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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리뷰

공동경비구역 JSA

by iamasiam 2020. 2. 26.

1. 짧은 글
  나는 <공동경비구역>이 훌륭한 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경비구역>은 부끄럽지 않은 영화다. 한두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딱히 부족한 것들을 꼬집어 내기 어렵다. 전반적으로 기본기가 탄탄한 영화인 것이다. 커트와 커트, 씬과 씬, 사건과 사건의 연결이 아주 매끄럽게 넘어간다. 카메라의 움직이거나 멈추는 시점, 혹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속도, 음악이 시작되는 포인트, 빠지는 포인트 등이 아주 자신 있어 보인다. 그런 자신감이 영화 전편에 걸쳐 안정감으로 나타난다. 특히 배우들이 자기 감정선을 잘 잡고 있다. 관객들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경험할 수 없었던 이런 무리없음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자연,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에 더 집중하게 되고, 영화 곳곳에 준비해 놓은 유모어에 깔깔거리며 웃고, 그리고 나름의 감동을 안게 된다. 
감독 박찬욱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한국 영화는 이제 영상언어로 사고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2. 박찬욱

나는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겐 친근한 이름이다. 그는 나에게 영화감독으로 기억되기보다 영화보는 법을 알려준 고마운 형으로 기억한다. 뒤늦게 영화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무렵, 서점에 가서 이상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비디오드롬> 박찬욱 저. 한국에 나와있는 영화 서적들은 주로 이론서들이 많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뽑은 걸작 영화들에 대한 영화평들을 모아놓은 서적들이다. 전자의 문제는 실제 영화를 볼 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고, 후자의 문제는 모두 어디서 한번쯤 읽어본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아 진부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디오드롬>이란 책은 전혀 새로운 책이다. 크게 보아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책이지만, 다른 곳에서 적당히 빌려온 생각들을 대충 정리해 놓은 수준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한편의 영화를 자신은 어떻게 이해하는지 꼼꼼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깜짝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관점에서 영화를 설명하곤 한다. 특히 코엔형제의 <밀로스크로싱>을 중절모의 관점으로 읽어낸 글은 이 책의 압권이다.
이 책은 샘페킨파 감독의 <가르시아>의 영화평으로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내가 본 그의 영화 <삼인조>와  모두에 <가르시아>의 엔딩컷인 불을 뿜는 총구의 정면 클로즈업 쇼트가 등장한다. 이 책의 또하나 재미있는 점은 각 영화를 소개하는 제목을 다른 유명한 영화의 제목을 가져와 붙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르시아>의 제목을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로 붙이는 방식! 조금은 어렵고 썰렁한 방식이지만 두 영화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웃음을 선사한다. 박찬욱식 유모어. 대사나 상황을 2중적으로 읽어내 웃음짓게 하는 방식. <3인조>와 에서 여러차례 확인한 그의 장기.

 


3. <3인조>
  박찬욱의 두 번째 영화 <3인조>. 이경영과 김민종, 정선경이 반영웅적 캐릭터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서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한국식 B급 무비이다. 상업영화의 장르규칙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관객들의 예상을 비웃으며 전개된다. 상업적 완성도 면에서는 에 훨씬 못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찬욱은 <3인조>에서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귀밑에 총을 맡아 피흘리는 이경영(파고), 은행대신 카페를 터는 주인공들(펄프픽션), 관객을 향해 불을 뿜는 총구 클로즈업(가르시아), 악당들이 다른 인물을 김민종으로 오해하는 씬(엘 마리아치), 대담한 롱 쇼트 다음에 극단적 클로즈업을 붙이는 과감한 편집(셀지오 레오네식 편집) 등 여러 영화에서 가져온 끝없는 인용들은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물론 매니아들에게 한정된 재미이지만. 이 좌충우돌하는 영화의 테마는 죄와 구원의 문제이다. 제도적 폭력에 의해 내몰린 주인공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꾀하려 한다. 스콜세지식 주제의식. 박찬욱 특유의 유모어 스타일도 이 영화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특히 같은 대사나 상황을 2중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을 통한 웃음. 예를 들어 김민종과 이경영이 카페를 터는 장면을 정선경은 경찰서에서 서경석과 이윤석으로 바꿔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미스테리식 구성에 대한 선호. 참고로 <3인조>비디오 자켓을 보면 소품에 류승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악기점 점원으로 등장한다. 제작자(이춘연)도 사진사로 나와 흐믓한 연기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맘에 든다.

4. <공동경비구역 JSA>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죽이려고 애썼다. 표현보다는 소통을, 소수 매니아보다는 다수 대중을, 자의식보다는 테마를, 연출보다는 연기를, 스타일보다는 감정을, 미학보다는 정치학을 중시하고, 결과적으로 B가 아닌 A가 되게 하려 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그의 전작 <3인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진지함과 설득력-를 지녔다. 많은 대중들과 소통하였고, 연기자들은 멋진 연기를 펼쳤고, 남북문제를 휴머니즘 차원에서 접근하는 데에도 일정 정도 성공하였다. 

