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랙 이와이 슌지
화이트 이와이 슌지-<러브레터>스타일이 아니라 블랙 이와이 슌지-<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스타일이라고? 뭐 이와이 슌지 영화가 거기서 거기겠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만만치 않았다. 충격을 받고 나와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눈은 쿡쿡 쑤셨다. 구토를 하는 주인공 유이치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2. 푸른 고양이
스토리만 보자면 사실 복잡할 것도 없다. 영원히 낭만적일 것 같았던 중학시절은 일학년 여름방학이 지나자 악몽으로 변해버린다. 유이치의 단짝 호시노가 학교의 짱이 되어 유이치를 이지메 시킨다. 유이치를 좋아하는 츠다를 원조교제 시켜 돈을 갈취하고, 유이치가 좋아하는 쿠노를 성폭행한다. 유약한 유이치를 위로하는 건 릴리슈슈의 음악뿐이다. 하지만 팬 사이트를 통해 만난 소중한 친구 푸른 고양이가 호시노임을 안 유이치는 그를 칼로 찌르고 만다.
3. 현기증
영화는 첫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는다. 채팅을 하는 방식을 새롭게 잡아내고 있다. 빠른 편집과 과감한 자막, 귀에 쟁쟁한 강박적 자판 소리가 어우러져 릴리 슈슈 팬 사이트에 빠져드는 소년의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나도 모르게 유이치가 된다. 그의 폭력적인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이야기는 스트레이트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시간이 뒤죽박죽 섞여 마구 날아든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귀를 때리는 자판소리, 빠른 편집 사이사이 숨막힐 듯 아름답게 잡아낸 서정적인 화면들, 그리고 무겁게 조여드는 폭력적인 현실이 몽환적인 릴리슈슈의 노래에 실려 이리저리 흘러가면 그 누가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기묘한 십대의 불안함이 고스란이 전달된다. 십대의 딜레마를 잡아내는 새로운 방식. 정서적 혼돈의 자동기술. 아찔하다. 현기증이 난다.
4. 유이치, 구토하다
유이치는 무기력하다. 유일한 도피처는 릴리슈슈의 음악과 팬사이트뿐. 릴리슈슈의 음악에 대해서는 멋진 글을 써대지만, 현실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원조교제를 하는 츠다를 감시하고, 성폭행을 당할 줄 뻔히 알면서 쿠노를 호시노에게 안내하고 우는 일뿐이다. 츠다는 끝내 자살을 하고, 쿠노는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난다. 유이치는 구토하고 만다. 관객은 속이 울렁거린다.
5. 쿠노, 심벌즈 치다
슌지는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호시노의 변화를. 대부분의 가해자는 한때 피해자였음을. 폭력의 유전 방식을. 악마같은 호시노도 전학 오기 전엔 왕따를 당하던 부잣집 아들이었다. 배신감에 호시노를 칼로 찌르는 유이치는 영화내내 정말로 심약한 녀석이었다. 일학년 여름방학때 호시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홀로 남은 호시노는 폭력으로 자신을 방어하기로 작정한다. 호시노패거리에 걸려 원조교제를 강요당하는 츠다는 유이치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한다. 유이치는 자기자신하나 방어하지 못한다. 츠다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서인지 쿠노는 여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그녀는 과거 호시노에게 릴리슈슈의 음악을 소개했었고, 릴리슈슈 음악의 원천인 드뷔시의 곡을 연주한다. 반 합창대회에서 피아노반주를 거절당하자 아카펠라로 곡을 편곡, 강당에 모인 모두를 감동시키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아이들이 마음을 닫고, 대화를 거절하고, 헤드폰 속으로 숨어들 때 쿠노는 강당에 모인 모두와 소통한다. 자신의 음악으로.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다음날, 츠다의 자살로 한층 더 어두워진 교실에 머리를 빡빡 민 쿠노가 들어선다. 그녀의 음악이 그렇듯 쿠노는 숨지 않고 정면으로 싸운다. 힘 있게 심벌즈를 부딪치고 피아노를 연주한다. 유이치가 현실을 외면하고 릴리슈슈의 음악으로 도피하는 사이 쿠노는 용감하게 돌아와 피아노를 연주한다. 릴리슈슈가 된다. 사실 릴리슈슈의 음악은 자신의 아픈 경험을 피하지 않고 어루만지는 태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노래는 유이치와 츠다도 위로하지만 가해자인 호시노까지 어루만진다. 폭력만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폭력에 대한 저항의 용기도 아름다운 음악으로 이어져 내린다. 쿠노는 미래 아이들의 새로운 릴리슈슈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 피아노뿐 아니라 심벌즈도 치고 있다. 피하지 않고 아픔을 어루만질 기세다.
6. 새로운 릴리슈슈
몽환적 음악이 흐르는 동안 두 명의 아이들이 죽었고 두 명의 아이들이 살아남았다. 폭력의 피해자-츠노-가 자살했고, 가해자-호시노-가 살해당했다. 유이치는 호시노를 죽이면서 살아났고, 쿠노는 음악으로 싸우며 살아났다. 살아남은 두 아이들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유이치는 또다른 호시노가 될 듯싶고, 쿠노는 새로운 릴리슈슈로 자라날 것만 같다.
7. 헤드폰을 벗으세요
사실 유이치와 호시노 사이엔 소통의 가능성이 있었다. 릴리슈슈의 음악. 두 소년은 함께 노래를 듣는 대신 각각 헤드폰을 쓰고 벌판에 서서 따로 음악을 듣는다. 릴리슈슈 팬 사이트에서는 속 얘기를 털어놓는 사이가 되지만 그건 유이치와 호시노가 아니라 필리아와 푸른 고양이라는 아이디를 통해서다. 푸른 고양이가 호시노라는 걸 안 유이치는 녀석이 건넨 사과를 칼로 찌른다. 쿠노는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친다. 복도에 앉은 유이치가 위로받는다. 그녀의 노래는 대강당의 아카펠라로 울려퍼진다. 호시노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머리를 짜르고 나타난 후에는 다른 아이들과 합주를 한다. 모두가 돌아간 후에도 끝까지 연주한다. 선생님이 이젠 돌아가라고 말할 때까지. 쿠노의 음악은 단절대신 소통을, 폭력대신 위로를, 헤드폰대신 광장을 지향한다. 슌지는 속삭인다. 이봐요, 유이치군, 호시노군, 헤드폰을 벗으세요. 츠다양, 뛰어내리는 대신 머리를 깎으세요. 우리의 쿠노가 있잖아요, 라고.
8. 징크스가 있는 영화가 있다. 이와이 슌지의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같은. 예전에 이 영화를 보러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극장표도 날리고, 영화도 못보고. 두고두고 상처가 되었다. 소설로도 읽어보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보려고 단단히 맘먹었는데, 이런,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극장에 달려갔지만, 10분 지각. 언제나 볼 수 있으려나, <스왈로우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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