 나중에 결혼할 때 그들 중 누가 와줄까 헤아려보면 그것도 딱히 잘 모르겠다. 이서진하고 농담따먹기하는 나영석 피디를 보면 솔직히 부럽지 않은 거 아니지만, 겉으론 피디랑 연예인은 일로써 대해야 하는 공적인 사이인데 저렇게 편하게 서로 말트고 맞먹고 자긴 이런 거 좀 그렇다며 영석이형 언제 한번 만나서 쓴소리 해줘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러워하는 거 다 티난다.
6개월전부터 1박 2일 시즌 5 <여배우들의 1박2일>을 연출하고 있으나..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다. 시청률은 기복 없이 바닥을 기고 미디어에선 처음엔 혹평 일색이더니 지금은 기사 조차 안쓰지만 정작 본인은 이 상황이 너무 이해가 안된다. 늘 자기 프로그램 보면 박장대소한다.
“아니.. 저렇게 재밌는데 왜 안보지? 이해를 못하겠네. 이거는 뭐가 재미가 없어야 이걸 고칠까 저걸 고칠까 할텐데... 난 도통 모르겠네. 왜 안봐? 저렇게 재밌는 걸 안보고 뭘 보는거야? 진짜 감 없네” 라며 씁쓸하게 시청자들을 탓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감 없는 건 경민이다. 여태 경민이 잘된다 해서 잘된 프로그램 없고 망한다 해서 망한 프로그램 없다. 아이유 처음 나왔을 때 이름이 아이유가 뭐냐며 아이비 짝퉁이냐며 절대 뜰 리가 없다고 호언장담했었고 김수현 신인 때 저렇게 생긴 앤 주인공 못한다 쟤 잘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었다. 나름 일관성 있는 반대적중률로 예능국 펠레라고도 불린다.
광주 살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의 관계 때문에 예진과는 가깝게 지냈다. 여름마다 두 가족이 텐트랑 버너 챙겨서 계곡으로 바다로 휴가도 같이 갔었다.
그러다 97년 IMF 시절. 은행원이던 두 아버지는 나란히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나마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던 예진네는 사정이 나았지만 경민네는 막막한 지경이었다.
세상에 분개하며 함께 술을 먹던 중, 경민부는 충장로 근처 작은 사무실이 밀집된 지역에 감자탕집을 열면 대박일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그 말에 솔깃한 예진부는 꽤 큰 자본금을 들여 실행에 옮겼다. 거기에 힘을 보태기 위해 경민부는 퇴직금을 몽땅 싸들고 감자탕집 동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타고난 투자감이 없는 경민부에 비해 돈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살아있었던 경민모는 그거 하면 망한다며.. 안된다고 펄펄 뛰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심차게 진출했던 충장로 근처 회사들의 폐업이 속출하면서 점심 대목을 노렸던 감자탕집엔 파리만 날렸다. 내가 뭐랬냐! 얼른 퇴직금 되찾아와라!는 경민모의 닦달에 시달리다 못한 경민부는 예진부에게 조심스레 투자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사업에 쏟아부은 원금이 쉽게 회수될 리가 없었고,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자존심이 상한 예진모는 ‘옛다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심정으로 과천에 마련해두었던 16평짜리 아파트 분양권을 투자원금 대신 경민네 집에 넘겨 주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조금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린 두 가족.
경민모는 16평 아파트 분양권을 기반으로 90년대 마지막 부동산 공중곡예에 편승하여 기적적으로 과천 - 분당- 반포를 잇는 황금라인을 완성하며 열배가 넘는 수익을 남겼다. 그 덕분에 월세 받아가며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는 중이고 현재 경민이 거주하고 있는 여의도 30평대 아파트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반포 신여사로 불리며 부동산 투자 노하우를 전수하는 강의도 하는 경민모로선 지금이 인생의 전성기나 다름 없지만, 감자탕집 투자 아이디어를 제공한 당사자인 경민부로서는 늘 예진네에 부채감이 있다.
그 부채감이 알게 모르게 경민에게도 이어져 온 것인지 경민도 이상하게 예진이 뭘 부탁하면 거절을 잘 못하겠다. 같은 대학 다닐 때, 지 아르바이트 한다고 리포트 대신 써달랄 때도 너 돌았냐?고 하면서도 정신 차려 보면 도서관에서 그걸 쓰고 앉았었고, 예진이 방송국 피디 시험을 봐야하는데 자긴 과외해야돼서 바쁘다고 스터디 대신 들어가서 정보 좀 빼와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회계사 될 건데 그걸 왜 하냐!! 고 짜증냈지만 어느새 스터디 열심 멤버가 돼서 예진도 방송국 붙이고 어쩌다 보니 본인도 붙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예진이 아파트 입주 포인트가 안 맞아서 서너달만 경민네 집에 들어와 살겠다는데.. 그것도 지 동생까지 데리고 들어와서... 그 얘기 듣는데 하, 기도 안찼다. 그래서 똑부러지게 말해줬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너 어디 기지배가.. 어디 남자 집에.. 어딜 들어와 사냐고.. 확실히 말하지만 내 집에 빌붙을 생각 꿈에도 말라고!!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 예진에게 잔소리 들어가며 남매의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 기지배가 기가 쎄서 그래. 보통 드라마에선 이런 상황에서.. 친구인 줄 알았던 그녀와 썸도 타고 그러던데, 탁예진 이건 썸보단 쌈이 어울리는 기지배니까... 어우 기빨려...’
몇 번의 가벼운 연애도 있었지만 지금은 솔로.
기본적으로 여자의 스펙을 중시한다. 어머니가 들이대는 검사,약사,의사,교사 모두 열심히 만난다. 그런데 최근 결혼을 전제로 만나온 여검사가 자긴 변호사 개업할 생각이 없고 평생 강직한 검사로 남고 싶다고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해서.. 아쉽게도 그녀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우리는 너무 다른 것 같다. 서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않겠냐...’ 이렇게. 상처 안받게. 빙빙 돌려서. 잘.
그런데 그녀가 못알아먹고 문자를 보내온다. ‘경민씨 마음 잘 알겠어요. 우리 서로를 좀 더 알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시간 함께 해요 ♥’
아니.. 사시까지 패스한 여자가 왜 그 말을 못 알아듣지? 지금 그 얘기가 아닌데...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지만 우유부단에 결정장애까지 있어 소통이 가장 어려운 경민.
그래선지.... 그는 알아먹지를 못한다. 예진이 그에게 하는 말들의 진짜 의미를.
그리고 뒤늦게 그게 뭔 소리들이었나를 깨달은 후...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전해 보려 하지만 이번엔 그쪽에서 절대 못알아듣는다.
‘내 얘기가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탁예진 (36세- 예능국 10년차 뮤직뱅크 피디)
“피디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알아?실력?인맥?시청률?
다 필요 없어. 뒤끝이야! 피디는 뒤끝이 있어야 돼!”
KBS 앞 할리스 커피숍에 모여앉은 매니저들에게 긴급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예진피디 저기압. <진돗개 3호>’가벼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왜 하필 오늘.. 우리 애들 뮤뱅 컴백날인데.. 등등..
누군가가 도대체 무슨 일이냐 묻자, 다시 문자가 도착한다. ‘예진피디가 외제차 문콕 함. 견적 상당할 것으로 예상’
아... 차라리 그게 내 차였으면 좋았을 것을... SM 변실장의 진심이다.
신입 매니저가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자, 변실장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진돗개 3호란 예진피디가 굉장히 예민한 상태지만 굳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큰 피해는 없는 상황이야. 2호일 땐? 굳이 건드리지 않고 그냥 옆에만 있었을 뿐인데도 피해를 보는 상황이지. 그리고 1호? 여의도 근처에도 있지 않는 게 좋아. 여자가 혀에 칼날 달고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없지? 보게 될거야. 첨에 방송국 입사했을 땐 인기도 많았다던데... 지금은 뭐...’
그랬다. 입사초기인 2005년에 예진은 예능국의 한떨기 꽃이었다. 남자들만 득실대는 예능국에 들어온 신입여피디였기 때문에 모두들 ‘피디 치곤’ 이쁘다며 좋아했었다. 그때 그녀는 6층 복도를 플레어스커트에 플랫슈즈 신고 날듯이 뛰어다녔고, 자막 하나를 넣어도 핑크색으로 예쁘게 넣으면서 수줍게 ‘자막 IN입니다. 네. 지금 OUT이에요’ 라고 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예진은 한 마리의 쌈닭일 뿐이다.
