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드라마 기획안

MBC <내 이름은 김삼순>

by iamasiam 2020. 5. 15.

방송기간: 2005년 6월 1일 ~ 2005년 7월 21일
채널: MBC
연출: 김윤철
극본: 김도우
출연자: 김선아, 현빈, 정려원, 다니엘 헤니, 이규한, 이윤미 外

 

▒ 원 작 ▒
내 이름은 김삼순(지수현 著, 눈과마음 刊)

▒ 내 용 ▒
스물아홉 뚱뚱한 노처녀와 스물일곱 백마 탄 왕자(그러나 왕싸가지 >_< )의 기상천외한 계약연애

 


<작의 (作意) / 기획의도>

봉봉 오 쇼콜라(Bonbons Au Chocolat)는 한입 크기의 초콜릿 과자를 뜻하는 
프랑스 말로, 보통 여러 개를 한 상자에 넣어 선물용으로 주고받고 합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열어봤을 초콜릿 상자. 
그걸 열 때의 기분은 모두 비슷하겠지요. 
뚜껑을 여는 동시에 스며 나오는 달콤한 냄새, 
모양도 재료도 색깔도 제각각인 이 작은 것들은
일단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입도 즐겁게 해주고, 그리고 마음까지 즐겁게 해줍니다. 
게다가 초콜릿은 신경을 부드럽게 하여 피로를 풀어주는 효능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달콤하고, 예쁘고, 맛있고, 피로회복까지 해주는 봉봉 오 쇼콜라 같은 드라마.
앞으로 드라마를 장식할 온갖 종류의 디저트류처럼 상큼한 드라마.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의 어머니는 인생을 초콜릿상자에 비유했습니다. 

<인생은 초콜릿상자에 있는 초콜릿과 같다.
 어떤 초콜릿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맛이 틀려지듯이 
 우리의 인생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어느 것을 집든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각각의 것들을 맛있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각양각색의 초콜릿만큼 다양한 캐릭터들과 그 캐릭터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꽉 찬... 

이 드라마는 봉봉 오 쇼콜라가 가득 든 초콜릿상자 입니다. 
다들 맛있게 드시길...


             
<집필 및 제작방향>                                  

1. 이 땅의 모든 삼순이들을 위하여...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 중 자기가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73%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땅의 여자 열명 중 일곱 명이 자기가 뚱뚱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의 주인공 김삼순도 그 중에 속한다. 159cm의 키에 62kg. 사랑에 상처 받아 홧술로 7kg이 불어나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스물아홉의 뚱뚱한 노처녀이다. 대학도 안나왔고, 파티쉐라는 다소 생소한 자격증이 있긴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해고당하고, 애인도 원룸도 마이카도 없다. 그녀는 평균이다. 이상과 현실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스물아홉 그 또래 여성들의 평균. 그녀들은 영화 같은 로맨스를 꿈꾸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안다. 일에 푹 빠져있을 때는 결혼 따위 안하고 살 수도 있을 것 같고, 돈 벌어서 평생 여행이나 했으면 좋겠고, 가끔 친절하게 구는 연하남에게 가슴 설레이고, 쏜 살 같은 시간의 흐름이 무서워지기 시작하고, 돈벼락을 맞았으면 좋겠고, 그러면 차마 버리지 못해 가슴 속에 묻어둔 꿈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고...  열명 중 일곱 명, 이 땅의 평균여성들, 이 땅의 삼순이들에게 로맨스를 선물한다. 초콜릿 상자도 덤으로 부친다. 선물 받은 삼순이들, 극 중의 김삼순처럼 씩씩해지기를 바란다. 삶이 그대들을 속여도, 사랑이 그대들을 울려도, 나빠지지 말고 더 단단해지기를... 

2. 식감이 풍부한 로맨틱 코메디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특히 사랑에 빠져있을 때, 우리의 뇌에서는 페닐에칠아민이라는 화학물질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그 생성이 중지되어 우울과 불안 증세에 빠진다. 재미있는 건 초콜릿만큼 페닐에칠아민을 많이 함유한 식품이 없다는 것이다. 실연은 초콜릿으로 치유된다. 달콤쌉싸름한 맛을 내면서 실연까지 치유해주는 초콜릿... 품질 좋은 초콜릿은 손바닥에서는 녹지 않고 입안에서만 녹는다. 입 안에서 녹는 식감도 남다르다. 최고의 쇼콜라띠에(초콜릿장인)가 만든 최고품질의 초콜릿처럼 식감이 풍부한 로맨틱코미디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다.
<스토리는 심플하게, 감정은 깊게, 웃음은 호탕하게, 눈물은 진하게, 인생사 희노애락이 쌈빡하게 녹아있는 드라마>
그 방편 중의 하나로 등장인물들이 초콜릿상자 안에 든 봉봉과 같이 기능하도록 할 것이다. 혼자만 빛나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초콜릿상자처럼, 각각의 인물들이 드라마를 풍요롭게 빛내줄 수 있도록! 만일 초콜릿상자를 열었을 때 하나라도 비어있으면 교환하거나 환불받아야 마땅하다. 불량상자 0%를 향하여 열심히 공정하겠다. 

3. 시루떡 같은 드라마...

 삼순이는 방앗간 집 셋째 딸이다.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시루떡을 쪄내고 삼순이는 레스토랑에서 케이크를 굽는다. 케이크가 남녀간의 사랑의 상징이라면, 시루떡은 가족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요즘 집에서 시루떡을 쪄먹는 일은 흔하지 않다. 비례해서 가족간의 사랑도 소흘해졌다. 하지만 삼순이네는 다르다. 비록 집이 아니라 방앗간에서지만 매일매일 시루떡을 쪄낸다. 그만큼 가족간의 사랑도 돈독하다. 따뜻한 가족이야기를 그려보고 싶다. 모락모락 뜨거운 김이 나는 드라마 속의 시루떡에 군침 흘리다가 시루떡 쪄먹는 집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시루떡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등장인물>                                     

1. 김삼순

29세. 파티쉐(Patissier/파티쉐리/제과 기술자)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

◈ 삼순이의 캐릭터 :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젊지도 않은 엽기발랄 노처녀 뚱녀. 159cm의 키에 55kg의 다소 통통한 몸매였으나 실연당하면서 홧술로 7kg이 불어나 62kg을 기록한다. 방앗간 집 셋째 딸. 전(前) 고교 농구선수. 혼작말의 여왕이며 자질구레한 호기심이 많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고 마시고 자는 걸로 푼다. 아이스크림, 떡볶이, 순대, 소주, 꼼장어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 어느덧 스물아홉,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만큼 현실감각이 있다. 그러므로 보도블록 틈에 핀 민들레처럼 씩씩하게 자기인생을 꾸려나갈 줄을 안다. 세 가지 꿈이 있다.

- 개명(改名)하기! 
- 20대에 결혼하기!
- 나만의 가게 갖기! 

◈ 삼순이의 역사 : 그녀는 생각한다. 내 인생이 불행해진다면 그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라고. 위로 두 언니가 태어나고 셋째로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들을 바랐던 할아버지는 분풀이하듯 김삼순(金三珣)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려버렸다. 이제 그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녀는 ‘김희진’이라는 이름까지 만들어 개명을 매해의 신년목표로 삼지만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네 딸 중에 삼순이란 이름이 제일 좋다며 ‘삼순이 꽃밭’도 만들어주고 ‘삼순이 나무’도 심어주고 ‘삼순이 그네’도 만들어 커다랗게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참 삼순이스럽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씩씩하고, 건강하고, 정 많고, 낙천적이다. 그래서 네 자매 중 가장 손해를 많이 보았다. 일영언니는 맏이니까, 이영언니는 자기욕심이 많아서, 늦둥이로 태어난 하늘이는 경쟁상대도 안되게 어리니까, 삼순이는 항상 자매들의 뒷전이었다. 남들 기본으로 배우는 피아노도 못배웠고, 유치원도 못갔고, 급기야는 대학도 못갔다. 두 언니의 대학등록금을 대느라 집안형편이 여의치 않자 삼순이스럽게 포기한 것이다. 

 ◈ 삼순이의 꿈 : 대학진학을 접은 대신 삼순이는 프랑스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의 그 날, 교보문고 3번 코너 요리서적 책장 앞에서 관련서적을 뒤지던 삼순이는... 심봤다!!! 파티쉐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이다. 매일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온갖 달콤한 향료들과 씨름을 하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이렇게 좋은 직업이 있었다니! 이건 천직이다! 농구를 그만두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 대학진학도 마다한 그녀, 이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농구? 그녀는 농구에 대해 할 말이 많다. 무려 5년 5개월을 농구선수로 지냈으니 당연하다. 그녀는 프로농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농구부 코치에게 발탁되어 숭의여고 2학년 때 그만두기까지 그녀는 그런대로 잘하는 포인트가드였다. 그런데 키가 자라지 않았다. 1m 를 넘길 때는 겁도 없이 쑥쑥 자라던 키가 150을 넘기면서는 깔딱깔딱 숨 가빠하더니 결국은 159.3에서 그만 운명을 다하고 만 것. 참고로, 당시 농구부 평균 신장은 171.7cm 였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농구를 그만두면서 그녀는 낙담했다. 공부는 영 소질이 없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렇게 암담한 마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천직을 찾은 것이다. 목표를 정한 삼순, 가열차게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으고 대학 안보내준 부모님을 몰아세워 1년치 등록금을 타내고, 마악 좋은 직장에 취직한 이영언니에게 항공권을 사내라 하고, 그리하여 대망의 파리로 유학을 갔다. 파리에는 107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가 있다. 거기서도 피눈물 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겨우 학교를 마치고 2년 쯤 초보 파티쉐로서의 경력을 쌓고 스물일곱에 귀국을 했다. 그녀는 당당했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비록 고졸이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 일을 위해 충분한 실력을 쌓았고, 무엇보다도 옆에는 현우가 있었다. 

◈ 삼순이의 남자들 :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온다면? 그럼 좋을까? 삼순에겐 아니다. 삼순이는 저 하나만을 사랑해주는 단 한사람이면 족하다. 파리에서 만난 현우가 그랬다. 건축설계를 공부하러 온 현우는 킹카였다. 서울에서였다면 감히 엄두도 못낼 킹카를 파리라는 이국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연인으로 삼게 되자 감격에 겨운 삼순이는 마음도 주고 정도 주고 몸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취직이 되어 귀국한다고 해서 갑자기 따라 들어왔다. 귀국하고 2년, 총 3년 동안 그들은 연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니다. 그가 바람이 났다. 바람 난 주제에 적반하장이다. 우리는 인연이 아니니 헤어지자고 한다. 그래, 헤어져! 헤어져줄께! 큰소리치지만 정작 그를 잊지 못하는 삼순의 앞에 한 남자가 얼씬거린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고용주가 되더니, 삼순에게 연애를 하자고 한다. 계약연애, 사기연애를...  현진헌. 그는 잘 생겼다. 젊다. 집안도 좋고 스물일곱에 벌써 레스토랑 사장이니 삼순이가 일년만 젊었어도 정말 뻑 가고도 거품 물을 지경이다. 하지만 삼순이는 지금 스물아홉이다. 백마 탄 왕자가 자기 차지가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저 외모와 조건 뒤에 가려진 왕싸가지를 그녀는 진작부터 간파했다는 사실! 그는 정말 왕싸가지다. 어쩔 때는 미지왕(미친 놈 지가 왕잔 줄 아네) 같은 언행도 한다. 제 멋대로이고 서늘하다.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저 따위 남자, 백날 같이 있어봤자 자빠질 일 없을 거다. 

그래서 그녀는 계약연애를 받아들인다. 경매에 넘어갈 뻔한 집을 구하기 위해서, 그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서, 돈을 빌린 대가로 연애하는 척 하기 위해서, 계약서에 싸인을 한다. 계약연애 만세! 사기연애 만만세! Allelujah!