5. 휴전선의 이미지-경계선 위에서의 딜레마
‘야, 야.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우.’ 오경필(송강호)이 이수혁(이병헌)에게 한마디 던진다. 고개를 숙여 보면 이수혁의 그림자가 휴전선에 걸쳐져 있다. 완벽한 중립성을 요구하는 보타소장에게 소피소령이 대꾸한다. ‘휴전선 위에 서서 남북을 바라보면 되겠군요.’ 
영화 전편에 걸쳐 휴전선 부감 및 측면 쇼트가 여러차례 등장한다. 총격전 당일 군사 분계선 위에 쓰러지는 이수혁. 군사 분계선 위를 오르내리며 고민하는 소피(이영애)소령. 
거듭되어 보여지는 휴전선 부감 쇼트는 오직 선택만이 있는 남북한의 냉엄한 현실을 강조한다. 중립 따위는 설 자리가 없는 JSA란 공간. 분계선 위에 쓰러진 이수혁이나 분계선 위에서 고민하는 소피소령의 모습에 박찬욱 감독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건 왜일까?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선에 서서 고민하는 그. 와 <3인조> 사이의 그 어딘가에 그가 서있다.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6. 박찬욱의 시각적 스타일

영화를 보면 그가 영상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 처음 북한군 초소에 조사를 나간 소피 소령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는 사건의 단서들을 슬쩍 보여준다. 정우진의 스케치북 속에 그려진 이수혁의 애인 초상화와 초소바닥에 있는 지하벙커도 보여준다. 
둘, 정우진의 시신을 검사하는 소피소령, 살인자가 겨냥한 방식으로 총을 겨눈다. 소피의 팔을 따라 권총까지 내려간 카메라가 다시 올라오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소피가 아니라 이수혁이다.
셋, 영화에서 유일하게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인물인 소피의 얼굴에는 언제나 블라인드 그림자가 떨어져 있다. 사무실과 병실의 거의 대부분의 씬에서.
넷, 이수혁의 자살 장면은 남성식의 자살 시도 장면과 쌍을 이룬다. 같은 장소에 둘다 얼굴을 거꾸로 한채 쓰러진다. 지미집(Jimmy Jib)으로 화면전체가 빙그르르 회전하는 효과를 냈다. 
다섯, 설원대치씬에서 웃고 있는 정우진의 손에 죽은 토끼 정도가 들려있다. 눈위에 선연한 핏자국-그의 죽음을 암시한다. 한밤 비상출동하는 트럭속에서 이수혁은 무거운 마음으로 손전등을 켠다. 남성식의 눈에 이수혁의 얼굴만 붉게 보인다. 이수혁의 죽음을 암시.
여섯, 한 낮, 영어사전을 읽던 남성식의 눈이 부시다. 북한 초소에서 거울로 태양을 반사하며 장난을 건다. 처음엔 눈을 찡그리던 남성식은 잠시후 눈을 감는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반사빛에 온몸을 맡긴다. 남성식의 심경의 변화를 비주얼하게 나타낸 JSA의 명장면.
일곱, 근무중 가래침 뱉기로 장난치며 해맑게 웃던 정우진의 클로즈업 다음 쇼트로 총알에 얼굴이 구멍이 나는 사격표지판 쇼트가 붙는다. 이수혁에 의해 사망하는 정우진에 대한 암시.
여덟, 지하벙커에 모인 남북 병사들을 같은 높이와 사이즈로 둥글게 돌며 담아내는 카메라.  
대등한 우정. 남과 북을 똑같이 바라보고 구별하지 않고 담아내려는 감독의 의도.
아홉, 턱과 이마를 자르는 과감한 클로즈업과 대담한 롱 쇼트의 맞부디침.
열, 현실에서 과거 회상으로, 과거회상에서 현실로 오고가는 방식의 세련됨. 소도구를 이용한 트릭-권총으로 연결. 남성식의 동일한 사이즈 쇼트를 이용한 연결.
열하나, 이수혁 자살 장면에서 피에 젖는 지뢰 핀. 갈대밭 지뢰 씬에서 오경필은 이수혁이 밟은 지뢰를 해체해 주곤 지뢰 핀을 선물한다. 이걸 지니면 총알들이 피해간다고. 지뢰핀 덕분인지 이수혁은 무릎에 부상을 입은 채로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돌아오지않는 다리를 건넌다. 하지만 모든 총알을 빗나가게 하던 지뢰 핀 조차도 남성식을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죄의식에서 발사된 자신의 총알만은 어쩌지 못한다.

7. 20대까지 나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믿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가능했었다. ‘마음만 먹으면’이란 세계가 있다면 왕노릇 하리라 농담하곤 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0대인 나는 그 세계를 버렸다. 더 이상 마음먹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감독자신이 ‘마음먹고’ 웰메이드 방식으로 만든 영화-B급이 아닌-이다. 그의 이런 의도는 상당히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그의 전작 <3인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진지함과 설득력-를 지녔다. 사뭇 점잖아졌고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지녔다. 많은 대중들과 소통하였고, 연기자들은 자신감 있는 연기를 펼쳤고, 남북문제를 휴머니즘 차원에서 접근하는 데에도 일정 정도 성공하였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A-무비정도는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그럴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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