쌈박한 기획안 내봐야 통과만 되지 정작 연출은 동기나 후배들 중에서 체력 좋고 기동력 있는남자들이 하고 이래저래 기회를 뺏기고 치이고 배제되고 소외되고 밀려나기만 하는 과정들을 겪으면서, ‘우리 예진인 참 여리고 착해’란 말이 결코 칭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냥 호구란 얘기다. 내 밥은 내가 찾아먹자. 지 앞가림은 셀프다!
<해피투게더>를 연출하면서부터 예진은 섭외의 여왕으로 우뚝 일어섰다. 소지섭이고 조인성이고 그녀가 작정하고 나서서 출연이 성사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릎은 필요할 때 꿇으라고 있는 것이고 욕은 적절한 타이밍에 하라고 만들어진 것이며 눈물은 남이 볼 때 흘리라고 존재하는 것 아닌가? 설득도 하고 화도 내고 애교도 부리고 그러다 안되면 진상 피며 울기도 했다. 그러면 대부분 소속사 사장들은 험한 꼴 보기 싫다며 예진의 요구를 받아줬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될 땐 예진은 그들이 원하는 카드를 내밀었다.
“오케이.. 조인성 주세요. 저, 이대표님 키우시는 신인.. 받을게요. 제가 낙하산이 뭔지 제대로 보여드리죠.”
이 바닥은 철저히 기브 앤 테이크의 원칙에 의해 움직여지는 곳. 내가 줄 게 있어야 상대도 움직이는 법이었다.
여자라고, 어리다고 본인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을 때가 많다는 걸 깨닫고는 팔랑거리는 플레어스커트 말고 각이 딱 떨어지는 펜슬스커트나 시크한 바지 정장을 입는 등 외모에 변화를 꾀했고, 말투 연구도 디테일하게 했었다.
‘미’ 보단 두 음 낮은 ‘도’톤으로.. ‘어디셔요~?’ 보다는 ‘어디십니까!’로... ‘다,나,까’로 말에 격을 갖추어야 상대도 내게 공적으로 대해준다는 것도 알았고, 전투 상황을 대비해 집에서 혼자 거울 보면서 쌍욕 연습도 했다.
지금의 예진의 모습은 그렇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예진이기에 막 입사한 초롱초롱한 신입 후배들에게 강한 어조로 얘기한다.
‘피디가 마지막 순간까지 잊으면 안되는 게 뭘까? 편집실력? 인맥? 시청률? 다 필요없어. 뒤끝이야. 피디는 뒤끝이 있어야 돼.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생기지. 그때마다 모두 이길 순 없어. 뻔히 내가 맞는데도 질 수밖에 없는 억울한 게임들만 계속해야 할 때도 있지. 그때 이걸 기억해야 해. 이런 상황, 나중에 또 온다는 걸! 여기서 만나는 매니저,작가,연예인 등등.. 언젠가는 다른 프로그램에서 꼭 다시 만나. 내가 실수하건 그들이 실수하건 이런 똑같은 상황 또 온다고. 그때 잊지 말고 있다가 꼭 갚아줄 수 있어야, 피디에게 힘이 생겨. 갑질만 하라는 게 아니야. 도움 받은 사람들 기억했다가 신세 갚는 것도 포함이야. 그래야 그걸 보고 사람들이 나랑 같이 일을 하려고 해. 시청률? 그건 변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지.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나랑 일을 하려고 하진 않아.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갚아줄 수 있는 피디랑.. 사람들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거지.”
카리스마 쩌는 예진의 ‘뒤끝론’에 신입들은 깊이 감명을 받았는데, 훗..하며 일어나던 예진은 배낭끈이 의자에 걸려 그대로 주저앉혀진다.
똑똑하고 도도한 말투가 무색하게 종종 의도치 않은 몸개그를 선보이는 허당.
내쳐지고 소외되던 과거가 있어선지 현재 소유한 작은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유치한 면도 있다. 가오 빠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 국장 아니라 본부장 앞에서도 지 할 소리 다 하는 똑순이지만, 유독 약한 게 금전 문제다.
돌아보면... 경민네 아버지의 꼬임(?)에 예진 아버지가 넘어가 광주 충장로에 감자탕집을 개업하면서부터 예진의 인생이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나주 배밭 절반은 느네 외갓집 거였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오신 예진모는 경민모가 감자탕집에 들어간 투자금 돌려달라면서 자존심 긁는 소리하는 것에 확 열이 받아 과천 아파트 분양권을 넘기고 말았고. 그후 경민네가 잠실과 분당을 거쳐 반포에 육십평인지 칠십평짜리 삐까뻔쩍한 대형 아파트에 정착하는 동안.. 내내 후회하고 있다. 경민 아버지가 술만 먹으면 예진 아버지에게 전화해 미안하다..고 하는데. 예진모는 그게 더 꼴보기 싫다. 웬수같은 감자탕집은 누구 사겠단 사람도 없어 팔 수도 없는데 그냥 딱 망하지만 않을 정도의 수익을 내며 유지가 되고 있는 상황.
집안 사정이 그렇다 보니 서울로 유학 오는 순간부터 예진은 온갖 알바를 해가며 등록금 내고 하숙비 내고 해야 했다. 그래서 아끼는 게 오랜 습관. 지갑 열면 온갖 할인 카드 포인트 카드가 착착 꽂혀 있고. 토익 980점의 영어실력으로 해외 직구 사이트 매뉴얼 쫙 꿰차고 이쁜 옷 가장 싸게 사는 덴 선수.
월급을 쪼개 분산투자해가면서 이래저래 자금을 굴리고 있는 상황인데 열정과 달리 재테크에 큰 재주는 없는 모양. 펀드가 붐일 때 차이나, 브릭스, 인디아, 럭셔리.. 벼라별 펀드에 돈을 나누어 넣었지만 결과는 마이너스 15%... 부동산으로 한큐에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파트 분양에 도전했고, 4개월 후면 입주다. 이 스물 두평 김포아파트야말로 예진 직장생활 10년의 결실이자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돼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미분양이란다.
뭐 그렇지만 어쨌든 내 이름의 아파트가 생긴다. 단, 전세 빼야 하는 타이밍과 입주 시기가 안맞아 넉달이 빈다. 어디 짐 맡길 데도 애매하고 월세 살기도 아깝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경민이 혼자 살고 있는 여의도 아파트에 잠시 얹히기로 했다. 우리 엄마 말대로 어쩌면 이 집에 절반 정도의 소유권은 우리한테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법적으로 말고 도의적으로.
어쨌든 절대로 안된다던 라경민을 말빨로 확 눌러주고 일방적으로 이사했다.
신촌에서 의대 다니는 남동생 예준이도 함께.
그런데 같이 살다 보니 안그래도 거슬리던 경민의 양다리 세다리가 더 거슬린다. 여자 만나러 가서 안들어오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티비 틀어놓고 시계를 자꾸 쳐다보게 되고. 볼일보고 변기 뚜껑 좀 내리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안들어쳐먹을땐 저런 거 누가 데려갈까 불쌍하다! 하다가도 술먹고 떡이 돼서 빌빌대고 있을 땐 꿀물 타서 억지로 고개 들어가며 멕인다. 먹고 나서 아..속쓰려..하며 인상을 쓰는 경민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비슷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다. 이상하게 내 속도 쓰린 것 같아서.
이 인간이 검사랑 잘해보겠다고 난리를 칠 때.. 왠지 불안하던 마음은 혹시라도 약속된 넉달이 채 되기도 전에 결혼한다고 방 빼랄까봐? 단지 그것 뿐???
얼마 뒤 경민이 그 여검사가 변호사 개업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헤어졌다고 무심히 말했을 때 ‘으이구 속물아!’ 하면서도 너무너무 기쁘던 그 마음은... 단지 그것 뿐...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 취미는 WII 게임하기. 집에서 경민과 WII 권투 게임을 하는데 실제처럼 격렬하게 싸우는 게 가관이다.
공대길(27세) - (KBS 예능국 신입 피디)
“검사도, 의사도, 변호사도 아니지만... 프.로.듀.사.잖아요 아버지”
2015년에 KBS에 입사한 신입 피디.
대한민국의 88년생 중에 ‘대길’이란 이름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대통령을 꿈꿨지만 부구청장으로 정치인생을 마감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지역구 내 고아원이며 양로원 봉사활동만 하다 청춘 다 보낸 어머니, 그 사이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태몽이 대박이라 하여 대길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그 태몽이란.. 이순신 장군인지 강감찬 장군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어마무시한 장군이 큰 칼을 휘두르며 천하를 호령하는 꿈이었으니, 아버지는 대길이 커서 ‘칼로서 세상을 호령하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수술로 사람 생명 구하는 의사랄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검사랄지.. 어쨌든 ‘사’짜 직업.
대길이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을 때 이거 보라며 내 말 맞지 않느냐며 좋아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앞에서 어느 날 대길이 어렵게 선언했다.