2) 현 진헌27세. 프렌치 레스토랑  보나뻬띠(Bon Appetit : 맛있게 드세요) 사장. 
얼음왕자.

< 김삼순씨, 우리는 연애하는 게 아닙니다. 연애하는 척 하는 겁니다. >

 ◈ 누구나 마음속의 그린벨트가 있다.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곳, 깊은 우물 같은 곳. 누군가 허락도 없이 들어서거나 흔들어대면 몹시 예민해지고 통증이 느껴지는 곳. 그에게는 마음속의 그린벨트가 많다. 3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형과 형수, 그 사고로 망가져버린 그의 왼쪽 다리, 그리고 그를 떠난 여자 유희진... 
 사고가 나기 전부터도 그는 그다지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냉정하고 직설적인데다 타인에게 쉽게 곁을 내주는 성격이 아니어서 독선적이다, 차갑다, 사람을 우습게 안다, 는 소리를 듣곤 했다. 또 어떤 이는 그랬다. 세상 무서운 걸 모른다고. 사실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는 거칠게 없는 행운아였다. 호텔업을 하는 준재벌의 집안에서 명석한 두뇌와 빛나는 외모를 갖고 태어났으니 세상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자신의 운전미숙으로 사고가 나고 그로 인해 형과 형수를 잃자 그는 세상 무서운 걸 알았다. 전에는 머리로만 알았던 슬픔을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대신 전보다 더 냉정해지면서 삐딱해졌다. 형과 형수를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은 ‘나는 행복해져서는 안’된다는 자기혐오에까지 이르러 위악을 떤다. 그는, 자신이, 몹시 나쁜 놈, 인 것 같다. 

 ◈ 그는, 세상에서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을, 형 현진태에게서 배웠다. 그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돌연사하자 고등학생이었던 형은 의젓하게 상을 치러냈다. 검은 양복에 삼베두건과 완장을 한 형은 몹시 강건하고 또 몹시 커보였다. 형은 못하는 게 없었다. 공부도 운동도 악기도 잘 다루었다. 형은 그에게 태권도와 검도와 수영도 가르쳐 주었다. 이유 없이 우울할 때 이슬람 사원에 앉아있는 것도 형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피아노의 기초도 배웠고 산도 배웠다. 그가 중학교 때 대학생이었던 형은 산에 미쳐 있었다. 해외원정대에 끼여 세계의 고산들을 주유(周遊)했고, 호텔 경영자인 어머니를 설득해 원정대에 후원금을 내게 하기도 했다. 형은 가끔 그를 데리고 북한산이나 설악산에 가곤 했다. 수능시험을 마쳤을 때는 제주도까지 데리고 갔다. 새벽부터 그들은 눈 덮인 한라산을 올랐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 속에서 그들은 야영을 하고 라면을 끓여먹고 커피를 나눠마셨다. 그 라면 맛과 커피 맛, 그리고 형이 불 붙여 준 담배 맛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기억이 생생한 만큼 아픔도 생생하다. 심장을 도려내어 소금을 치는 것처럼. 서른이 되자 형은 산과 이별하고 호텔로 들어왔다. 그는 기업가의 장남이었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자기가 장남만 아니었어도 산에서 살고 산에서 죽는 산사나이가 되었을 거라고 가끔 말하곤 했다. 정말 그랬을 거라고 그는 믿는다. 그런 형은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재벌가의 자제들이 흔히 하는 정략결혼을 마다하고 산에서 만난 평범한 교사와 결혼을 했다. 형은 그에게 여자를 사랑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만큼 형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완벽한 형이 가르쳐주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는 법...

 ◈ 만약 희진이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삐딱하고 건조한 사람이 되었을까? 유희진.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6년간 사귀어 온 여자,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 될 여자, 그가 학업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가면 아내로 맞이할 여자, 그런 여자였다. 그런데 사고로 한쪽 다리가 뭉개진 그에게 그녀는 이별선고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가야 한다고, 돌아올 때까지 3년만 기다려 달라고... 그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칠 때 희진은 그렇게 떠났다. 사랑은 쉽게 증오로 변했다. 증오는 다른 여자들에게까지 번져 어머니 외에는 모두들 속물로 보였다. 하지만 희진에 대한 증오가 단단해질수록 그리움도 단단해져 그는 자기도 모르게 3년 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3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처음 1년은 상처를 치료하고 마음을 추스른 것 같고, 다음 1년은 피땀을 흘리며 물리치료를 받았다. 산산조각이 났던 다리뼈에는 쇠심과 인공관절이 박혀 있다. 지금도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기사를 두는 건 성미에 안 맞아 택시만 타고 다닌다(중반부터 운전을 다시 시작한다). 비오는 날은 노인네처럼 다리가 쑤셔 절룩거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매우 가볍게 지나가고 어떤 날은 며칠씩 드러누울 정도로 아프다. 두 다리로 꼿꼿하게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한라산에 올라갔다. 열아홉 살 겨울에 형과 함께 올랐던 산, 이 산을 오를 수 있으면 뭐든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걸었다. 세상에 대한 오기로, 희진에 대한 증오로... 한라산 정상에 올라서서 그는 결심했다. 일단 기다려보자, 3년 뒤에 돌아온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키는지 한번 보자... 그래서 그는 레스토랑을 차렸다. 그녀가 돌아오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네가 없어도 살아지더라, 야멸차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온다. 약속한 대로 3년 만에 돌아온다. 그리고는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녀가 왜 떠났는지, 왜 돌아왔는지, 왜 또 떠나야 하는지, 왜 현진헌 그가 함께 가줘야 하는지... 예전 같으면 두말없이 함께 떠났을 그이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유희진 말고 김희진. 아니, 김희진으로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김삼순. 

 ◈ 그가 삼순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몹시 좋지 않다. 뚱뚱해. 어쩜 저렇게 얼굴도 눈도 동그랄 수 있지? 솔직이 지나쳐 푼수군. 저렇게 잘 먹는 여자 처음 봐. 그래도 케이크는 잘 만들어. 혹시 변태 아냐? 어? 이 여자, 싸이코잖아?! 그런 삼순에게 계약연애를 하자고 한 건 주말마다 맞선녀들을 들이대는 어머니를 잠시나마 눈속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하필 김삼순이냐고 묻는다면... 그녀와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건 삼순이도 마찬가지다. 즉,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타입은커녕 너무 싫어하는 스타일이어서 절대 사랑 같은 것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남녀간의 일을 누가 알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삼겹살 같은 여자와 와인 같은 남자의 로맨스가 절정으로 치닫고, 원래 엽기적이었던 여자는 더더욱 엽기스러워지고, 날 선 칼 같았던 남자마저도 하루하루 귀엽다 못해 엽기적으로 망가지고, 심지어는 서로가 너무 사랑스러워 물어뜯어먹을 태세인 초절정엽기닭살커플이 탄생하는데... 유희진... 그녀가 뜨겁게 달아오른 진헌의 몸과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야 만다!

3) 유희진

27세. 진헌의 옛 연인. 

 ◈ 아름답다. 예뻐도 차갑게 예쁜 게 아니라 선(善)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그런 인상이다. 이지적이면서 따뜻한... 머리도 좋고 총명하다. 의사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맺힌 데 없고 쾌활하다. 고2때 영어과외에서 진헌을 만나 고3 때부터 6년 사랑을 쌓아왔다. 대학 때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그녀는 홀로 남았다. 그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암세포가 그녀의 행복을 앗아갔다. 

 ◈ 과외방에서 처음 진헌을 만났을 때, 참 건방진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건방지고 무척 냉랭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 팀은 깨어졌고 다른 팀에서 다시 만난 건 다음해인 고3때. 그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말을 걸어왔다. 너, 내 앞에서 웃지 마. 시비조의 그 말은 그들 사랑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이 되어주었다.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 각자에게 가끔 유혹도 있었고, 싸우다가 헤어진 적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양가에서도 둘의 교제를 허락했고 희진이 의대를 졸업하면 결혼과 함께 부모님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가기로 했다. 진헌은 MBA를 따고 희진은 의학공부를 더 하고, 그러면 누구나 시샘할만한 부부가 될 터였다. 성격도 잘 맞았다. 각진 진헌을 희진이 부드럽게 잘 감싸주었다. 자연스럽게 진헌은 희진에게 길들여져 갔다. 그녀 없이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그를 그녀가 버렸다. 길들여 놓은 채, 가족을 잃고 다리를 잃은 그를, 그녀가 떠나갔다. 

 ◈ 그녀가 왜 갑자기 떠났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만큼 지독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때... 그녀는 진행성 위암 3기말을 선고 받았다. 병리학적 병기로는 Stage ⅢB - T3N2M0 (암이 위장막을 관통하였으나 주위 장기의 침범은 없으며 전이된 림프절 수가 10개, 그러나 원격전이는 없으므로 수술과 치료가 가능하다). 5년 생존율은 25% - 30%. 의대생이었던 그녀는 소화불량과 헛구역질을 임신으로 착각할 만큼 자기 몸에 무지했다. 아니, 누가 감히 의심하겠는가. 스물네 살의 파릇파릇한 몸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을 줄을.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고 받기 며칠 전, 진헌이 운전하던 차에 사고가 일어났고, 동석했던 형과 형수가 죽었고,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그에게 나도 죽을 만큼 힘들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위로를 들으려 고통을 몇 배로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여린 외모와 달리 강단진 그녀는 열심히 계산했다. 자기가 살 확률, 치료기간, 그의 치료기간, 서울과 미국 간의 거리, 멀어진 거리를 사랑이 극복할 확률... 그녀는 결심하고 그에게 선언한다. 나 공부하러 미국에 가. 너한텐 미안하지만 지금 가야 돼. 지금 아니면 기회를 놓쳐. 3년만 기다려. 3년 뒤에 돌아올게. 꼭 돌아올게.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를 두고 MD 앤더슨 암센타가 있는 텍사스의 휴스턴(캘리포니아 한인촌에서 개업중인 부모의 권유로)으로 그녀는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시 이 비행기를 타고 이 땅에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겨우 25%...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도 25%... 그녀는 0%가 아님을 다행히 여기며 눈물을 거두었다. 그에게 돌아오기 위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꼭 살아야 한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위를 거의 다 들어내는 끔찍한 수술과 2년여에 걸친 항암치료도, 이방에서의 외로움도(퇴원 후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은 아파트를 얻어 통원치료 했고 그때는 혼자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견디고 또 견뎠다. 그에게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 결국... 그녀가 이겼다. 그녀가 돌아온다. 여전히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예전으로 돌아가자 한다. 헌데,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한다. 꽃처럼 착하고 예뻤던 그녀, 죽음과 절대고독과 싸워 이긴 그녀, 이제는 삼순이라는 촌스럽고 뚱뚱한 여자와 싸워야 한다. 

4. 민현우30-33세.

삼순의 옛 연인. 건축설계사.
 ◈ 모델 버금가는 외모를 지녔다. 패션감각도 뛰어나다. 진헌이 그늘 깊은 흑장미 같다면 이 남자는 티 한 점 없는 백장미 같다. 화사하고 명석한 남자다. 너무 화사해 여자도 많이 붙고 붙는 대로 바람도 많이 핀다. 솔직하다. 자신이 바람둥이라는 점, 나쁜 놈이라는 점을 인정할 만큼. 그러나 부드럽다. 진헌이 직선이라면 이 남자는 하나의 점이다. 점으로 사각형도 만들고 원도 만들고 삼각형도 만든다. 자유자재로 여자를 다를 줄을 안다. 언변이 좋아 가능하다. 자신의 과오를 말로 커버한다. 한 명 한 명 최선을 다해 사랑했노라고, 공자와 비트겐슈타인 등 동서양의 철학을 끌어들여(개똥철학일지언정 박식하긴 하다) 실존주의적 사랑(?)에 대해 설파한다. 듣다보면 그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요 나쁜 놈도 아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두 번도 속고 세 번도 속는다. 삼순이라고 용빼는 재주 있나. 자꾸 속으면서 진헌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게 된다.

