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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레이몬드 카버

by iamasiam 2020. 2. 26.

0. 레이몬드 카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하루키)에 등장하는 가상의 작가 데레크 하트필드는 누굴까?  

애초부터 소설의 내용 따위보다는 그런 것이 더 궁금했다.

그래서 샐린저와 피츠제럴드, 보네컷, 그리고 카버를 알게 된 것이다.

카버는 언제나 눈을 감게 만든다.

눈을 감고 그의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성당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대성당 한가운데 서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카버를 읽는다는 것은 내게 있어 일종의 성스러운 체험이다.

속으로 걷는 멋진 체험.

 


1. <내가 전화를 걸고 있는 장소>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난 대학을 다녔다.

밤이 되고 가슴이 답답하면 하숙집을 나섰다.

차가 빠져 휑한 근처 유원지 주차장을 가로지르면, 나트륨 가로등 빛을 받아 환히 빛나는 공중전화 부스가 서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수화기를 든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잘 있었어, 코알라양?’

그녀가 받으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다.

‘나야, 잔차!’ 하지만 신호가 갈 뿐 저쪽에선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절박한 심정으로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이곤 했다.

더 이상 전화를 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쯤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되돌아온다.

그렇게 찬바람을 쏘이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주차장 지나 가로등 아래 공중전화 부스.

그 곳에서 느꼈던 어떤 절박함.

누군가와 연결되었으면 하고 꿈꾸던 곳.

내가 전화를 걸곤 했던 장소.

 

 

2.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뙤약볕이 내리 쪼이는 운동장 구석, 남자아이들이 두 패로 갈려 서로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한 녀석이 애매하게 중간쯤 서 있다.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너, 어느 편이냐? 아랫마을 대장 종구가 묻는다.

물론 네 편이지.

너, 그럼 우리랑 반대편이냐?

아파트 마을 규성이가 묻는다.

아냐, 난 너랑 반대편이 아니야.

그럼 도대체 어느 편이냐?

종구와 규성이가 동시에 묻는다.

둘은 모두 내 친한 친구다.

그런데 녀석들은 각각 전통적으로 대립해 왔던 아랫마을과 윗마을 아이들 짱이다.

그래서 오늘 한판 붙는데, 애매한 태도를 취한 내게 묻고 있다.

어느 편이냐고. 사실 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우리집이 아랫마을과 윗마을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난 둘 중 어느 녀석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운데 서 있었다.

결국 둘은 일대일로 붙었고 나는 말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난 두렵다.

넌 어느 편이냐고 물을까봐.

여전히 난 욕심이 많고, 경계선 위에 있으니, 거 참. 

 


3. <대성당>

1988년, 난 대학 1학년이었다.

과외도 하고 써클 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모임에 기웃거리느라 정말 정신이 없었다.

맹인학교에 가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봉사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다.

당시 누구나 그런 활동 하나씩은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맹인을 상대하는 일은 심리적 부담이 많다.

난 사회과목을 맡았는데 독과점의 폐해를 증명하는 그래프를 가르쳐야하는 대목에서는 아주 난감해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어쩌랴. 결국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반쯤 포기한 채로 찬찬히 설명을 했다.

그래 혹시 알겠니?

다시 한번 설명해줄까?

아니요, 알겠어요.

어떻게?

머리에 그림이 그려져요.

그게 가능하니?

그럼요.

신기하고 궁금했다.

너 수학은 어떻게 하니?

중간과정이 복잡한 계산들 말야.

뭐, 그냥 해요.

설마 암산?

그냥 머리속에서 해요.

으악, 나는 놀랐다.

맹인에 대해서, 그들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나는 반성했다.

맹인에 대한 나의 인지장애에 대해서.

그 이후 내겐 한가지 버릇이 생겼다.

문제가 꼬이고 꼬여 머리가 터질 것 같으면 조용히 눈을 감곤 한다.

그리곤 독과점 폐해와 관련된 그래프를 떠올려본다.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프 대신 내가 가르쳤던 맹인 친구가 홀연히 등장한다.

그 친구는 빗자루 하나를 들고 내 문제들을 쓰윽쓱...

눈을 뜨면 고민거리는 반쯤 정리되어 있다.

뭐 이런 식이다.

누구나 저 나름의 장애는 있다.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줄진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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