‘아버지. 저는 피디가 될래요. 아버지 원하시는 의사도 검사도 아니지만.. 프로듀...사...도 칼 써요. 현장에서 캇트...하잖아요.’
1박 2일은 아직도 나영석 피디가 하고 있는 줄 알 정도로 트렌드에 뒤처지는 대길이 급작스레 검사에서 피디로 진로를 전향한 것은 오로지 러브, 여자 때문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모범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대길은 한눈에 반했지만 고백 한번 못해본 서클 선배, 혜주가 졸업 후 KBS 예능국에 입사하자.. 굳은 마음 먹고 방송국으로 찾아갔었다.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그런데 혜주는 대길이 언론고시 정보를 알고 싶어 찾아온 걸로 오해하고 각종 자료와 정보를 넘겨주며 따뜻한 눈웃음과 격려의 말까지 건넸다.
‘딴 데 가지 말고 꼭 KBS로 와. 나 있는 예능국. 나... 너 기다린다!!
그날로 대길의 꿈은 피디가 되어버렸다.
딴 데 말고 KBS.. 혜주가 있는 예능국..에 들어가는 것.
그리고 약 1년을 열심히 공부한 끝에 드디어 KBS에 시험을 보게 되었다며... 그러므로 저는 꼭 여기 붙어야 한다며.... 대길이 면접관들 앞에서 구구절절 KBS 지원 동기를 얘기했을 때 면접관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 쟤는 왜 저렇게 말이 길어? /그르게... 1차 2차 다 지가 수석인데... 지 아니면 누굴 붙인다고... /애가.. 머리는 좋은데 눈치가 없는 거 아냐?
머리는 좋은데 눈치가 좀 없는 대길은 첫 출근 날에야 알게 됐다.
혜주는 올가을 결혼날짜 받아놨다는 거. 그녀는 작년에 이미 입사동기 아나운서랑 썸 타던 사이였다는 거. 서클 친구들 다 알았는데 대길만 열공하느라 핸드폰 끊고 살아 몰랐다는 거.
그렇게 허무하게 사랑은 가고... 대길 앞에 전쟁통 같은 예능국이 왔다.
그런 사람들만 뽑는 건지, 여기 오면 다 그런 사람들이 되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길의 눈에 비친 예능국엔 정상이 별로 없다.
‘내탓 니덕’이라고 크게 써붙여놓고 잘못되면 ‘남의 탓’하고 잘되면 다 ‘자기 덕’이라는 언행불일치의 대마왕 장국장부터 자기가 MBC 무한도전 김태호 피디랑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이름만 김태호CP. 출근한지 두시간만에 니가 출연자들에게 하차 통보를 하라는 1박2일 메인피디 경민. 내차에 문콕해놓고 수리비 물어주게 되자 이름이 대길이 뭐냐며 대가리냐며 초딩 저리가라 할 유치함으로 장난 아니게 갈구는 뒤끝작렬 예진. 전화하면 항상 마포대교 건너는 중이라고만 하고 얼굴 한번을 보여준 적 없는 메인작가에 뭔 말만 하면 정규직인 피디들이 뭘 아냐며 지금 너까지 갑질하냐면서 날카롭게 나오는 피해의식 갑인 서브작가에. 순진한 척 하면서 틈만 나면 끼부리는 막내 작가까지.
이곳은 ‘고학력 병신들의 집합소’ 같기도 하다.
여의도라는 이상한 토끼굴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랄까.
기본적으로 말을 좀 더듬거나 주저주저하거나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어쨌든 결론적으론 본인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달하는 편이라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캐릭터.
출근하고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주변의 모든 선배들에게 찍혀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다만, 모든 게 기-승-전-서울대이며 서울대 머그컵만 사용하는 국장만이 자기 후배라며 가끔 아는 척 해주는데. 오히려 너 벌써 국장라인 타냐며 미움
대학 때까지 수재 소리 들어가면서 열심히 배워왔던 게 이렇게까지 아무 소용이 없을 줄이야.
그래서 예능을 그야말로 ‘공부’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국사’ 과목 공부하듯이 예능의 역사를 공부한다. 혼자서.
예를 들면 대한민국 바보 캐릭터의 역사를 영구부터 맹구, 칠뜨기, 달인까지 순서대로 다 외우고.. 프로그램 역시 가족오락관부터 해피투게더까지.. 처음 만들어진 해, 첫 엠씨,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게스트 식으로 외우는 것.
그러나 선배들한테 그런 쓸데없는 거 외울 시간에 아이디어 하나를 더 내라고 욕만 더 먹는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의외의 뒤끝이 있다. 좋은거든 나쁜거든 반드시 -사소하게라도- 갚아준다. (예진이 설파한 뒤끝론과도 일맥상통한다/ 단, 복수는 시청자만 알 수 있는 대길만의 흔적으로 보여진다)
혜주 괴롭히던 신디를 목격한 후 신디에게 사소하게 복수를 해주고. 나중에 신디와 친해진 뒤엔 신디 괴롭히는 매니저나 변대표에게 시원하게 갚아주는 식.
조금 쪼잔하고 섬세하며 한발쯤 늦는 그녀들의 키다리 아저씨 스타일이랄까.
대길의 가족은 자주 뭉친다. 아버지가 가족애를 남다르게 생각하시다 보니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늘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
교회 장로님이신 아버지는 성가대원이기도 해서 화음 넣어 부르는 노래를 선호하신다.
각종 찬송가 뿐 아니라 ‘오빠 생각’이랄지 ‘사랑해’랄지... 하는 노래들을 틈만 나면 불러보자고 제안 하시는데. 참고로 ‘오빠 생각’에서 대길이 맡은 파트는 ‘뜸북’이다.
세상에서 대길이 가장 잘난 줄 알고 계시는 부모님은 ‘우리 대길이가 이제 방송국에 들어갔으니 저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여시 같은 여자 연예인들이 우리 대길이한테 푹 빠져가지고 막 들이대고 대시하고 그러면 어쩌냐’시며 걱정이 태산이시다.
그러나 정작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여시 같은 여자 연예인들’은 대길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다. 관심은커녕 신디 같은 애한테 현장에서 개무시 당하기 일쑤.
그러거나 말거나 대길은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했다.
15킬로를 걸어야 하면 정말 15킬로미터 걷게 만들고 삼시세끼 굶는 설정이면 중간에 꼼수 안쓰고 정말 굶게 했다. 신디가 펄펄 뛰든 살살 달래든 다시 돌변해 쌍욕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란 그런 거라고 ‘공부’했기 때문에.
그랬는데 어느날 신디가 그대로 기절했다. 그녀를 응급실로 실어 나르던 중 주머니에서 꼬깃해져서 나온 스케쥴표를 보고 대길은 미안해졌다. 1주일에 5개국 행사를 하고 하루 30분 식사시간을 따로 뺄 수도 없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쥴을 봤기 때문.
실신의 이유도 수면 부족과 영양 실조.
사실을 알고 난 후 대길은 뒤에서 조용히 신디를 많이 챙겨주기 시작했다.
티격태격 하면서도 파트너쉽을 키워가는데.
그러며 한편으론 구박 당하다가 정이 들어 버린 예진을 향한 마음을 키워가게 된다.
그런데.... 신디가 고백을 해온다. 부모님이 그토록 걱정해마지 않으시던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는 날라리 상여시 같은 연예인 가시나’가 대길에게 막... 들이대고 대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디 (23세/ 본명 조인영) - 가수
“나더러 계속 잘나가길 바란다는 게, 무슨 뜻일 것 같니?
안 그럼... 날 밟아버리겠단 얘기야”
13살 때 연습생으로 변엔터에 들어가 10년차 연예인.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23세지만, 스물 다섯이면 명예퇴직한다는 아이돌계의 불문율에 따르자면 그녀의 직업나이는 55세쯤이 아닐까?
막 연습생으로 들어온 열 살짜리 꼬마가 팬이라면서 사인해 달라고 수줍게 종이 내밀면 차갑게 거절한다. 저런 애들이 금방 키 크고 이뻐져서 내 뒤를 치고 올라올 것이라 생각하면 아찔하다.
세상에 절대 공짜는 없고 이 바닥이 얼핏 화려해보이지만 차가워서 편안히 몸 누일 바닥이 절대 아니라는 걸 열다섯 되기 전에 깨달았다.
이유 없는 친절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고, 절대 깊은 정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잘해주다가 뒷통수 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포커페이스의 달인.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얼음공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해왔던 대화란 게.. 틀에 박힌 인터뷰나 변대표와의 가식에 쩔은 대화가 대부분. 그래선지 진심을 전하는 대화를 어떻게 하는 건지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어느 해 신년 특집 예능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유명한 명리학자가 신디의 사주를 이렇게 풀이했었다.