 ◈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와 경영공부를 하는 두 형이 있다. 막내인 그는 경영에서 자유로워 건축설계를 전공할 수 있었다. 유학 떠난 파리에서 삼순을 만나 연애를 걸었다. 제과공부를 하고 있다는 삼순은 그때까지 만나던 다른 여자들과 좀 달랐다. 오동통하고 어리버리하면서도 문득문득 엉뚱하고 게다가 늘 달콤한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게 몹시나 귀여워 보였다. 처음 잔 날 그녀가 처음이라는 걸 알고는 아차 싶었지만 6개월쯤 괜찮게 지냈다. 사랑했냐고? 그렇다. 6개월 동안은 정말 사랑했다. 통통한 몸과 볼록한 배와 달콤한 냄새와 그녀의 케이크와 꿈을 사랑했다. 하지만 딱 6개월 동안이다. 6개월이 지나 학위를 마치고 마침 서울에 괜찮은 자리가 나 부랴부랴 귀국을 했다. 껌처럼 그녀도 따라 들어왔고 그때부터 그녀가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마침 집에서는 기업가의 딸과 결혼하라는 종용을 한다. 만나보니 싫지 않아 그녀와 결혼준비 중이다. 그녀의 이름은 장채리. 그런데 하필이면 삼순이와 아는 사이다. 삼순이와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헤어졌다. 그런데 약혼을 앞두고 다시 만나게 된 삼순이가 그는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장채리와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순에 대한 호기심이 새삼 증폭된다. 옆에 있는 멋진 피앙세(진헌)가 질투심을 유발했든, 수컷의 본능적인 경쟁심이든, 옛사랑에 대한 케케묵은 소유욕이든, 삼순을 다시 갖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오른다. 

    작업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여자를 두고 실패한 적이 없는 쾌남아 민현우, 약혼하신 몸으로 위험천만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삼순에게 유치찬란한 구애도 하고, 진헌과 배꼽 잡을 주먹다짐도 하고, 삼순에게 상처 준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5. 장채리

26세. 현우의 약혼녀. 
◈ 예쁘고 늘씬하다. 꽃미남을 좋아한다. 꼬리 아홉 개쯤 감추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분명 어딘가에 숨겨놓고 있다. 항상 퀸카여서 퀸카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예의범절(?)이 몸에 배었다. 기업가의 딸로 오래전부터 진헌을 짝사랑 했으나 최근 몇 년은 신부수업을 받으며 맞선레이스를 벌여왔다. 그 결과 지금은 민현우와 결혼준비중이다. 핸섬하고 화사한 그가 몹시 마음에 들어 결혼에 필사적이다. 진헌과 그의 연인 희진과의 러브스토리를 거의 다 알고 있으며 그걸 무기로 틈틈이 삼순을 괴롭힌다.

◈ 약혼식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약혼식 케이크에 고춧가루를 넣은 게 삼순이 언니라는 걸. 그 이유가 삼순이 언니와 현우가 한때 연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불쾌함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내가 삼순이 언니랑 엮일 수가 있어? 
삼순이와 그녀의 관계는 집안내력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집에서는 할머니 대부터 삼순이네 방앗간만 이용했기 때문이다. 집안의 크고 작은 행사에 이용되는 떡은 물론이요 고춧가루, 참기름 등 양념일체를 삼순이네 방앗간에서 해결했다. 삼순이는 어릴 때 배달 가는 아버지를 따라 그 집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선배와 후배로 중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하지만 마주쳐도 데면데면, 타인과 같았다. 채리는 그때도 잘 나가는 퀸카였고 삼순이는 정말 삼순이다운 농구선수였으니까. 
러니 남자문제로 엮인다는 건, 장채리 그녀로서는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런데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 계속 벌어진다. 그녀가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현진헌이 삼순언니의 애인이라는 사실!  게다가 자신의 피앙세 현우마저도 삼순이 언니에게 돌아간다고 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아무래도 삼순이 언니와 끝장을 봐야 할 것 같다. 

6. 헨리 킴

30대 중반. 의사. 입양아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텍사스 주립대학 MD 앤더슨 암센터 방사선과 전문의. 두 살 때 미국에 입양되어 지금까지 거기 살았다. 신앙심이 돈독한 양부모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입양아라는 콤플렉스가 없다. 검은 머리이면서 서양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신앙의 세례를 받아 온후하고 너그럽다. 한국말은 잘 못한다. 워낙 말수가 적어 말 할 기회도 별로 없다. 암 치료차 서울에서 휴스턴까지 날아온 희진에게 반해 의사로서 남자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희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의사로서 신뢰하고 존경한다는 것을 잘 안다. 진헌에게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암세포와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녀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저 옆에서 보살펴주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희진이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5년이라는 완치기준 햇수를 안채우고 돌아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휴직계를 내고 뒤따라 한국에 들어온다. 그녀와 한 호텔에 머물면서 그저 주치의 자격으로 그녀를 보살피고 지켜준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구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헌이라면, 그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는, 그저 그녀가 완치되어 건강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았는데 그 안에 재발하면 어떡하나, 그는 그게 걱정이다. 후에 희진은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헨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회 이후에 등장하며 사랑의 최고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


[ 삼순이네 가족 ]

1. 박봉숙(53)

잔소리쟁이 알뜰쟁이 어머니. 입이 좀 거칠다.

  갓 스물에 배곯기 싫어 방앗간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와 2년 터울로 딸 셋을 낳고 아들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 마흔 넘어 늦둥이를 낳았건만 그 아이도 딸이라 네 자매의 어머니가 되었다. 딸을 넷이나 키우느라 알뜰함이 몸에 배어 거의 살인적이다. 집에는 시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이 더러 남아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게 개다리소반으로 다리 부러진 걸 고치고 또 고쳐서 남편의 술상으로 쓰고 있다. 시집올 때 가져온 반닫이는 아직도 옷장으로 쓰이고 있고, 역시 혼수였던 무겁디무거운 목화솜 이불은 그동안 몇 번이나 새로 틀었는지 모른다. 엄마와 아빠는 누가 뭐래도 묵직하게 눌러주는 목화솜 이불 애호가다. 숟가락 하나 쌀 한 톨 허투로 버리는 법이 없고 손 안에 들어온 건 꽉 움켜쥐고 절대 놓지 않는다.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궁상 그만 좀 떨라고, 딸들은 그렇게 말을 하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알뜰함에다 딸 넷을 키우며 뼛속 깊이 밴 그 절약정신이 배부르고 등 따습다고 봄눈 녹듯 없어지겠는가. 오히려 야단을 친다. 궁상? 이 싸가지 없는 년들아! 니들도 시집가서 더도 덜도 말고 딱 넷만 낳아 키워봐! 이런 살림으로 궁상 안 떨고 넷을 한꺼번에 키울 수 있을 것 같애?! 옛날 얘기만 나오면 딸들은 도망간다. 수십 수백 번도 더 들은 그 소리. 엄마도 옛날 생각만 하면 징글징글하다. 치약 한 통이 보름을 넘긴 적이 없고, 두루마리 휴지 한 통 아작 내는 건 시간문제다. 옷을 감당 못해 이 집 저 집서 얻어다 입히고, 바람 차가워지면 밤새 뜨개질을 해 털옷 짜 입히고, 먹는 것이든 생필품이든 무조건 싸고 크고 많아야 하고, 이영이와 삼순이가 머리채 잡고 싸우면 빗자루 들고 쫓아다니고... 그런데 그렇게 알뜰살뜰 절약을 해도 아낄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생리대 값이다. 세 딸(막내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한테 들어가는 생리대 값은 집안경제에 타격을 줄 정도였고, 엄마는 옛날 방식대로 면으로 대체하자고 했지만, 이번엔 착한 일영이까지 반기를 들어 세 딸이 합심해 반격해 오는데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매달 생리대를 돈 주고 사서 쟁여놓는데 사다놓기만 하면 게 눈 감추듯 없어지는 것이 그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그 딸들이 이젠 다 커서 때 되면 좋은 옷 사다 안기고, 또 때 되면 엄마 아빠 효도관광 시켜준다고 법석을 떨고, 어찌 됐든 저희들 키우느라 허리 흰 것 알아주니 내심 흐믓하기는 하다. 그래도 자식은 늙어죽을 때까지 애물단지인 법, 첫째는 사위가 고시생이라 안쓰럽고, 시집 잘 간 둘째는 덥석 이혼하고 돌아와 파란 눈이랑 연애한다고 짓까불고, 셋째는 혼기가 꽉 찼는데 살만 피둥피둥 찌고,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2. 일영(33)

착한 맏딸. 
 
  대한민국 맏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녀도 그렇다. 남들 한창 사춘기일 때부터, 둘째 이영은 창피하다고 얼씬도 안하는 방앗간에 나와 엄마 아빠를 도와주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민망하게도 늦둥이를 낳은 엄마의 산후조리를 도왔고 그 갓난쟁이를 자기 자식 키우듯 했다. 지금의 신랑이 된 재식과 데이트 할 때도 아기를 업고 나갈 정도였으니. 재식은 대학교 1학년 첫 미팅 때 만난 동갑내기 남자로 10년 연애하고 몇 해 전 결혼했지만 한 집에 살지 못한다. 그가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집어치우고 5년 전부터 고시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암자에서 칩거하는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모관대를 쓰고 꽃가마 태워 자기를 데려가기를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결혼도 약식으로 했다. 그때 남편은 1차에 붙은 상태였다. 2차도 붙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부모님이 서둘러 식을 올려주었다. 연애기간이 너무 길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내리 낙방이었다. 남편의 집에서 집 얻어주고 생활비 대줄 형편이 안 되니 붙을 때까지 떨어져 있자던 약속은 ‘잠시’가 ‘몇 년’으로 고무줄처럼 늘어나 버렸다. 일영에게도 돈 벌어올 특별한 능력은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리 부모지만 밥 얻어먹는 게 미안해 방앗간 일 도와주고 집안 살림 도와주고 막내 하늘이 보살펴주는 게 다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믿는다. 남들처럼 영리하지도 약삭 바르지도 못하지만 착하고 서글서글한 남편이 성공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사회생활을 별로 안 해 동생들보다 현실감각이 뒤떨어진다.

3. 이영(31)

똑똑한 개인주의자 둘째.

◈ 자매 중에 가장 튄다. 일영과도 다르고 삼순과도 다르고 돌연변이 같다. 외모도 자매 중에 가장 낫다. 월등히 낫다. 키가 크고 늘씬하고 볼륨 있다. 슈퍼모델 같다. 아이큐 좋고 영민하고 센스 있다. 어려서부터 자기 잘난 걸 알아서 왕비 기질이 있다. 감정적이고 욱하는 삼순이와는 달리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데다 교양 상식이 풍부해 자매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귀신처럼 알아내고 분석하고 판단한다. 우아하고 교양 있게 충고해주는 걸 몹시 즐긴다. 그 영민함으로 좋은 대학에 갔고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자가 되어 남자들의 이상형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연애사는 서른일곱 명의 남자를 거쳐 스물일곱 살에 마감된다. 모든 남자를 처분하고 맞선 모드로 전환, 냉철한 머리로 조건을 따져 대기업의 유망 샐러리맨인 지금의 남편과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해외 근무 나간 남편 따라 미국 가더니 달랑 이혼 서류 한 장 들고 돌아와 어머니한테 몽둥이찜질을 당한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평소 떡보다 빵을 좋아했는데 미국에서는 왜 그렇게 아버지의 시루떡이 먹고 싶던지... 친정에 돌아온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시루떡 먹기. 방금 막 쪄낸 시루떡을 평생 먹은 것보다 더 많이 먹은 것 같다. 그걸 보고 언니 일영은 네가 이제 철이 든 것 같다, 고 한다. 방앗간 집 둘째딸로 태어난 게 인생 최대의 실수라며 방앗간 떡은 손도 안 대던 그녀였으니...