‘실속 있는 실리주의자이면서도 이해타산적인 이기주의자로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은 잘 안하며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강해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특히 윗사람의 충고나 조언을 무시하는 편이라 버릇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겉으론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독종 중 독종. 겉모습에 속으면 안되는 사주 중 단연 최고.’
물론 신디네 회사가 강력하게 거부해서 이 내용이 방송되진 않았다. 하지만 신디 매니저가 남몰래 이 명리학자의 연락처를 알아갔다는 후문.
6학년 때 에버랜드에 소풍갔다가 변대표 눈에 띄어 픽업된 후 신디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부모님과 지낸 시간보다 변대표와 지낸 시간이 더 길다. 영민한 신디는 변대표의 트레이닝을 아주 잘 흡수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최고의 자리에 올라 변대표의 기대에 부응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목격했다. 그 잘 나가던 선배들이 유통기한이랄 수 있는 스물 다섯 지나면서부터 변대표에 의해 어떻게 이용당하고 퇴물이 되어가는지. 그들이 변대표에 의해 무력하게 좌지우지될 수 있었던 것은, 각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치명적인 약점 하나씩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나면 안되는 사람과 연애를 했다던가 가족이 변대표와 채무관계에 있다거나...
그래서 신디는 그 어떤 약점도 만들지 않기 위해 이 악물고 노력했고.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이 지냈다. 혼자 인터넷 강의 들어가며 연극영화과 아닌 부동산학과를 졸업한 후 얼마 전 경영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재테크도 잘해서 가로수길에 건물도 하나 있다.
변대표에게 ‘엄마’라고 부르고 변대표도 신디를 ‘우리딸’이라고 부르지만.. 알고 있다.
변대표는 신디가 어서 한건의 큰 실수를 하길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계약기간 만료는 1년 남았다.
그때까지 그녀는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고 관리 잘 하다가 1인 기획사 차려 나갈 참이다.
변대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녀를 붙잡아 두려 안간힘을 쓰는 한편, 붙잡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어마어마하게 부려먹고 있다. 각종과 행사와 공연 CF 등등의 살인 스케쥴은 웬만한 장정도 소화해내지 못할 정도지만, 신디는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그녀의 계획은 이러하다.
앨범 성공적으로 활동한 후 요즘 대세인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들어가 여태 보여주지 않던 인간적인 모습을 어필한 후 드라마에 픽업되고 연말엔 신인상 받고 내년에 영화 주인공으로 데뷔하면서 화려하게 독립하는 것!
타이밍 맞게 1박 2일이 재정비를 하며 멤버를 전원 새로 셋팅하게 됐다며 컨택이 들어왔고
신디는 변대표가 1박을 제안했을 때 겉으론 싫은 척 했지만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너무 잘되고 있는 프로그램 이어받아봐야 별로 빛이 안난다.
이미 바닥을 친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그걸 살려놔야 그녀의 진가가 빛날 것임을 잘 알기에 한 스마트한 선택이었다.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그녀가 잡은 컨셉은 <얼음공주의 반전>
패셔너블하고 도회적인 그녀가 알고 보니 ‘울보에 털털한 허당 귀요미’라는 점을 반전 카드로 사용할 작정이다. 예전에 패밀리가 떴다에서 효리언니가 섹시녀에서 국민 호감으로 변신하면서 스타로서의 제2막을 열었던 것처럼.
패떴을 다시 모니터하며 포인트를 분석해 논문 쓰듯이 플랜을 짜는 철두철미한 그녀.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현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암초를 만나게 된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하던 새파란 신입 피디, 대길.
갓 들어온 조연출이라니 처음엔 엄청 개무시하면서 머슴 취급했는데 이 인간.. 은근 녹록치 않다.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안되는 건 끝까지 안된단다. 카메라로 찍고 있으니 욕도 못하겠고 결국은 시키는대로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나한테 삐져서 그런가 싶어서 광고주 앞에서도 잘 안 부리는 필살 애교도 부려보고 해외 다녀오며 사온 거라고 향수도 건네줘봤지만 자긴 향수 안쓴단다. 오마이갓. 안 먹히는 것이다. 내 애교가. 이놈 뭐지? 열받는다.
어쩔 수 없이 15킬로미터씩 산길도 걷고 쫄쫄 굶어가면서 미션 완수해서 겨우 군고구마 하나 얻어먹고 했다. 미워 죽겠는데 뭐라고도 못하겠는 것이... 자기가 걸을 때 대길도 스텝 차 안 타고 함께 걷고. 자기가 굶을 때 대길도 아무 것도 안먹고 카메라를 내려놓질 않는 것.
무리한 스케쥴 끝에 1박 촬영 왔다가 기절하고 말았을 때... 대길의 등에 업혀 가는데.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대길에게서 아련하게 좋은 향기가 나는 걸 느꼈다.
이상하다. 이 인간.. 향수도 안 쓴다 그랬는데...
대길이 좋아진 이후. 그의 눈빛이 예진에게 가 있다는 걸 깨닫고. 안 그래도 나빴던 예진과의 사이에서 불꽃이 튄다. 사사건건 예진을 엿먹이는 걸로 대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예진이 대길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도 열받지만, 예진이 대길의 마음을 알까봐 두렵기도 하다.
김태호 (45세) - 예능국 CP
“대한민국 방송판엔 두명의 김태호가 있어. M의 김태호와 K의 김태호.
예능국의 양대산맥. 근데 내가 선배야. 내가 먼저라고”
예능국엔 ‘삼심’이 있다. 야심,근심,점심.
그 중 태호는 ‘점심’을 담당하고 있다.
회사 생활 중 가장 중요한 건 점심이라고 생각한다.
법인카드로 누구와 어디서 뭘 먹을지가 가장 큰 즐거움이며 관건.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건 개소리고 그래도 피할 수 있을 때까진 피해야 한다는 게 삶의 지론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 여기저기에 핫라인이 있고. 늘 거느리는 매니저들이 있다. 전화해서 바로바로 나와주는 매니저의 숫자가 현재 자신의 위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안나오면 엄청 삐진다.
자신을 잘 모르는 매니저에게 전화해서 ‘나 김태호 피딘데...’ 라고 해서 상대는 무한도전 김태호 피딘 줄 알고 나왔다가 급실망하는 웃지못할 상황도 있었다.
거물급 스타피디와 이름이 같으면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게 없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뽑은 존경하는 피디 1위가 김태호 피디라는 뉴스를 보고 엄청 기뻐한다. 누가 봐도 그건 M의 김태혼데 혼자만 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야.. 대학생 애들이 나를 가장 존경한다네? 나영석이나 서수민이보다 내가 위야! 이게 수치상으로 딱 증명이 되잖아!’
나중에 본인은 후보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가 안나대고 묵묵히 일하는 스타일이라... 난 피디가 인기투표로 평가받을 수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해...’ 라며 갑자기 후보에 오른 피디들을 한낱 나대는 피디들로 까내려 버린다. 그럴 땐 언어의 마법사가 따로 없다.
생색내기의 일인자.
나쁜 일, 힘든 일이 벌어지는 곳에서 태호의 자취를 찾기는 어렵지만, 좋은 일이다 싶은 곳엔 언제나 태호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다.
‘그래서 그때 그 장소 누가 해줬니!’ ‘내가 그때 걔 대박날 거라고 찍어줬니 안찍어줬니!!’ ‘이렇게까지 해주는 CP가 대한민국에 어딨니!!!’ 라며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다 끌어다가 생색을 낸다. 그럴 때 그는 ‘민망함’이란 감정 자체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외벌이 가장이라서 늘 돈을 아낀다. 법인 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팁을 누구보다 많이 안다. 일요일에도 여의도 근처 뷔페 아닌 고깃집 같은 데 (뷔페는 영수증에 대인 소인이 구별돼 찍히니까) 가족들을 끌고 와 밥을 먹는다.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 학비다. 목동 사는데 사교육비가 장난이 아니다. 영어만 해서도 안되고 요샌 중국어도 해야 한다 그러고. 피아노며 바이올린 같은 악기도 해야 한다 그러고. 또 남의 집 애들은 건강과 성장을 생각해서 승마며 발레스트레칭 같은 것까지 한다는데. 피디 월급 빤한데다 장남이라 부모님 생활비까지 지원해 드려야 해서 답이 안나온다.
그래서 머리 굴리다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중학생 딸을 아이돌 연습생으로 키워야겠다는 것! 요즘 대형 매니지먼트사들은 연습생들한테 영어는 기본, 중국어 일본어도 가르치고 각종 악기와 댄스 수업에 작곡까지 가르쳐준다니.. 공짜로 과외시키는 데 이만한 데가 없다.
그래서 아는 매니저들에게 본인 딸 사진을 보여주는데.. 모두가 당황해한다.