 ◈ ‘뽈’과 연애한다. 뽈은 ‘보나뻬띠’의 외국인 쉐프다. 그녀가 미국에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 자신은 한국남자보다 외국남자가 더 잘 맞다는 것. 그런데 이 파란 눈의 청년은 무늬만 서양인이지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은 한국남자보다 더 하다. 더 동양적이고 더 보수적이다. 화장도 못하게 하고 미니스커트도 못 입게 하고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 극도로 싫어하고 할아범처럼 잔소리나 하고... 하지만 그런 이유로 헤어지기에는 뽈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 진헌의 가족 ]

1. 나현숙

50대 후반. 진헌의 어머니. XX 호텔 사장.
강남에 소재한 무궁화 다섯 개짜리 초특급 호텔의 소유주이며 경영자다. 전문 CEO 들도 인정할 만큼 경영능력이 뛰어나다. 젊어서부터 친정아버지인 나회장으로부터 사사를 받았고 호텔도 나회장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남편은 학문을 좋아하는 교수였으나 40대에 돌연사 했다. 아이들에게 낭만적인 성향이 있다면 그건 남편의 몫이다. 큰아이 진태가 가장 그랬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기대했던 둘째 진헌은 죄책감에서인지 밖으로만 돈다. 막내는 대학도 졸업 못하고 사고만 치고 다닌다. 남편복 없고 자식복 없는 팔자 센 여편네다. 가끔 문 걸어 잠그고 마리아 칼라스를 틀어놓고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한다. 한바탕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 그 힘으로 몇 달간 일에 매달린다. 이제 슬슬 진헌을 워밍업 시켜 이 호텔을 맡기고 싶은데 이 아이는 레스토랑에만 미쳐 있다. 게다가 삼순이라는 이상한 여자아이에게도 미쳐 있다. 그녀는 진헌을 빨리 결혼시켜야 한다. 진태가 남겨놓고 간 손녀딸 미주에게 엄마 노릇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헌과 삼순의 연애가 가짜인 것 같아 사람을 붙여놓기도 한다. 속정이 깊지만 웬만해서는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표현도 잘 안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애인이 있는 것 같다.


2. 현미주

7세. 조카. 죽은 형의 딸.
진헌에게는 평생 가슴을 아리게 할 존재. 죽은 형을 대신해 아빠노릇을 하지만 쉽지 않다. 사고후유증인지 아직도 말을 못한다. 병원에서도 정신적인 문제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저 아이가 알아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말을 안하는 것 외에는 정상이고,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다. 일주일에 한번 놀이치료에 참가한다. 진헌이 피아노 쳐주는 걸 좋아한다. 삼순이 아줌마도 좋아하게 된다. 그녀와 함께 케이크를 만들면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케이크 만들기가 훌륭한 놀이치료가 되었던 것...

3. 윤현숙

40 전후. 우아하고 엽기적인 싱글. 나현숙 사장의 비서. 

20대에 호텔에 들어와 Cashier, Front, Banquet 등 현장에서 근무하다가 서른 넘기면서 사무직으로 전환, 나현숙 사장의 비서가 된 지 10년 째. 눈빛만 보고도 나사장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안다. 가끔 예고도 없이 사장실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터져 나오면 알아서 전화 따돌리고 스케쥴 조정하고 한다. 얼굴도 예쁘고 독신주의도 아닌데 싱글인 이유를 사람들은 모른다. 그녀도 몰랐다. 한때 결혼하고 싶어 안달했는데 사주만 보면 남편 없다는 얘기가 나오자 이젠 포기했다. 40대의 독신생활은 적적하고 밋밋하긴 하지만 속은 편하다. 몇 년 전에는 아예 나사장의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산다. 그러니 공적인 업무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나사장의 오른팔이다. 전혀 웃음기 없고 날카로운 얼굴인데 하는 짓은 다소 엉뚱하여 같이 있는 사람까지도 엉뚱하게 만든다. 나현숙 사장도 윤비서와 함께 있으면 엉뚱해진다. 마침 나사장과 이름이 같아 주위 사람들은 몰래 ‘숙자매’라고 부른다. 본인들만 모른다. 


* 현진태, 진태처 30대 초반. 특별출연

[ 레스토랑 ‘보나뻬띠’의 식구들 ]

* 보나뻬띠 개요 *  

강북 삼청동이나 평창동 쯤에 위치한 대규모의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좌석 수는 100여석 이상이다. 부속 까페나 갤러리가 있어도 좋다. 레스토랑만 치면 20명에서 25명의 직원이 있으며 한달에 한번 정기휴일이 있고 나머지 하루는 돌아가며 OFF 한다. 홀은 오지배인과 장캡틴을 포함해 8명이고, 주방은 쉐프 폴과 박주임을 포함해 10명이다. 이 중 인혜는 베이커리 담당으로 삼순이 파티쉐로 들어오면서 함께 일하게 된다. 공간구조는 주방 옆에 베이커리실이 있어 문이나 서너 개의 계단으로 연결되면 좋겠다. 지하층이나 꼭대기층에 사장실과 쉐프와 지배인용 사무실이 있다. 작지만 깨끗한 직원식당도 있고 락카룸과 휴게실이 있다. 주차장이나 건물 외곽 한켠에는 농구대가 있어 직원들이 가끔 농구를 한다. 메뉴는 전적으로 쉐프 뽈의 영역이며 사장인 진헌과 오지배인이 함께 상의는 하지만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디저트와 케이크, 초콜릿 등을 담당하는 삼순은 뽈과 메뉴를 짠다. 처음에는 뽈이 레시피를 주지만 신뢰가 쌓이면서 삼순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넘기게 된다. 주방은 10시에 출근해서 2시 20분까지 점심영업, 쉬는 시간,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저녁 영업. 베이커리는 주방과 달리 오전 6시에 출근해서 빵과 케이크를 미리 굽고 오후 서너시쯤 퇴근한다. 주말 저녁에는 피아니스트가 와서 연주를 한다. 

1. 오여사

60대 초반. 총지배인.‘보나뻬띠’에 오면 누구나 한번씩 놀라게 되는데 홀 전체를 관장하며 미소 짓고 있는 총지배인이 환갑 넘은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의아하고 낯설지만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은 할머니 지배인이 주는 편안함을 좋아하게 된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전직이 초등학교 교사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운전 중이던 아들이 중앙선을 침범한 차와 충돌해 즉사한 것. 남편 죽을 때보다 더 기가 막혔다. 서른도 안 된 청대 같은 아들놈을 묻어야 하다니, 따라죽으면 좋으련만 목숨이 질겨 그렇게도 못하고, 사고 낸 놈을 멱살잡이 하며 울고불고 땅바닥을 구르고, 단아하게 늙어온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패악을 참 많이도 부렸다. 시간이 흘렀다. 아들 죽은 걸 부인하기도 하고 억울하고 원통해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1년을 그렇게 살았다. 1년 쯤 지나니 가해자의 가족도 두 명이나 죽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고 운전했던 청년은 다리가 부서져 아직도 걷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차도로 뛰어든 강아지를 보고 갑자기 피하려다 그랬으니 그 청년도 참 운이 없었구나, 안쓰러운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용히 그를 찾아가 위로도 해주고 힘내라고 손도 잡아주고 그랬었다. 그런데 1년 전쯤 지금의 사장인 그가 찾아왔다. 레스토랑을 오픈하니 와서 총지배인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지배인이라니, 평생 아이들이나 가르쳤던 그녀가 무슨 재주로. 하지만 그는 완강했다. 아이들 가르치듯 손님을 대하면 된다고, 이렇게 빚 갚음 하게 해달라고... 몇 년 전 정년퇴직하고 자식도 손주도 없이 쓸쓸하게 늙어가는 그녀를 진헌은 일터로 불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삼고초려 했고 어쩔 수 없이 그녀도 받아들였다. 이제는 이 일터가 삶의 낙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진헌을 죽은 아들 바라보듯 한다. 진헌도 살갑게 굴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상담도 하면서 제 엄마보다 더 신뢰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레스토랑 식구들은 사장과 그녀의 이런 관계를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오여사는 약간 신비한 인물이다.

2. 뽈(Paul)

28세.Chef. 부장. 한국말이 유창하다. 이다도시만큼 수다스럽고 수선스럽다. 프랑스인(꼭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된다)이지만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한국여자들이 왜 그렇게 성형을 하고 화장을 하고 꾸며대는지 알 수가 없다. 열세 살에 요리학교에 들어가 요리경력만도 15년이다. 5년 전 중국에 배낭여행 왔다가 별책부록처럼 서울구경 와서 지금까지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은 ‘인연’.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조그만 나라 한국에 이렇게 

오래 있게 된 건 다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말이 유창한 건 머리도 좋고 노력도 남달라서인데 문제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속담이나 속어(俗語), 고어(古語)를 구사한다는 것. 처음 한국말 공부할 때 누군가 장난으로 속담사전을 추천해 주었는데 그걸 닳고 닳도록 탐독해 자기 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을비는 떡비요, 겨울비는 술비다’ ‘고양이 치질 앓는 소리’ 등 속담 사전에 나오는 말은 물론이요 사극을 얼마나 열심히 시청하는지 ‘뭬야?’‘은혜한다’‘기루다(그리워하다)’라는 말도 쓸 줄 알고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건지 돗고리, 군둥내, 속닥하다, 등등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단어들을 많이 알고 있다.
같은 주방에 있는 삼순의 언니 이영과 연애한다. 꾸미기 좋아하는 그녀를 호통 쳐 맨얼굴로 다니게 하고, 청바지에 티셔츠 달랑 걸치게 만들고, 10cm짜리 하이힐 벗겨 운동화 신게 만든다. 

3. 이인혜

22세. 주방 베이커리. 요즘 아이 같지 않게 맑고 순진무구하다. 저 밑에, 전라남도 어느 도시의 관광관련전문대를 졸업하고 이 곳에 취직이 되어 상경했다. 면접 볼 때 처음 서울구경을 했을 만큼 촌아이다. 과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취직이고 고향에서는 서울에 취직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사 났다고 했었다. 서울 생활 6개월째. 그녀는 아직 서울이 무서워 자취방과 레스토랑 외에는 가본 데가 별로 없다. 표준말도 잘 못쓴다. ‘아니어라’ 하다가 ‘아니에요’ 하는 건 너무 어렵다. 레스토랑 안에서는 삼순과 잘 통하는 사이로 삼순에게 제과를 열심히 배운다. 세상물정 모르지만 자기만의 소박한 꿈과 줏대를 갖고 있어 어른스럽기도 하다. 사장의 동생 진영이 자꾸 쳐다보는 게 싫다. 하지만 그와 정이 들고 만다. 

4. 장영자

27세. 홀 안내. 오지배인과 장캡틴 다음으로 홀 고참이다. 자기가 예쁜 줄 안다. 공주병이 중증이다. 나름대로의 미모를 무기로 진헌에게 눈독을 들인다. 당연히 삼순이가 눈에 가시다. 툭하면 으르렁대며 영자씨! 삼순씨! 하며 각자의 치부를 건드린다. 찜 했던 진헌이 삼순과 연애를 하자 그 동생인 진영에게 손을 뻗친다. 그런데 이번엔 인혜에게 뺏긴다. 아무래도 성형을 더 할 것 같다.

 웨이터1, 2,3  웨이츄리스1, 2, 3...
 요리사1, 2, 3, 4... 아라이(접시닦이) 한 명...

< 그 외의 등장인물들 >
◈ 최재섭 - 진헌의 친구. 재벌가의 도련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진헌이 하는 짓(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삼순이를 만나고...)을 우습게보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다. 희진과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 이병숙 - 삼순의 중고교 친구. 대학 농구부로 진학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 농구부 코치를 하고 있다. 경기가 열리면 삼순이 빵과 과자를 만들어 응원을 가고는 한다. 삼순이보다 더 뚱뚱하다.
◈ 김윤아 - 가수 김윤아. 진헌과 초중고교 동창이며 어머니들끼리도 동창이다. 허물없는 사이. 가끔 기분 내키면 불쑥 찾아와 노래 몇 곡 부르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 미행남 - 이혁재. 이름도 신분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싸나이. 진헌과 삼순의 연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시하기 위해 나사장의 지시로 윤비서가 붙여놓은 사람. 얼마나 어리숙한지 미행을 다 들킨다. 혼자만 진지하고 비장하다.
- 그 외 레스토랑 ‘보나뻬띠’의 인상적인 손님들. 