태호는 ‘얘가 얼핏 쌍거풀 없어서 눈이 작아보이고 콧등이 동그래서 코가 낮아 뵈지만 이런 게 글로벌한 페이스다. 한국의 뮬란으로 홍보하면 북미나 유럽쪽에선 분명히 먹힌다’고 어필해보지만 매니저들은 그 말씀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확답을 안주고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기만 한다.
김홍순 (36세) - 열린음악회 피디
“아유 청주면 저희 집 가는 길인데 제가 국장님 모시겠습니다.
저희집이요?.... 일산인데. 청주에서 일산이면... 가는길이죠!”
예능국엔 삼심이 있다. 야심,소심,점심.
홍순은 그 중 ‘야심’을 담당하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뚜렷하다. 승승장구하는 거. 국장되는 거. 나아가선 본부장도 되는 거.
프로그램엔 그닥 욕심 없다. 의전으로 승부 보고 싶다.
여태는 그게 통했다.
<비타민> 피디 하면서 알게 된 온갖 분야의 전문의 라인들을 활용, 본부장님 모친 대장암 수술하실 때도 前국장님 사모님 디스크 수술하실 때도 병원측과의 윗분들 사이에서 오작교 역할을 십분 해냈고.
의전 중 친밀도 높이기엔 최고라는 스포츠 의전에도 적극 참여했다. 등산, 골프, 낚시, 자전거, 마라톤까지.. 매주 규칙적으로 윗분들의 취미 생활에 동참하다 보니 저절로 건강이 단련돼 현재의 몸짱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런데 운명의 사건은 1년 전 국장이 바뀌던 시점에 일어났다. 당시 상황은 구국장이 지방사 사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고 민부장과 장부장이 유력한 국장 후보로 떠오르며 예능국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대혼란에 빠졌던 시점. 민과 장의 캠프가 서로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전을 펼치며 예민하게 대치하고 있던 그때.
홍순은 그 두 분 중 어느 한 분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며 줄타기를 아주 능숙능란하게 하는 노련함을 보여.. ‘조조 뺨칠 홍순’이라는 평을 얻고 있었는데.
운명의 인사발표일을 코앞에 둔 금요일 저녁.
장부장과 민부장은 동시에 술자리를 제안했다. 장부장은 여의도 비봉에서.. 민부장은 이사 집들이를 한다면서 중랑천 아파트에서.
그리고 홍수는 핫라인을 통해 첩보를 듣게 된다.
‘민’으로 결정이 났다는 것!!!
홍순은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고 느끼며 언제 도착하냐는 장부장의 전화를 냉정히 거절한 채 민부장 아파트로 질주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주차장에서 자리를 찾고 있는데 하나 남은 자리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태호의 차가 보였고. 홍순은 재빨리 그 자리에 차를 박아넣었다.
창문을 열고.. 야! 그 자리 내가 찜한거야!! 어쩌고 하는 태호를 모른 척 하고 난화분을 소중히 안고 잰걸음으로 민부장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그때 주차장을 헤매던 태호는 연락을 받게 된 것! 민이 아니라 장이라고...
태호가 미친듯이 차를 돌려 여의도 비봉으로 향할 때 홍순은 민부장네 벽에 못박아주고 그림 걸어주고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환장할 노릇이다.
그렇게 ‘장’이 집권한 후 홍순의 암흑기는 시작됐다.
의전할 때는 몸을 사리지 않고 비오는 날 등산도 마다치 않는 홍순이지만, 프로그램은 무조건 셋트녹화 같은 편한 걸 선호하는 그인데.. 그런 그를 빤히 아는 장부장은 홍순에게 천금같은 <비타민>을 빼앗고 개고생만 하고 생색은 잘 안나는 프로그램인 <열린음악회>를 던져준 것이다.
그덕에 매주 지방 녹화에 야외대형공연에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떠맡게 된 홍순은 죽을 지경. 호시탐탐 다시 비타민으로 복귀할 그날만을 꿈꾸며 장국장에게 온갖 알랑방구를 다 뀐다.
산행 좋아하는 장국장 따라 매주 인왕산 북한산 오르는 건 기본.. 국장이 청주 성모병원 장례식장 간다고 하면 어차피 가는 길이라면서 데려다주겠다고 나선다. 홍순의 집은 일산인데 말이다.
장국장의 늦둥이 초딩딸 안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 큰 덩치로 세시간씩 레고 조립을 해가며 귀염도 떨어보지만, 한번 쫓겨난 장국장의 마음 속으로 재진입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엑스와이프는 딸을 데리고 미국에 가 박사 학위 밟고 있고. 월급의 반 이상을 미국에 보내고 있다. 아내를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빨리 부장되고 국장되고 계속 더 잘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장 딸 레고 조립해주다보면 얼굴본지 3년이 되어가는 내 딸 서영이가 보고 싶어 울컥할 때가 있다.
류일용 (29세) - 1박2일 조연출
“피디에게 가장 중요한 거? 당근.. 시간외 수당이지.
제때 입력을 해야 해. 5일 지나면 날아가 버린다구.”
예능국엔 삼심이 있다. 야심,근심,점심.
일용은 그 중 ‘근심’을 담당하고 있다.
늘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근심 어린 표정이라 주변까지 어둡게 만든다.
원래 잘나가는 프로그램 조연출보다 못나가는 프로그램 조연출이 더 괴롭다. 왜냐면 뭐가 잘 안되니까 이것도 했다 저것도 했다... 뭔가 시도해 보는 게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거 시도할 때 가장 죽어나는 게 조연출이다.
틈만 나면 엎어져 잔다. 혹한기 야외촬영 때도 기댈 데만 있으면 존다. 늘 비몽사몽간에 기계적으로 편집을 한다. 만성피로로 간도 안좋고, 간이 안좋으니 눈도 안좋고, 수전증도 있다.
계속되는 편집 탓인지 가는 귀까지 먹어서 자꾸 사오정 시바이를 친다.
‘있다 치고...’가... ‘입닥치고’인 줄 알고 회의 시간 내내 우울하게 한마디도 안하고 있는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건의 전개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편집 다시 해야 돼요?’를 묻는다.
한 기수 후배인 형근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며 지 실속 다 챙기고 일주일에 두번 국제대학원도 착실히 다니고 있는데 일용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을 다 해낸다.
그러니 자꾸 더 시킨다.
충남 부여 출신으로 농사 짓는 집안의 장손이라 딱 봐도 힘 좋고 일잘하게 생겨서 뽑혔다.
들어와서부터 힘들어 죽어나는 프로그램만 돌고 있다.
게다가 스물다섯에 부모님이 권하는 아가씨와 결혼해 벌써 애가 둘인데. 아내는 만삭이다.
집에 갈 틈도 별로 없는데 언제 그렇게 애를 만드는지 미스테리다.
집에 갈때마다 ‘제발 잠만 자고 오라’고 경민이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어느 틈에 또 셋째를 만들었다.
이제 곧 삼둥이 아빠라 돈 들 일이 한두푼이 아니다. 늘 예능국 여기저기를 하이에나처럼 돌아다니면서 소품으로 쓰고 남은 자전거랄지 유모차나 기저귀 같은 것들을 모은다. ‘이거 버릴거에요?’가 단골멘트.
그렇게 골골대면서 엎어져 자다가도 집에 가져갈 무언가가 포착되면 매의 시력, 늑대의 청력,순간이동 능력까지 발휘돼 잽싸게 챙긴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오고 있어 요즘 늘 불안초조하고 전화 소리에 깜짝깜짝 놀란다.
장인표 (55세) - 예능국장
“니 탓! 내 덕!”
장부장이 장국장이 되어 국장실로 들어서던 그날. 액자를 걸었다.
거기엔 ‘내 탓 니 덕’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제 예능국의 왕좌에 앉았으니 겸허한 자세로 안되는 건 내 탓 잘되는 건 니 덕이라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늘 얘길하다 보면 ‘그러게 니가 좀 잘하지 그랬니’가 결론이 된다.
유머일번지 시절에 입사를 해서 그야말로 ‘피디의 전성시대’를 보냈다.
시청률이 20이면 망했다고 혼나던 시절. 가요톱텐 피디가 대통령보다 권력이 있던 시절.
그래서 자꾸 옛날 얘기를 한다.
장국장에게 대박 프로그램이란 딱 두가지로 나뉜다.