 

 

<줄거리>                              

1. 잔인한 크리스마스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삼순이는 변장을 하고 호텔에 들어선다. 얼마 전부터 수상한 기미를 보여 오던 애인 민현우를 그녀는 지금 미행하고 있다. 설마 했는데 현우는 미모의 여자와 호텔룸으로 올라가고, 삼순은 룸서비스를 가장해 룸에 들이닥친다. 여자는 욕실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고  현우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색다른 정사에 들떠있다. 삼순이가 누구인가. 전직 농구선수 아닌가. 힘차게 점프를 해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그의 머리를, 드리블 하듯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필이면 왜 크리스마스이브야. 나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남자친구랑 좀 있어보자. 어? 이 빤쓰! 이거 내가 사준 거잖아! 야 이 개새끼야. 딴 여자 만나면서 내가 사준 빤쓰를 입고 싶디? 이 년 어디 갔어. 이 년은 빤쓰 사줄 돈도 없대?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바람난 자기 남자한테 이렇게 해댈 수 있는 여자, 많지 않다. 아무리 괄괄하고 화끈한 삼순이래도 이런 짓, 못한다. 삼순이는 수십 번을 망설인 끝에 현우를 커피숍에 불러낸다.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삼순은 이를 갈고 칼도 간다. 어떤 표정으로 나올까. 그 얼굴에 침을 뱉어줄 테다. 정강이도 걷어찰 테다. 너랑은 이제 끝이야! 라고 외치고 말테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한다. 대신 울음을 터트린다. 현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절절했던 사랑이 생각나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신파도 떨어본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 중에는 현진헌도 끼어있다. 진헌은 조카 미주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보살펴줄 숙모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에 못이겨 맞선을 보러 나온 참이다. 그런데 한쪽에서 뚱뚱한 여자가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고불고 한다. 크리스마스 특별쇼인가보다. 진헌은 두 남녀에게 냉소를 보내고 맞선끝내기에 돌입한다. 무례하기 굴기. 맞선을 일찍 끝내는 방법. 결국 15분 만에 맞선은 끝이 나지만 그는 화가 난 맞선녀로부터 물세례를 받는다.

현우는 언제나처럼 청산유수다. 삼순이는 알 수 없는 어려운 단어의 조합들이 입에서 흘러나오면서 현우는 바람을 피운 게 아닌 게 되고, 삼순이는 오바한 게 되고, 결국 오늘의 잘못은 삼순의 몫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현우의 결론은 헤어지자는 것. 너는 나를 못 믿는다, 나를 못 믿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인연이 아니다. 삼순이는 로비 화장실에 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가진 것도 잘난 것도 없지만 민들레처럼 열심히 살아온 인생, 이상하게도 남자문제는 잘 풀리지가 않는다. 현우와 사귄지 3년째, 모든 걸 주었건만 결국은 헤어지고 말았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린다! 이럴 수가! 멀끔한 남자들이,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그럼, 그녀의 행색은? 뺨에 두 줄기 계곡을 만든 시커먼 마스카라 눈물, 숨 막히는 코르셋을 벗느라 반쯤 벗어젖힌 블라우스, 코르셋의 어깨 끈이 내려와 한쪽 가슴은 반이 드러나 있고, 갑갑한 스타킹도 반쯤 벗은 상태에, 발기척 하느라 쭉 뻗은 통통한 다리... 문을 열어젖힌 진헌이 어이없다는 듯 일갈한다. 뭐야 당신, 변태야? 물에 젖은 옷을 닦으러 화장실에 들른 진헌은 이렇게 볼썽사나운 여자는 처음 본다. 누가 데려갈지 참 불쌍타. 삼순은 억울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를 구분 못한 죄로 가슴 반쪽을 처음 보는 남자한테 공개하다니, 정말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최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대목장사에 무단외출을 했다고 그녀는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애인 잃고, 직장 잃고, 가슴 반쪽의 순결을 잃고... 정말 잔인한 크리스마스다. 후... 왜 나이 들수록 사람 만나는 게 더 어려워지는 건지... 사랑을 거듭하고 나이가 들면 그만큼 익숙해지고 쉬워져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건지... 아듀~ 다시 오지 않을 나의 스물여덟이여!

봄이 오면 삼순이네 가족은 의례히 봄나물을 뜯으러 간다. <삼순이네 방앗간>의 100% 자연산 쑥떡은 단골들에게 유명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고, 잔인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삼순은 봄나물을 뜯으며 심기일전해 스물아홉의 세부적인 계획을 세운다. 안정된 직장 갖기, 애인 만들기, 살 빼기, 마이카 갖기, 아 참, 개명하기! 등등... 그녀는 현우와 헤어지고 홧김에 마신 술이 모두 살로 가 현재 62kg이다. 통통하던 몸은 이제 뚱뚱하다. 뚱뚱한 김삼순, 마이카를 갖기 위해 인터넷의 중고차 직거래시장을 훑어보다가 소나타를 백만 원에 판다는 남자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남자가 너무 어리다. 기껏해야 20대 초반 밖에 안 보이는데다 아무리 오래 됐어도 소나타를 백만 원에 판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귀 얇은 김삼순, 설레발 떠는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시운전도 해본다. 그런데 아뿔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그들, 수갑 차고 경찰서로 끌려간다. 도난차량이었던 것이다. 

 

진헌은 파티쉐가 갑자기 프랑스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한다. 그를 데려오느라 얼마나 많은 공과 돈을 들였는데... 쉐프인 뽈과 싸우고 홧김에 비행기를 탄 모양인데 시급한 건 당장 디저트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이다. 진헌은 일단 어머니의 호텔 베이커리에서 빵과 디저트류를 공수해온다. 덕분에 호텔에 들어갔다가 어머니한테 한소리 듣는다. 결혼은 어제 할 건지, 호텔에는 언제 들어올 건지, 진영이 집 나가 속 썩인다는 이야기까지... 그러고 레스토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는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진영이 차량절도로 잡혀있다고 한다. 

진영이 훔친 차는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악질 선생님의 것이다. 그가 시동을 켜놓은 채로 근처에서 볼일 보는 걸 우연히 목격하고는 골탕 먹일 심산으로 차를 훔쳤고, 순전히 장난삼아 그 차를 팔기 위해 삼순을 만난 것이다. 진영이 진술을 하고 있을 때 들이닥친 진헌은 진영에게 주먹을 날리고 구둣발도 날린다. 경찰과 삼순이 달려들어 말린다. 그런데 헉! 그 놈이다! 나를 변태로 만든 놈! 내 가슴 반쪽의 순결을 앗아간 그 놈! 그 놈이 차량절도범의 형이란다. 정말 재수 없는 브라더스다. 게다가 진헌은 더 싸가지 없게 나온다. 무슨 여자가 세상물정을 그렇게 모르냐, 5년 밖에 안 된 소나타를 백만 원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큰소리다. 열 받은 삼순, 당신 동생 때문에 수갑 찼으니 위자료 내놓으라고 맞장을 뜬다. 거기다 대고 진헌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몸이 참 푸짐하신데 차타지 말고 걸어 다니시지 그래요, 그러다 또 실연 당하면 이번에도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건가? 진헌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잠자는 암고양이를 그렇게 건드리면 안되는 거였다. 진헌은 양쪽 뺨에 오선지를 그린 채로 경찰서를 나선다. 

 

그날 밤, 삼순의 집에서도 진헌의 집에서도 생일파티가 열린다. 삼순이네 집에서는 막내 하늘의 생일이고, 진헌의 집에서는 조카 미주의 생일이다. 그런데 생일케이크가 바뀌어버렸다. 진헌의 집에는 슈렉 모양의 요상한 캐릭터케이크가, 삼순이네 집에는 십만 원은 족히 넘을 일급베이커리의 최고급 케이크가 펼쳐져 있다. 진상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삼순이는 학원에서 강사를 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작업대를 빌려 슈렉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었고 그 상자를 든 채로 중고차를 보러 나갔다. 진헌은 택시에 타기 전에 강남의 일급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를 샀고 그걸 든 채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 경찰서에서 케이크상자가 바뀐 것이다. 진헌은 삼순이만큼 우습게 생긴 슈렉 모양의 케이크를 보며 빈정대다가 맛을 보고는 감탄한다. 그리고는 전화번호를 수배해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삼순은, 이력서를 갖고 방문하라는 그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장난으로 넘기기에는 그의 말은 힘이 있고 진지했다. 하여, 오늘 그녀는 이력서와 방금 구운 케이크와 과자 몇 개를 포장해 이곳 ‘보나뻬띠’에 왔다. 이 왕싸가지한테 심사를 당하는 게 몹시 싫지만 일단 참아보기로 한다. 진헌은 이 변태녀가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와 과자를 만든다는 게 아직 믿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직접 만든 거냐고 두 번을 더 물어보고 결국은 그녀를 임시고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감지덕지해야 할 삼순이 제동을 건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2. 미친 일요일 - 우리, 연애할래요? 
  
  조건이 있다고? 진헌은 코웃음을 친다. 이력서를 보니 파리에서 ‘르 코르동 블루’를 졸업한 거 외에는 특별할 게 없는 경력이다. 그 경력으로 강북 최대의 프렌치 레스토랑 ‘보나뻬띠’의 파티쉐로 앉혀주겠다는데 감히 조건을 달어?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는 기상천외한 말이 흘러나온다. 

 “제 이름을 김희진으로 해주세요.”

삼순이 내건 조건은 바로 그것이다. 이제부터 자기 이름은 김삼순이 아니라 김희진이라는 것. 그러니 당신도 그렇게 부르고 레스토랑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소개해 달라는 것. 요절복통할 만큼 희극적인 상황인데 진헌은 잠시 멍해진다.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 희진... 유희진... 병실에서 본 마지막 그녀의 모습... 3년만 기다려줘, 3년 후에 돌아올게. 꼭 돌아올게... 삼순은 영문을 모르므로 진헌이 웃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왕싸가지 그가 다시 보인다. 어쨌든 삼순은 레스토랑 ‘보나뻬띠’에 임시파티쉐로 고용된다. 보나뻬띠는 규모가 커 중소기업과도 같다. 주방만 해도 Cook과 Bakery와 Dishwasher를 포함 10명이고 홀은 8명, Parking 2명, 직원식당 과 Laundry를 맡는 아줌마 셋 등, 총 25명에 가깝다.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Manager는 환갑이 넘은 오여사다. 진헌은 이들에게 삼순을 소개한다. 새로 온 파티쉐 김희진씨 입니다. 그러나 곧 삼순의 진짜이름이 폭로된다. 순진하고 원리원칙주의자인 뽈에 의해서.

그리고 한달이 흘렀다. 삼순은 빨리 적응했다. 수다스럽지만 요리천재인 뽈, 군기 잡는 박주임, 어렵지만 너무 멋진 오지배인님, 귀여운 인혜, 괜히 그녀를 경계하는 영자씨까지 모두들 재미있는 사람들 같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 삼순은 새로운 레시피를 고안해내느라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삼순은 보나뻬띠가 좋다. 사장인 현진헌만 빼고. 다행히 그와 개인적으로 마주칠 일이 없다. 그녀는 주방장인 뽈과 메뉴를 조절하면 그 뿐이다. 삼순은 열심히 일해 정식 직원이 되리라 다짐한다. 몇 달 일해보고 괜찮으면 정식으로 고용하겠다고 진헌은 그랬었다.