‘옛날에 내가 만들어서 대박 난 거’랑 ‘요새 애들이 내꺼 우라까이해 대박 난 거’
아빠 어디가..도 런닝맨도 무한도전도 꽃보다 청춘도 K팝스타도 모두 80년대 90년대 본인이 다 했던 것들을 이제 와서 비슷하게 만들어 대박들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땐 말이지. 일요일 아침에 명랑운동회.. 응? 딱... 변웅전... 응? 그때 배일호가 플로어 엠씨보고 그랬다고. 배일호. 신토불이배일호. 응? 청팀 백팀 따악 나눠가지고.. 오재미 던지기.. 응? 딱... 박 터지면.. 꽃가루 쫙..날리고.. 그럼 시청률이 똭.. 삼십.. 응?’
그래서 오재미 던지기를 하라는건지.. 이제 와서 변웅전씨를 엠씨로 쓰라는건지.. 알 수가 없다.모든 회의가 기-승-전-자기 옛날 자랑이다.
누구도 자기랑 친했고 누구는 자기가 키웠고...도 단골 레퍼토리.
이수만 회장도 자기와 아주 친하고 SM 만든 것도 다 자기 조언을 따른거라고 하는데. 막상 전화기에 남아있는 이수만 회장 번호는 영영 사라진 017로 시작하는 번호.
국장되기 전 자기와 라이벌 관계였던 민부장 캠프에 누구누구 가 있었나를 아주 그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거랑 이거랑은 아무 관련 없는 결정이라지만 누가봐도 그거랑 관련 있는 결정들이 엄청 많다.
늦둥이 초딩 딸에 꼼짝을 못하고. 딸의 모니터를 대한민국 시청자 모두의 의견처럼 받아들인다. 본인이 서울대 나온 것을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해 ‘그 친구가 나랑 동문인 서울대여서가 아니라...’ 라는 식의 말투로 그 사실을 강조한다. 전용 머그컵도 <서울대학교 동문회>가 찍힌 것만 쓰고. 동문회보도 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해 둔다.
이 나이 되면 혼도 안날 줄 알았고 국장 되면 누구 눈치 볼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사장한테 엄청 깨지고 위로 아래로 눈치 볼일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 가끔 짜증난다.
고양미 (나이 미상) - 행정반 직원
“얘. 물어보지 말고 갖다 놓고 싶으면 갖다 놔.”
KBS 예능국 내 사무 비품 카르텔의 우두머리.
일명 A4지의 여왕이며 토너의 여신. 예능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
뛰어난 미모와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소유자.
국장실 바로 앞에 위치한 행정실에 근무하며 일반 피디들은 꿈도 못꿀 정도로 국장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다. 예능국의 속속들이 사정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업무 분장 및 프로그램의 신설,폐지 등에 관한 소식도 예능국 그 누구보다 더 먼저 알고 있다.
월급에 대한 행정업무부터 사무용품 관리까지 예능국에서 뭔가 필요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예능국의 숨겨진 실세다.
사무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A4지와 프린터 잉크 공급의 실권자인 관계로 아침마다 행정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예능국 막내 작가들이 올려놓는 조공음료수와 간식거리가 가득하다. 그녀의 취향을 잘 맞추느냐 못 맞추느냐로.. 그 작가가 감이 있나 없나를 판단한다.
꽤 오래전부터 행정반에 근무했지만 나이도 고향도 출신학교도 알려진 게 없어 소문도 많이 따른다. 사장 처조카라는 둥 임직원의 숨겨진 애인이라는 둥. 소문에 대해 속시원하게 진상을 밝히진 않지만, 안좋은 소문의 근원지는 끝까지 추적해서 응징한다.
안그래 보이는데 유창한 고급영어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이 목격되면서 도대체 뭐하던 여잘까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키운다.
국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홍순이 어떻게든 친해져보려고 접근하는데 대놓고 개무시해서 앙숙 관계가 된다. 홍순네 팀이 올리는 영수증을 가장 늦게 처리해주거나 비품을 안주는 식으로 괴롭히면 홍순이 뒤에서 뒷담화하거나 나쁜 소문을 내는 식으로 반격하고. 그러면서 점점 얽히는 일이 많아지는 두 사람.
변미숙 (41세) - 변 엔터 대표
“어머니. 물 들어올 때 노 저으세요.
신디 저렇게 이쁜 거, 몇 년이나 남았을 것 같으세요?”
엔터계의 마녀. 신디네 회사인 변 엔터 대표.
아이돌 키워서 그중 될성 부른 아이들은 일찌감치 배우 수업 시키다가 그 아이가 주연급 배우가 되면 그 아랫급 신인 끼워팔기해서 또 키우고. 신인이 스타가 되고 스타가 퇴물이 되면 그 반대로 끼워팔기하고 그래도 안되면 홈쇼핑으로 돌리고. 그것도 안되면 대부광고 시키고. 그렇게 뽕을 뽑는 이 시스템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운용할 줄 안다.
자식 연예인 만들고 싶어하는 엄마 마음 쥐었다 놨다 하기 선수.
누구 하나 ‘물건’이다 싶은 아이가 변대표 눈에 들어왔을 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절대 놓치지 않는다.
신디 때가 그랬다. 우리애 연예인 시킬 생각 없다는 신디 엄마에게... ‘어머니 마음 잘 알겠어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게요.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온천이나 같이 가요. 친구랑 가기로 했던 게 펑크가 나서... 예약 취소도 안된다 그러구.... 그냥 날리긴 아까우니까.. ’라고 하고선 신디모를 일본 어느 고급 료칸에 데려갔다. 그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신디모에게 보여주었다.
돈맛이 뭔지.
한번 비즈니스 타기 시작하면 이코노미 못타는 법. 서른평 살다 오십평은 살아도 오십평 살다 서른평으론 못 돌아간다. 돈의 노예란 게.. 되고 싶어 되는 사람 없다. 돈맛을 보기 시작하면 자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새 그 맛에 중독이 되어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변대표는 모든 인간의 그런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잘 이용한다.
회사에 걸려있는 소송이 칠십건인지 팔십건인지 그렇다. 저쪽에서 걸어온 것도 있고 이쪽에서 건 것도 있다. 웬만한 로펌 변호사쯤은 가르칠 정도의 법률 지식이 있다.
최근엔 드라마와 예능 쪽 제작에도 슬슬 참여하기 시작했다. 급이 되는 아이들 섭외 들어오면 공동제작 미끼부터 던지고 있다.
국장이든 본부장과 접촉할 때도.. 절대 자기가 을이란 생각 안한다.
‘그 자리 언제까지 계실 것 같으세요? 끽해야 오십구세 정년이신데.. 저랑 좋은 관계 유지하시다가 저희 회사 오시면 좀 좋아요? 지금 받으시는 거 3배 드릴게’ 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은 나쁜데 묘하게 틀린 말이 없어서 뭐라 하기가 애매하다.
독종에 상종하기 싫은 여자인건 분명하지만 적으로 돌리면 큰일날 것 같은 포스가 있다.
소속 가수나 배우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뼛속까지 쪽쪽 빨아먹긴 하지만 자기 새끼 공격하는 외부 세력에 대한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자든 방송국 사장이든 아무 상관 없이 눈이 뒤집힌다.
방향이 잘못됐으나 그것도 애정이라면 애정인 셈.
쌍욕은 기본.. 실제로 국장실에 드러누운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자기 배우한테 함부로 했다고 현장 쫓아와서 연출 뺨을 때린 사건도 두고두고 전설로 회자된다. 그 사건 이후 방송3사 출입금지를 당했고 모두들 변대표는 끝났다고 했지만 쓸만한 애들이 모두 그 회사에 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방송국에서 한수 접고 들어왔고. 변대표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졌다.
신디를 보면 가끔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짠해질 때도 있지만. 그건 그거고.
그녀의 척수에 빨대를 꽂고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빨아들이는 짓을 멈추진 않는다.
방금까지 누구 하나 매장시켜 죽이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가 인간 극장 같은 걸 보면서 눈물을 흘려 주변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스물에 여배우 코디 보조로 이 바닥에 들어와 정말 벼라별 꼴 다 겪으며 이 자리까지 왔고.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걸 이뤘으니 행복해야 하는데. 왜 계속 갈증만 나는지 모르겠다.
그 갈증을 식히려고 계속.. 돌진한다.
최작가 (41세) - 1박 2일 메인작가
“어. 지금 마포대교 건너고 있어!”
늘 오디오로만 등장하는 메인 작가.
회의에 온다고만 하고 오지를 않아서 전화를 하면 늘 ‘다 왔다. 마포대교 건너고 있다’고 얘기한다. 아주 급할 땐 전화로만 회의를 진행한다.
경민 입장에선 당장 짤라버리고 싶은데 그나마 그 전화통화에서 쓸 만한 아이디어를 건지기 때문에 짜르지도 못한다.
얼마나 프로그램을 많이 하는지 원고료가 주천(주에 천만원)이란 얘기가 있다. 방송3사와 종편 케이블까지 합쳐 정확히 몇 개의 프로그램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별명이 감자뿌리다. 캐도캐도 프로그램이 계속 나온다 하여.