 

한달에 한번 쉬는 일요일이 돌아온다. 삼순이 ‘미친 일요일’이라고 명명한 바로 그 날! ‘잔인한 크리스마스’만큼은 아니지만 두 번째로 끔찍한 하루! 그 날, 삼순은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맞선을 보러 간다. 선이란 건 그런 거다. 혹시나 하고 나갔다가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것. 알 수 없는 건, 그러면서도 매번 나간다는 사실... 어쨌든 오늘은 삼순이가 맞선 보는 날!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 차려입고 나갔는데... 이게 웬일? 따봉! 심봤다! 백마 탄 왕자는 아니어도 민현우 그 자식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늑대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 아닌가? 너무 좋아 표정관리 안되는 김삼순, 간신히 안면근육 정돈하고 새살새살 내숭을 떨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꽤나 애를 쓴다. 상대도 삼순에게 관심을 보인다. 오늘 헤어질 때까지 이런 분위기라면 삼순은 그와 논스톱으로 결혼하리라 결심한다. 하지만 바로 3분 20초 뒤에 삼류신파가 벌어질 줄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맞선을 보던 진헌은 맞선녀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자 당황해한다. 아무리 모욕을 주고 자존심을 긁어도 이미 소문을 들었는지 먹히지가 않는다. 그때 삼순을 보았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애교와 내숭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는 벌떡 일어나 삼순에게로 다가갔다.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호의 고수처럼, 그는 삼순에게 다가와 칼을 휘두른다. 삼순아, 미안해! 그리고는 그녀를 덥석 안아버린다. 진헌은 연극을 하고 있다. 삼순이라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부모가 반대해 억지로 선을 보러 온 것처럼. 삼순이도 다른 남자를 만나러 온 것처럼.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나자 눈물의 해후를 하는 것처럼. 맞선녀가 파르르 떨며 나가고 맞선남은 부르르 떨며 나간다. 삼순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진헌의 따귀를 갈기고 정강이도 걷어찬다. 

 

‘미친 일요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삼순은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진헌이 그 답지 않게 뻘쭘한 자세로 쫓아온다. 삼순의 하는 양을 보고는 자신이 잘못을 해도 단단히 잘못했다는 걸 간파했다. 이러다가는 쓸만한 파티쉐를 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된 진헌은 돈으로 승부를 걸어본다. 월급 5% 인상. 10%. 15%. 정직원 승격! 그러자 삼순이 멈춰 돌아본다.

 

‘당신은 누구한테 거절 당해본 적 있어요? 누구 앞에서 한없이 작게 느껴진 적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사람한텐 흔한 일이겠지만 난 아녜요. 오늘 그런 사람을 만났어요. 내년이면 서른인데 그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 거 같아요? 당신이 내 마지막 남은 행운을 짓밟아 버린 거라구 이 새꺄!’

 

진헌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깟 일이 그렇게 상처가 될 줄도 몰랐거니와 그 말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누구한테 거절당해 본 적 있어요? 있냐고? 그래요, 있어요. 아주 처절하게,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거절당하고 버림 받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 참 웃겨. 왜 자기만 그런 상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진헌은 그렇게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돌아서는 그녀의 눈가에 얼핏 눈물이 어리는 것 같아서... 

 

삼순은 근처에 있는 남산 산책로를 걷기 시작한다. 걷다 지치면 벤치에 앉아 홍보용 음료도 얻어 마시고 케이블카도 타고 전망대 가서 구경하고, 산책로를 걸어 내려오고, 네온이 켜지기 시작한 거리를 걷다가 노래방 가서 목 터지게 노래도 부르고, 마지막으로 포장마차에 가서 술과 밥과 안주를 먹기 시작한다. 참이슬, 우동, 김밥, 꼼장어, 계란말이... 삼순은 그걸 다 먹어치우는 신공을 구사한다. 진헌은 생각한다. 저 여자, 평생 혼자 살아도 심심하진 않겠군. 그때 술 취한 아저씨가 삼순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삼순이 받아주지 않자 처음엔 말폭력을 쓰더니 이젠 주먹까지 쓸 기세다. 진헌이 나서서 눈 깜짝할 새에 아저씨를 제압한다(그는 태권도 검도 유도 유단자다. 수영은 강사자격증까지 있다). 무협영화에서 혈을 눌러버린 것처럼, 마치 먹는 신공을 보여준 삼순에게 화답하듯이. 결국 두 사람은 합석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나누어 마신다. 거기서 진헌은 삼순을 새롭게 본다. 여전히 자신을 밥맛없어 하지만 스스로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양심적이라는 것, 자신과는 다른 세계(평범하고 따뜻한)를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은 귀엽다는 것... 

 

‘미친 일요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술자리가 파하자 삼순은 모자란 술값을 계산하기 위해 365일 캐쉬로비를 찾아가고, 비틀거리는 그녀를 따라 진헌도 캐쉬로비에 들어가고, 9:59에서 10:00이 되는 순간 캐쉬로비는 문이 닫힌다. 취한 삼순은 그것도 모르고 ‘한국에서 노처녀로 산다는 것’에 대한 비애를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다가 방금 먹은 모든 것을 토해내고 그대로 뻗어 버린다. 은행 당직자가 달려오고, 진헌은 당직자의 감시 하에 삼순이 토해낸 걸 깨끗이 치우고, 거의 쌀 한 가마에 가까운 그녀를 엎고 자신의 오피스텔까지 오게 된다. 그래서 진헌에게도 그 날은 ‘미친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미친 일요일’의 여진(餘塵)은 계속된다. 다음날 진헌의 오피스텔에서 삼순은 벌거벗은 채로 눈을 뜨고, 진헌이 자신의 옷을 벗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성난 들소처럼 분기탱천해 있는데... 그때...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이가 있었으니 진영과 나사장과 윤비서 세 사람이다. 나사장은 어제의 맞선 소식을 듣고 도대체 삼순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날이 밝자마자 진영을 앞세워 들이닥친 것인데 벌거벗은 뚱뚱한 여자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걸 보자 확 열이 오른다. 가라는 장가는 안가고 삼순이는 누구며 저 뚱뚱한 여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놀란 진헌과 삼순을 대신해 진영이 친절히 알려준다. 저 누나가 삼순이에요.

 

삼순은 보았다. 천하의 왕싸가지 현진헌도 천적이 있다는 걸. 제 어머니에게 할 말은 다 하면서도 공손하다는 걸. 그리고 그의 차가움이 제 어머니에게서 내림하였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사장은 삼순에게 예의를 갖추어 말하지만 눈매만은 그지없이 서늘하다. 나사장은 진헌에게 삼순을 데리고 정식으로 인사를 오라고 이르며 오피스텔을 떠난다. 졸지에 진헌의 애인이 된 삼순은 따로국밥집에서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선지가 듬뿍 든 국밥을 앞에 두고 진헌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김삼순씨! 우리, 연애할래요?”


3. 연애계약서

읍! 삼순의 입에서 씹다만 밥알들이 튀어나간다. 파편화된 선지도 튀어나간다. 뭐라구요? 진헌이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나는 결혼하기 싫다. 그러니 맞선도 보기 싫다. 맞선을 안보려면 가짜 애인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6개월만 가짜 애인 노릇을 해주면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다. 즉, 나와 연애하는 척을 하자는 말이다.’진정한 싸이코군. 삼순은 콧방귀를 뀌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진헌은 출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그녀를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삼순이 왜 하필이면 나냐고 묻자 진헌은 또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 나 밥맛없어 하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러니 연애할 일 없을 거고, 또 주제파악 잘 하는 당신이 양심적인 것 같아서’저렇게 싸가지 없는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삼순은 안 되는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한다. ‘나, 서른이 되기 전에 시집가야 돼. 그러니 너하고 가짜 연애할 시간이 없어. 나한테 필요한 건 진짜 연애라고!’

 

삼순은 진헌의 집에서 잤다는 걸 숨기기 위해 시간차를 두고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그러나 헛수고. 진헌은 자기랑 밤새 있느라 지각했으니 야단치지 말라고 오지배인에게 당부한다. 가짜연애를 거절당한 복수를 저렇게 하는군. 덕분에 삼순은 하루 종일 영자씨의 도끼눈과 다른 여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밤... 하룻밤을 외박하고 돌아온 삼순은 어머니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대문을 들어서는데... 이것도 ‘미친 일요일’의 여진일까? 집이 넘어가게 생겼다.

아버지가 조그만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의 빚보증을 서준 적이 있다. 그런데 불경기라 사정이 여의치 않자 작은아버지는 어디론가 잠적해 버리고 대신 은행에 담보로 넣어둔 이 집이 넘어가게 되었다. 집안은 온통 먹장구름이다. 아버지는 네 딸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무능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를 오징어 씹듯이 잘근잘근 씹어 먹을 태세다. 네 딸은 둘러앉아 대책을 강구하며 서로에게 있는 돈을 긁어모으지만 절망적이다. 삼순은 이 집을 무척 사랑한다. 열 살 쯤 이 집에 들어와 20여년을 살았다. 그동안 아버지는 뜰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딸들을 위하여 그네도 만들고 어머니는 뒤뜰에 텃밭을 일구어 야채쌈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삼순의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의 상여도 이 곳에서 나갔고 막내 하늘이도 이 집에서 태어났다. 비 오면 낙숫물 듣는 소리가 좋고 가을이면 낙엽 태우는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삼순이가 시집을 가도 친정은 이 집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집이 아닌 다른 집을 친정이라고 찾아가는 일은 상상만 해도 싫다. 그래서 삼순은 진헌을 찾아간다. 아직도 그 제안이 유효하냐고 묻는다. 진헌은 유효하다고 하자 삼순은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대신 5천만원만 빌려달라고 한다. 진헌은 앉은 자리에서 5천만원짜리 수표를 끊어준다. 삼순은 아주 잠깐, 허탈하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의 생사를 결정짓는 큰 돈이 젊은 남자의 손에서 저렇게 쉽게 나오다니... 삼순이 돈을 받아들고 나서는 순간, 진헌은 삼순의 손을 덥석 잡고 홀로 나가 런치 세팅을 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공표한다. ‘우리, 연애중입니다. 두 달 됐습니다.’레스토랑에는 어머니가 심어놓은 스파이 하나쯤 있을 거라고 진헌은 생각한다. 그래서 가짜정보를 흘린 것이다. 영자씨는 도끼눈으로 삼순을 찍어 넘길 태세다.

삼순의 자매들은 진헌을 탐색하러 온다. 둘째 이영은 작년 ‘잔인한 크리스마스’때 미국에서 돌아왔다. 남편 따라 미국 갔다가 달랑 이혼서류만 들고서. 세 자매는(앞으로 삼순의 연애에 감 놔라 대추 놔라 온갖 참견을 한다) 남자문제만큼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삼순이 걱정이 되어 이런저런 코치를 하는 중이다. 집을 살리겠다는 갸륵한 희생정신으로 가짜연애를 하는 삼순이가 행여 상처 받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래서 현진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른 것인데, 이 남자, 참 댄디하다! 이영은 연애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짜 연애를 권한다. 신데렐라가 되라고 한다. 일영은 만류한다.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하는 게 현명한 거라고 어른스럽게 타이른다. 삼순은 이영언니처럼 이혼한 신데렐라로 사느니 씩씩한 싱글로 남겠다고 한다. 그 날, 이영은 이상한 주방장 뽈과 대판 싸운다. 그 날 뽈은 주방장 특선 디저트로 크레이프를 내놓았다. 그리고 가끔 하던 대로 크레이프 접시를 들고 테이블에 직접 서빙을 했다. 그런데 이영은 손도 대지 않는다. 자존심 상한 뽈은 자꾸 크레이프를 권하고, 이영은 먹기 싫다고 하고, 수다스럽고 오지랖 넓은데다 다혈질인 뽈은 급기야 화를 내고, 자기 요리 안먹는다고 화내는 주방장을 처음 본 이영은 기가 막히고, 한걸음 더 나가 뽈은 이영의 요란한 차림새를 타박하고, 사생활을 침범당한 이영은 뽈의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이고... 둘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편, 현우의 친구 재섭은 현우에게 생겼다는 애인을 보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른다. 현우와 삼순은 재섭 앞에서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를 하고 재섭은 희진의 소식을 전해주려다 그만 둔다. 이제야 마음잡은 그가 새 애인과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무래도 새 애인이 좀 이상하다. 하긴, 진헌이 이 놈은 어려서부터 취향이 좀 남다르긴 했다. 

 

또 다른 한편, 진헌은 사고뭉치 진영을 주방 Dishwasher로 들어앉힌다. 사고를 쳐도 주방 안에서만 치겠지. 그 정도면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진영으로 하여금 역스파이 노릇을 하게 하는 것. 레스토랑 안에 있을 얼굴 없는 스파이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순진무구한 진영을 이용해 나사장에게 가짜정보를 흘리는 게 그로서는 훨씬 쉬운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영은 진한 남도사투리를 쓰는 인혜에게 필이 꽂힌다.

며칠 뒤, 진헌은 삼순을 인사시키기 위해 집으로 데리고 간다. 나사장은 찬찬히 삼순을 살펴보며 의아해한다. 희진을 못 잊는 것 같더니 어쩌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아가씨에게 빠진 걸까. 아무리 뜯어봐도 진헌이 사랑에 빠질만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나사장은 진헌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교제를 허락한다. 한편 조카 미주는 삼순과 밀가루 반죽을 하며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푼다. 낯가림이 심한 미주가 그렇게 일찍 경계심을 푼 적이 없는데, 진헌은 삼순이 고맙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고마움은 채 한 시간도 못 간다. 사단은 생뚱맞게 한 곡의 노래에서 시작된다. 미주가 진헌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달라고 졸랐고, 진헌은 미주를 위해 몇 곡의 재미난 연주를 해주었고, 아이처럼 들뜬 삼순은 자기도 신청곡을 넣었고, 진헌은 그 곡만은 절대로 연주할 수 없다고 했고, 오기가 발동한 삼순은 강요와 협박을 했고, 화가 난 진헌은 피아노 뚜껑을 꽝 닫고 나가버린 것이다. 삼순은 어이가 없다. 피아노 좀 칠 줄 안다고 유세를 떠는 건가? 하긴, 유세를 떨 만도 하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는 잘 생겼다. 햇살 쏟아지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얼굴만큼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는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눈이 부실만큼... 남자도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삼순은 처음 알았다. 하지만 아름다우면 뭐하나, 마음이 고와야지. 저렇게 심술을 부리면 아름다운 얼굴 오십도 안되어 망가질 게 틀림없다. 그런데 진영이 그 곡에 대한 사연을 귀띔 해준다. 그 곡은 형이 전에 사귀던 여자가 좋아하던 거라고, 그 여자와 6년이나 연애를 했다고, 사고 후 바람처럼 그 여자는 떠나갔다고, 그래서 형은 더 삐딱해졌다고... 삼순은 뜻밖이다. 저 서늘한 왕싸가지가 사랑이라는 걸 했었구나... 그런데 그 곡이 그 여자가 좋아하던 곡이라고?  Over The Rainbow... 나처럼 이 노래를 좋아한 여자, 그 여자가 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왠지 속이 쓰리다. 

어머니의 집을 나오자 진헌은 삼순을 까페에 데리고 가 ‘연애계약서’라는 걸 쓴다. 가짜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 아까처럼 사적인 영역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냅킨에 쓴 합의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진헌과 김삼순은 서로의 합의하에 6개월 간 연애하는 척을 한다.

2. 김삼순은 5천만원을 받은 대가로 현진헌이 하는 모든 일에 협조한다.

3. 현진헌은 김삼순을 존중한다.

4. 쌍방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5. 스킨쉽을 하지 않는다.

6. 연애하는 척만 하되 연애는 하지 않는다.

 

이 해괴망측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얼마나 다정한지 모른다. 어머니가 붙여놓은 미행남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앉아 살벌한 계약서를 주고받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엽기적인 오후다. 그 날 이후 삼순과 진헌은 연애하는 척을 하느라 자주 만나게 된다. 미주와 하늘을 끼고 넷이서 수영장에도 가고 농구장에도 간다. 수영장에서 삼순은 근육질인 진헌의 몸 앞에서 주눅이 든다. 하지만 초등학교 농구시합이 끝난 텅 빈 농구장에서는 기세가 등등하다. 키 큰 진헌이 꼼짝을 못한다. 미주의 웃음소리가 체육관에 퍼진다. 진헌은 가슴 한쪽이 아파온다. 저렇게 웃고 뛰노는 모습을 형과 형수가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유희진이 귀국을 한다. 꽃처럼 아름다웠던 그녀, 핏기는 없지만, 그래서 더 청초한 모습으로, 안개꽃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그녀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진헌의 모친, 나사장이다. 그때 나사장은 희진의 병을 알고 있었다. 진헌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게 좋지 않느냐고 충고한 것도 나사장이었다. 나사장은 제 아들을 먼저 챙기는 이기심이었지만 희진은 그녀를 이해했다. 나사장은 희진에게 병은 완치되었느냐고 묻고 희진은 그렇다고 대답한다(아직 재발의 예후는 없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나사장은 유감스럽게도 진헌에게 새애인이 생겼다고 귀띔해 준다. 희진은 내심 큰 충격을 받는다. 3년, 그녀가 암세포와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동안 그는 새로운 여자를 만들었다. 희진은 나사장의 충고대로 진헌을 속이고 떠난 걸 후회한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하루 빨리 진헌을 되찾으리라... 죽음과 싸운 3년 동안, 희진은 더더욱 단단해졌다. 희진은 진헌과 함께 쓰던 커플핸드폰을 꺼내본다. 3년도 더 된 핸드폰은 이제 몹시 구형이다. 희진은 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진헌의 구형핸드폰은(현재 쓰는 건 다른 핸드폰이다)은 책상 서랍 속에 곱게 모셔져 있다. 매일 그 전화로 전화 오기만을 기다리던 진헌은 오늘따라 핸드폰을 열어보지 않는다.

한 쌍의 커플이 약혼식 예약을 하러 보나뻬띠에 들어선다. 예비신부인 장채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혼식만큼은 이 레스토랑에서 치르고 싶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진헌에게 자신의 피앙세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오지배인과 세부사항을 검토하던 채리는 삼순과 마주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귀동냥으로 소식만 전해 듣던 그들은 오랜만의 만남에 수선스럽다. 채리가 약혼식을 이 곳에서 치른다고 하자 삼순은 최고의 케이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뒤늦게  예비신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삼순은 최악의 케이크를 만들어야 될 것만 같다. 장채리의 예비신랑은 삼순에게 가장 잔인한 크리스마스를 선물한 그 남자, 민현우다!

4. 옛사랑 & 첫키스
  
그날 밤, 퇴근하는 삼순을 현우가 기다리고 있다. 현우는 내내 삼순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그 눈길에 삼순은 녹아나는 것 같다. 그래, 옛날에도 저 눈으로 나를 봤어. 옛날의 그리움과 애틋함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현우의 눈길 한번만으로도 삼순은 그렇게 설레어한다. 그 점을 현우는 알고 있다. 적당히 술에 취해 아무 말 없이 그윽하게 바라만 보아도 여자들 가슴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그 날 밤 현우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삼순은 계속 심란하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나? 나를 찬 걸 후회하고 있나? 별별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우성이지만 현우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다. 그는 약혼 준비하느라 삼순이 생각할 여력이 없다.

진헌과 삼순이 가짜연애를 한 지 30일(공식적으로는 석 달째) 째, 진헌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삼순의 집으로 찾아간다.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연애하는 척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며칠 전 싸우고 남은 앙금을 없애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싸움의 원인은 미주다. 미주는 일주일에 한번 심리상담사에게 놀이치료를 받으러 간다. 아무리 바빠도 그 날만큼은 꼭 미주를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던 진헌이었는데 그 날은 다리가 너무 아팠다. 몇 달 만에 찾아온 극심한 통증이었다. 그래서 삼순에게 부탁을 했고 삼순은 미주가 하는 놀이치료를 보고는 자기도 도와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함께 케이크를 굽고 과자를 굽고 초콜릿을 만드는 것. 자기가 먹을 색색깔의 과자를 굽는데 좋아하지 않을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장 미주를 데려와 과자 굽는 법을 알려주었다. 미주는 몹시 좋아했다. 이를 본 진헌은 감동스러워하며 미주가 말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빌려간 5천만원 안갚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삼순은 벌컥 화를 냈다.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닌데,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서 함께 과자 굽는 건 일도 아닌데, 그걸 꼭 돈으로 환산하는 그의 물질만능주의가 싫고, 삼순에게는 집이 왔다 갔다 하는 5천만원을 무슨 만원짜리 주듯 하는 그의 행태가 눈꼴사나웠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사람 정 귀한 줄 모르는 요괴인간! 벰베라베라! 그래서 둘은 한바탕 싸웠고 미주를 부탁해야 하는 진헌은 꼬리를 내리고 30일째 기념일을 빙자하여 이렇게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삼순은 안나가겠다고 버틴다. 일영도 나가지 말라고 하고, 이영은 나가라고 한다. 하늘은 자기가 대신 나가면 안되냐고 한다. 결국 부모님한테 들킬까봐(부모님은 가짜연애와 5천만원의 관계를 모른다) 데이트에 응하는 삼순. 
  
그들의 30일 기념 데이트는 찜질방에서 시작된다. 삼순은 찜질방 매니아다. 특히 거적을 쓰고 들어가는 불한증막에 환장한다. 깔끔 떠느라 대중목욕탕에는 얼씬도 안하는 진헌은 남녀가 반바지를 입고 한 데서 땀을 흘리고 한 데서 잠자는 찜질방 문화에 아연실색한다. 그리고 땀 흘리면서 왜 그렇게들 먹고 마셔대는지. 진헌은 더 있자고 우기는 삼순을 데리고 나와 레스토랑에 간다. 보나뻬띠만큼 유명하기도 하고 주방장 뽈을 두고 스카웃 전쟁을 벌인 라이벌, 강남의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지배인이 진헌을 알아보자 진헌은 이 레스토랑의 모든 디저트를 다 시킨다. 잠시 후 50여 가지가 넘는 디저트가 나온다. 카시스 무스, 토파즈, 블랑망제, 니다베유, 몽 모랑시, 각종 과일을 얹은 타르트, 슈크림, 심플하지만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마카롱, 셀리멘/아나벨라/로셰 등 각양각색의 봉봉 오 쇼콜라, 아이스크림 과자 바슈랭, 눈이 부실 정도로 오색찬란한 그것들은 삼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일의 연장 아냐? 그때 삼순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으니 장채리다. 그 옆의 현우는 여전히 삼순을 모른 척 한다. 채리는 오늘 약혼반지와 드레스를 맞췄다고 하며 왜 삼순과 진헌이 이런 날 함께 있는지 궁금해 한다. 대답을 주저하는 삼순을 젖히고 진헌은 이렇게 말한다. 몰랐니? 내 피앙세야. 그 말 한마디에 채리와 현우는 각자 뜨악해진다. 채리는 불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현우는 자기와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새 남자를 만나는 삼순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배신감 때문에. 결국 현우는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삼순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나무란다. 내가 그런다고 너까지 이러면 우리 사랑은 뭐가 되니. 잊었니, 에펠탑에서의 키스를? 노틀담 성당의 약속은? 그리고 품위 없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풋내 나는 어린 남자애랑. 너 원래 그렇게 비윤리적인 여자였니? 현우는 달변이다. 삼순을 질책하는 말들이 술술 쏟아져 나온다. 한번 뭐에 홀리면 정신을 못 차리는 법, 삼순은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현우는 당장 헤어지고 나한테 오라고 한다. 그러면 파혼하겠다고 한다. 내가 진정 사랑하는 건 바로 너니까! 감격에 겨운 삼순에게 현우는 나중에 모처에서 만나자고 하며 떠난다.