별 희한한 방송 스크롤에 이름이 다 올라가는데. 가끔 말도 안되는 교양 프로그램에도 이름이 올라가서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손지연 (32세) - 1박 2일 서브작가
“우리는요? 가는 거 맞아요? 그걸 알아야 회의건 나발이건 하지..”
7년차 구성작가.
나도 이대 나온 여잔데 개편 때만 되면 자존심 상해 죽겠다. 피디 작가 다같이 못해 프로그램 없어져도 월급 받는 피디는 그냥 기분 좀 나쁘고 말면 되지만 작가는 밥줄이 끊긴다. 그런데도 피디들은 우리 프로그램 없어진단 소식을 작가에게 맨 나중에 전해준다. 미리 얘기해주면 다른 프로그램 알아보느라 마무리 제대로 안할까봐서...란다.
막내작가 시절엔 자기 짤리는 줄도 모르고 마지막주까지 노예처럼 일해주다가 울면서 짐 싼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1,2년차땐 지금 하는 프로그램에 애정을 다 쏟고 충성을 다하는 순둥이였지만 냉엄한 방송국 개편을 몇 번 거치면서 깍쟁이 중 깍쟁이가 되었다. 페이 협상 끝나기 전엔 기획회의 안하고 프로그램 시청률이 왠지 시원찮다 싶으면 여기저기 전화 돌린다.
“일 잘하고 성격 좋은 7년차 작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재산 목록 1호는 10년째 써온 011 전화번호이며, 그 외에도 전화기 한 개가 더 있다.
늘 전화기 두 대가 양손에 들려있으며 늘 누군가와 통화중이다.
방송 3사와 케이블, 종편의 예능 프로그램의 내부 상황과 출연자 근황까지 줄줄이 꿰고 있고 그 안에서 떠도는 소문들도 가장 먼저 알고 있다. 연예인 누구랑 누가 사귄다더라..같은 소문을 본인이 1빠로 알지 못할 때 되게 자존심 상해한다.
왕민정 (23세) - 1박 2일 막내작가
“메인작가님요? 지금 안계신데... 그 인터뷰 제가 하면 안될까요?”
눈치 없어 보이게 툭하면 잘 울고
그래서 얼핏 막내작가스럽게 순진무구한 캐릭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전이 있는 여자.
예능작가계는 라인 잘 타는 게 장땡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닫고 잘나가는 선배, 퇴물 선배를 명확히 구분한다.
방송국에 잘 오지 않는 메인작가를 찾는 전화가 오면 나도 일박이일 작가라는 점과 나도 그 인터뷰 할 수 있다는 점..등을 강조한다. 심지어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왔는데 본인이 갔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할머니들 1박 2일할 땐 바지만 입고 다니더니 아이돌들이 현장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미니스커트를 입기 시작하는 한편... 이름은 촌빨 날리지만 볼수록 훈남인 대길에게 은근 끼를 부리기도 한다.
공보선 (67세) - 대길 부
“내가 공직자 생활을 너무 청렴하게 하다 보니 큰 재산도 없고,
또 오랫동안 지지해 온 정당에서 공천도 떨어지니 너희들한테까지
이런 괄시를 받는거고...”
구청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다가 입지전적으로 부구청장까지 되며 공무원밥만 43년을 먹었다. 부구청장 시절에 윗선의 비리로 단 두달 동안 ‘임시 구청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본 정치와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하고 퇴임 후 여의도에 이사까지 오며 국회의사당 입성을 엿보는 중이다. 그러나 출마는 커녕 공천 받는 거 자체가 힘들다.
빛나는 인생 이모작을 이루고자 이런 저런 노력들을 한다. <바른 아버지 모임>이라는 사조직을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등산을 가거나 베드민턴을 치거나 합창단을 꾸리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경비아저씨나 동네 주민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눈이 오거나 낙엽이 떨어질 때 엄청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가면서 아파트 앞마당을 빗자루질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의도 행복론 - 행복한 가장이 행복한 정치를 합니다>라는 딱히 출판의 기약이 없는 단행본을 집필중이다.
그런 와중에 둘째 아들 대길이가 여의도 KBS 피디로 당당히 입사하자 마음이 벅차다. 아울러 향후 아버지의 사회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어줄거라 믿는다. 아들이 연수 때 입은 KBS 마크 찍은 잠바를 굳이 입고 동네 조깅을 하시다가 동네 사람들이 마크를 알아보고 한마디씩 하면 그게 그렇게 즐겁다. 시청률 올려준다고 (소용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하루 종일 KBS만 틀어놓는데 시청자 모니터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열정적으로 응모하여 합격하게 된다. 원래는 예능 프로그램에 엄중한 잣대를 가지고 있었고 저런 몹쓸 코미디가 이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주의였는데 아들이 예능국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눈에 띄게 관대해졌을 뿐 아니라 아들의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변명도 하고 쉴드도 쳐주고 그런다.
기타 사항으로는 알아서 잘 놀고 있는 식구들에게 ‘가족의 화목’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거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윷놀이 한판’을 제안했다가 까이고는 지레 삐지곤 한다. 뭔가 마음에 안들면 장탄식을 한다.
이후남 (61세) - 대길 모
“과천 땅값 오를 걸 모르고 니 아버지 말 듣고
인덕원으로 이사 갔던 게 참 천추의 한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30년 근속했는데 남들은 교감 교장 될 나이에 그냥 평교사.
정치인을 꿈꾸던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도서 지역 근무라든가 고학년 담임 등 고과에 이득이 될만한 행보를 하지 못했기 때문.
그런데 갑자기 초등학교에서 영어도 가르치고 컴퓨터도 가르치는 등 교육에 새바람이 불고
학부모들이 늙은 여교사 담임 대놓고 싫어하는 게 눈치 보여 입지가 좁아졌는데
남편이 공천 받아보겠다고 나서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학교를 그만 둬버렸다.
신앙과 건강식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고 상황이 불리할 때면 히브리어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스킬을 발휘한다.
과천 땅값 오를지 모르고 인덕원으로 이사갔던 것도 천추의 한.. 공천 떨어질 것도 모르고 학교 그만둔 것도 천추의 한.. 천추의 한이 참 많은 분이다.
공영길 (33세) - 대길 형
“이게 다 장남인 제 탓입니다... (소리 없이 운다)”
사남매 중 둘째. 장남 콤플렉스가 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교회 청년부 생활 열심히 하며 모범생으로 잘 자랐지만 공부는 대길만큼 썩 잘하진 못했다. 삼수해 경기도권 대학 법대를 들어갔지만 12년째 사법고시 준비중이다.
교회 아가씨가 믿음에 반해 결혼했지만 현재는 몹시 실망중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의 월급으로 살아온지 어언 7년째. 아직 아이도 없다. 이혼 얘기가 슬슬 나오는 중이다.
무슨 말만 나오면 ‘이게 다 장남인 내가 못난 탓이다’라며 우는 버릇이 있는데 항상 너무나 청승맞게 이를 꽉 깨물고 소리 없이 흐느껴 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공재희 (36세) - 대길 누나
“아빠가 허풍도 떨었다가 신세한탄도 했다가 막 왔다갔다 하잖아?
이게 남자 갱년기의 전형적인 증상이야. 삶이 뭐랄까.. 허무한거지.”
30대 중반이지만 해맑게 생겨 동안 소리를 듣는다.
다섯 살 쯤 된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고 현재 둘째를 임신 중.
전업주부지만 대학 다닐 때는 심리학을 제2전공으로 배우며 임상심리사를 꿈꿨다.
지금도 개나 소나 다 아는 심리학 상식을 바탕으로 지인들에게 이것저것 정신적 솔루션 제공하는 걸 좋아하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롤모델은 오프라 윈프리.
명지훈 (40세) - 대길 매형
“처남이 나 이제 막.. 비타민에도 넣어주고 그러는거야?”
비뇨기과 의사.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력이 있어 뭔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오픈된 스탠스를 취하는 편. 그러나 그런 리버럴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다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인 대길부에게 혼쭐이 나거나 분위기를 쌔하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 지치지도 않고 미국식 유머를 구사해 본인의 센스를 어필하고 싶어한다.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가장.
병원의 엄숙한 분위기와 차별된 엔터테인먼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있고, 별다른 취미는 없지만 포탈사이트 연예뉴스에 굉장히 민감한 편. 따라서 처남인 대길의 방송국 생활에 관심이 지대하다. KBS 예능 프로그램 ‘비타민’의 의학 전문 패널이 되고픈 욕심이 있다.
공유빈 (14세) - 대길 여동생
“나한테 공부를 해라 마라 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엑소 숙소 한번만 데려가줘.
그럼 내가 반평균까진 따라잡아볼께! 맹세!”
대길 부모의 늦둥이. 4남매의 애물단지 막내.
대길 아버지 부구청장 되던 날 축하주 마실 때 대길모도 기분 좋아 한잔 마신 것이... 유빈을 탄생시켰다.
엑소의 극성팬이라 뮤뱅 하는 금요일 밤에는 방송국 정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게 고정 스케쥴. 엄마뻘 되는 큰언니로부터 ‘되바라졌다’는 비난을 종종 듣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 미운 짓 많이 하는 보통의 십대다.
13살 많은 대길이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예뻐했던 동생.
그러나 언니 오빠란 용돈이나 주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인생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길이 KBS 들어가고 나서부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빠에게 관심이 생긴다.
의도치 않게 대길의 예능국 생활에 아이디어나 모티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라춘식 (67세) - 경민부
“(울며) 석환아 미안하다. 아.. 석환이 자요? 제수씨... 미안해요...”
젊은 시절 친구인 예진부를 꼬드겨 감자탕집을 개업하게 하고 자신은 거기서 쏙 빠져 나왔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 술만 마시면 예진 집에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면서 우는데.
예진모 입장에선 그게 더 열받는다.
은행 다닐 땐 카리스마 넘치는 가장이었다. 중졸인 부인이 대졸인 경민부의 눈치를 엄청 봤었는데, IMF 때 짤리고 감자탕집에 들어간 돈 날릴 뻔 한 걸 부인의 재기로 부동산에 투자한 뒤 집안이 일어서고 나자.. 권력구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뒤론 부인 땅 보러 갈 땐 찜통에 끓여진 사골국물 데워먹고 다 먹고 나선 그릇에 기름기 하나 없이 설거지도 다 해놓는다.
재정적으론 남부러울 것 없는 노년을 보내는 중이지만 둘도 없는 친구와 멀어진 게 너무 아쉽다.
박봉숙 (62세 -경민모)
“자기야. 내가 홍대 주차장 골목에 주택 사라 그럴 때 말 들었어야지.
이제 그 라인은 늦었고. 상수나 합정 쪽으로 빠져야 돼. 아니면 강 건너서 양평동. 거기 폐공장에 홍대 애들이 작업실 열기 시작했거든. 월세 주면 지들이 알아서
꾸민다구...”
부동산의 여왕.
품위 있는 옷차림,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는 안목과 화려한 언변으로 아줌마들을 사로잡는다. 누가 봐도 강남 또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다.
그러나 그녀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에서 나고 자랐다. 거기서 학다리 중학교를 졸업한 게
받은 교육의 전부지만 타고난 끼와 감이 있다.
젊은 시절 은행에서 심부름 해주다가 은행직원인 남편을 만나 임신하며 결혼에 성공했다.
그 시절 애를 갖고 결혼했다는 치명적 약점 때문에 시댁에도 남편에게도 어쩐지 기가 죽었는데. 오히려 남편이 직장에서 짤리면서 그녀에겐 제2의 인생이 열렸다.
어찌어찌하여 예진모에게 넘겨받은 과천 임대아파트를 기반으로 분당 찍고 여의도 찍고 반포 찍으며 부동산 부자로 거듭났다. 현재는 사업자등록을 하고 상가 임대부터 원룸텔 등 다양한 부동산 임대 사업을 하고 있다. 외모의 변신 뿐 아니라 사투리 세탁까지 싹 하고 누가 봐도 강남 귀부인인데. 이상하게 광주서 감자탕집 하는 예진모를 만나면 주눅이 든다. 그게 기분 나빠 일부러 더 쎄게 나간다.
탁석환 (67세 - 예진부)
“춘식아. 갓김치 좀 보내줄까? 야.. 너 나 때문에 술 먹지 마라”
법 없이도 살 사람. 친구 좋아하고 사람 말 잘 믿는다. 불쌍한 사람 그냥 못 지나친다.
경민부 때문에 감자탕집을 하게 됐지만 아직도 아무 원망 없고 경민부가 자기 때문에 미안해하는 게 더 마음 쓰인다. 옆에서 예진모만 열받아 죽는다.
예전 은행 다닐 때 대부계에 있었는데, 그때 사기 대출 사건에 휘말려서 그 책임을 다 지고 당시 돈으로 몇천만원을 쌩으로 물어줘야 했다. 그런데 사기꾼을 잡고 보니 이미 다른 사건으로 감옥에 가 있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부모도 없이 쫄쫄 굶고 있었다. 석환은 그 아비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그 아이들에게 쌀도 사다주고 라면도 사다주고 학용품도 사다줬다. 사기꾼이 감옥에서 나온 후 그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했었다. 막노동을 해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갚기도 했다.
세상 다시 없이 착한 남편, 착한 아버지이지만 이 때문에 가족은 좀 힘들다.
위치도 나쁘고 맛도 그냥 그렇고... 망할 수밖에 없는 감자탕집이었지만 여태 근근이 버티고 있는 건 석환의 인간성에 반한 오래된 단골들 덕분이다.
김영옥 (63세 - 예진모)
“내가 전여고 다닐 때 지금 저기 3층짜리 저 병원 원장... 황선동이라구 그이가 나 아니면 죽겠다고 그 난리를 쳤었다.. 근데 여태까지 안 죽고 잘 사네.”
60년대에 명문 전남여고 나왔다는 게 인생의 자랑이다. 명문가 집 막내딸로 서울서 대학 나온 남편 만나 결혼할 때만 해도 인생은 꽃길로만 되어있는 줄 알았다.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중졸인 경민모를 은근히 깔보고 무시하는 경향
도 강했다.
그랬던 그녀가.. 충장로에서 감자탕집만 20년 넘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젠 설거지를 하도 해서 손이 남자 손처럼 거칠어졌고 그 곱던 목소리도 허스키해졌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의사 남편에 잘나가는 사업가 남편 덕에 노년이 우아한데 자신은 이게 뭔가 싶어 동창회도 멀리하게 됐다. 그런데 그런 동창들조차 명함도 못 내밀게 성공한 여성이 바로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던 경민모라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누구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잊을만하면 광주에 내려와 굳이 자신의 감자탕집에서 대대적인 가족 모임을 하며 염장을 질러놓고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식사 한끼에 백만원씩 쓰고 가는 손님이니 오지 말라고는 못하겠지만 경민모가 한번씩 왔다 가면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왔다 간 것처럼 오장육부가 뒤집혀 며칠은 눕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남편이 너무나 원망스러울 만도 한데도 가장이라고 엄청 챙기고 높인다.
탁예준 (24세 - 예진 동생/ 의대생)
“누나가 경민이 형 마누라야? 근데..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예진의 남동생. 하고 다니는 건 답십리에서 가스배달이라도 할 것 같은 날라리 스타일인데 의외로 의대생이다. 이재에 밝고 궤변에 능하다. 경민에게 친동생 이상으로 친근하게 군다.
경민과 예진이 싸우면 무조건 경민 편이다. 혹시라도 비위를 거슬려서 쫓겨날까봐.
그래서 예진에게 빨리 먼저 사과하라고 강요한다. 학교랑도 가깝고 경민이 형이 요리도 잘하고 깔끔한 편이라 이만한 거주지가 없는 것 같다. 약속된 넉달이 지나도 안나가고 싶어서 경민에게 갖은 알랑방구를 뀐다.
속으로 야욕(?)도 있다. 늘 예진에게 ‘사실 이 집은 우리집이나 다름 없다. 최소한 절반의 지분은 우리한테 있다. 어떻게든 우리 세대가 계획을 잘 세워서 잘못된 집안의 역사를 되돌려 놔야 한다... 어떻게... 누나가 경민이 형을 잘 꼬셔서 그 집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떠냐... 누나 상황에서 미인계란 쉽진 않겠지만....’식으로 얘기한다. 그럴 때 보면 수양대군에게 계유정난을 코치하는 한명회 못지않다.
매니저들
KBS 앞 할리스 야외 벤치에 가죽가방 옆구리에 끼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다..
웬만한 피디들보다 방송국 돌아가는 사정을 더 환히 꿰고 있으며 프로그램 폐지나 신설 소식도 그 누구보다 먼저 안다.
시청률에도 제작진들보다 더 민감하다. 시청률은 피디들의 성적표 같은 것이므로 어느 피디가 공부를 잘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자기 새끼들 어디다 맡길지 판단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피디와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이 답이라 믿는다. 멀어져서도 안되지만 너무 가까워져도 안된다. 왜? 금방 바뀌니까. 너무 친해진 피디가 나중에 후진 프로그램 가서 찐따 붙으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 외 혜주, 형근, 여검사, 예능국 피디들, 출연 아이돌들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