레스토랑을 나온 삼순은 현우를 만나기 위해 진헌과 일찍 헤어져야 한다. 하지만 진헌은 밤늦게까지 있어야 한다고 우긴다. 아직도 미행남이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어수룩한 미행남이 아직도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삼순은 이 정도면 30일 기념 데이트로는 훌륭했다고, 미행남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보고할 거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진헌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바락바락 우기고 갑자기 현우를 보고 싶어진 삼순은 왈칵 진헌에게 화를 내며 사실대로 토해내고 만다. 그러면 보내줄 줄 알았건만 진헌은 삼순의 바보스러움에 대해 한탄한다. 그 남자가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면 파혼을 먼저 해야지, 그 남자 철면피다, 그 사악함을 간파하지 못하는 당신은 대체 세상을 어떻게 산 거냐! 듣고 보니 그렇다. 그러나 그녀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하지 말지어니, 잘 생기고 달변인 옛사랑이 작정하고 유혹하면 순진탱이들은 그 순간만큼은 홀딱 넘어간다는 사실! 홀림에서 빠져나온 삼순은 모처에서 현우를 만나 담판을 짓는다. 네가 먼저 파혼하고 돌아오라고. 그러나 현우는 네가 돌아와야 파혼하겠다고 한다. 진헌의 말이 맞았다. 이 놈은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 거다. 삼순은 얌전히 곱게 헤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 현우가 그녀를 다급히 붙잡고 한 말이 화근이 되었다. 현우는, 결혼은 채리랑 하고 연애는 삼순이 너랑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 나의 운명적 연인으로 남아달라고. 순간 삼순의 손은 그의 뺨을 올려붙이고, 머릿속에서는 복수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으니!

삼순이 현우의 뺨을 올려붙이던 그 순간, 진헌은 서랍 속의 핸드폰을 열어본다. 언제나 그랬듯이 별 기대 없이 열어본 핸드폰... 그런데 부재 중 전화가 와 있다. 그의 손이 떨린다. 그녀의 번호다. 그는 성급하게 그 번호로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 둔다. 나를 배신하고 간 여자에게 먼저 전화할 필요는 없다. 진헌은 다시 전화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 낡은 핸드폰을 손에 땀이 나도록 쥔 채... 전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 하룻밤이 지난다. 진헌은 핸드폰과 함께 잠이 든다. 내가 먼저 해볼까? 하는 유혹에 밤새 시달린다. 하지만 3년간의 고통이 그를 말린다. 다음 날 내내 그는 너무 고통스럽다. 성질 같아서는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부러뜨리고 산산조각을 내고 무참히 짓밟고 싶다. 드디어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벨이 울린다. 3년 전의 촌스러운 전화벨. 그녀의 번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린다. 가슴도 맥박도 널뛰듯 한다. 간신히 그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최대한 무뚝뚝하게, 최대한 차갑게. 너무 차갑게 받았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숨소리만 들린다. 여보세요. 재차 묻는다. 드디어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야, 희진이. 진헌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온 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서...

드디어 보나뻬띠에서 민현우와 장채리의 약혼식이 벌어지는 날. 삼순은 새벽부터 나와 3단 케잌을 만들고 있다. 주방도 단체손님을 맞느라 분주하다. 드디어 약혼식이 진행된다. 하얀 턱시도를 차려입은 현우와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채리는 꽤 잘 어울린다. 그들 앞에 3단 케이크가 입장한다. 케이크는 윤기 나는 연분홍빛! 현우와 채리는 다정하게 케이크 커팅을 한다. 그리고 케이크를 맛보는 사람들. 그런데... 사람들이 재채기를 하기 시작한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을 흘리고, 물을 찾고, 달아오른 입 속에 부채질을 해댄다. 삽시간에 약혼식장은 난장판이 된다. 그 시간, 방앗간에서는 아버지와 엄마가 청양고추 2근이 감쪽같이 없어졌다고 혀를 차고 있다. 문제의 발단이 케이크에 있다는 걸 알아낸 오지배인과 뽈은 삼순을 불러 경위를 묻는다. 삼순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고춧가루를 넣긴 했는데 이렇게 매울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그건 사실이다. 삼순은 그저 현우에게 불쾌한 케이크 맛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평생 ‘약혼식’ 하면 그 불쾌한 케이크 맛이 떠오르길 바랬다. 그게 그의 오만방자한 바람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그런데 이렇게 뒤집어질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오지배인이 사태수습을 하는 동안 삼순이 짓임을 간파한 현우는 주방으로 들이닥쳐 삼순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거 봐, 너 아직도 나를 못 잊고 있잖아. 잊었다면 이런 짓을 했겠어? 삼순의 고춧가루 소동을 퍼포먼스처럼 느낀 현우는 그녀에게 키스하려 하고, 순간 아찔해진 삼순을 대신해 그를 거칠게 밀쳐내는 이가 있으니 바로 진헌이다. 직선의 남자 진헌과 유들유들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관록의 남자 현우. 두 남자의 팽팽한 눈싸움은 삼순의 한마디로 끝이 난다. 놀고들 있네. 하지만 삼순은 진헌의 색다른 모습에 이미 놀라고 있다. 현우보다 한참 어리지만 결코 눌리지 않는, 아니 오히려 압도할 수 있는 남자다움이 그에게는 있다.

삼순은 오지배인으로부터 1개월 20프로 감봉처분이라는 징계를 받는다. 모두 클로징하고 퇴근한 시간, 진헌이 다가와 아까 주방에서의 그녀를 비난한다. 그렇게 당하고도 미련이 남아 추근대는 그에게 곁을 주었냐고. 발끈한 삼순은 또 한바탕 진헌과 싸우고 그러다 배가 고파진 그들은 팔다 남은 케이크를 나누어 먹고 케이크를 만들다 남은 브랜디와 꼬냑과 럼주도 마신다. 아까 그 남자, 사랑했어요? 그땐... 그랬던 것 같아요.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술기운과 함께 점점 깊어진다. 취기가 오른 삼순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그녀는 자기만의 Patissier Cafe를 갖고 싶다. 피로한 사람들에게 달콤함으로 활력을 주고 싶다. 인테리어도 구상해 놓았고 그릇과 장식품과 커튼까지 생각해 놓았다. 까페 이름은 최근에 읽은 책의 주인공 <파이-Pi>로 정했다. 그렇게 그들은 대화다운 대화를 한다. 처음으로 비꼬지 않고, 화내지 않고, 무시하지 않고, 속에 알뜰히 쟁여둔 마음 한 올 한 올을 풀어내며... 술의 열기와 대화의 열정으로 삼순의 뺨은 발갛게 달아오른다. 진헌은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준다. 아주 짧은 순간 눈빛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삼순은 진헌의 두 뺨을 부여잡고 기습키스를 한다!

 

 

그 후 - 

삼순의 기습키스에 놀란 진헌은 그러나 곧 키스에 응한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점점 격렬하게... 결코 의도하지 않은 키스를 하게 된 진헌과 삼순은 당황해한다. 

그 후 며칠동안 그들은 서로를 피한다. 마주쳐도 인사도 안하고 애써 외면한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그날 밤의 키스가 싫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더 당황스럽다. 삼순은 냉큼 그의 입술을 훔친 자신의 입술과 본능을 마구 구박한다. 밤새 잠을 설친 삼순은 새벽같이 출근해 그녀만의 레시피를 이용한 봉봉 오 쇼콜라를 만들어본다.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던 진헌이 레스토랑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는 주방에 들어선다.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 그 날 밤 이후로 처음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 진헌은 삼순이 만든 초콜릿과자를 처음 맛보는 사람이 된다. 삼순은 자기만의 초콜릿과자라며 이름을 붙인다. Raining Men.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 실연당한 여자들을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나? 하긴, 초콜릿에는 실연을 치유하는 페놀에칠아민 성분이 아주 많다. 조금 편해진 그들은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이런 결론을 도출한다.

    그냥 어쩌다 벌어진 실수!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해프닝!

찜찜한 키스의 추억을 대충 묻어버린 두 사람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진헌은 삼순을 제주도의 호텔 오픈식에 초대한다. 

진헌의 어머니인 나현숙 사장이 경영하는 호텔은 외조부인 나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나회장은 여러 개의 호텔을 슬하에 있는 다섯 남매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오늘 제주도에서 오픈하는 이 호텔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터이다. 욕심 많은 나현숙 사장은 그 호텔을 진헌의 몫으로 만들고 싶은데 진헌은 외조부의 호텔에 관심이 없다. 자기 밥상은 자기가 차리고 싶을뿐더러 여관장사보다는 밥장사가 그는 더 좋다. 하지만 집안행사라 빠질 수는 없고, 연애하는 척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삼순을 동반해야 했다. 억지로 제주도까지 끌려 내려온 삼순은 디저트로 나온 여러 가지 것들을 맛보며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현우와 채리를 만날 줄이야. 현우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이 호텔 건축에 관여한 일로 초대받아 채리와 함께 왔다. 진헌과 삼순을 보자 경쟁심리가 살아난 현우는 채리가 없는 틈을 타 진헌에게 농을 걸기 시작한다. 파리에서 자신과 삼순이 얼마나 뜨거운 관계였는지 에서부터 시작해 삼순의 신체의 비밀까지, 도대체 험담을 하는 건지 세련된 농담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그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이에 질세라 진헌의 화답 또한 만만치 않다. 마치 삼순과 뜨거운 관계를 맺은 것처럼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가운데 서서 얼굴이 자둣빛이 된 삼순은 나중에는 누가 누가 더 뻥을 잘 치나 한심하게 바라보게 되고, 급기야는 비위가 상한 두 남자  험한 욕설을 사이좋게 주고받더니 오 마이 갓! 주먹질까지 하게 된다. 주먹질은 발길질이 되고 발길질은 육탄전이 되어 품격 있는 호텔 오픈식의 축하연은 명문가의 두 자제에 의해 묵사발이 되고 있었으나 둘이 왜 싸웠는지는 상류층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는다. 다만 한 사람, 채리만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래서 진헌과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오는 삼순의 귓가에는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삼순이 언니랑 사귀었다고? 방앗간 집 딸이랑?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건 그레이드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진헌의 손에 이끌려 파티장을 빠져나온 삼순은 웃기 시작한다. 얼음왕자 같던 이 남자가 유치하게 쌈질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진헌이 웃지 말라고 해도 자꾸 웃음이 나온다. 진헌은 화가 난다. 이 여자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다. 웃지 말라고 두 번째 말해도 듣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진헌은 제 입술로 삼순의 입을 막아버린다. 웃다가 기습키스를 당한 삼순은 숨이 막힌다. 입술을 뗀 진헌은 넋이 나가있는 삼순에게 뜻밖의 말을 한다. 당신이 웃으면 나도 웃음이 나. 그런데 난 웃으면 안 되거든. 비로소 진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왜 웃으면 안 되는지, 죽은 형과 형수에 대한 죄책감을... 그리고 희진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그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3년을 어떻게 기다렸는지, 그리고 며칠 전 걸려온 그녀의 전화도... 진헌은 그녀를 당장 만나고 싶었다. 어디 있냐고, 당장 달려가겠다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서푼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과 오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무뚝뚝하게 굴었고 당황한 그녀도 차마 만나자는 말을 못하고 끊었다. 진헌은 희진의 이야기를 할 때면 더 퉁명스러워진다. 더 위악적이다. 삼순은 그게 마음이 아프다. 그 여자를 아직도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더 못되게 말하는구나.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왜 내 마음이 아프담? 삼순은 그들 사랑에 대한 연민이라고 치부하고 왜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진헌은 삼순의 턱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대답한다. 당신이 좋아졌거든. 

 

진헌은 삼순에게, 당신이 좋아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애하는 척 하는 것뿐이라고 못 박는다. 좋아하는 것과 연애하는 것과 사랑은 모두 별개의 것이라고. 삼순은 기가 막힌다. 내가 언제 연애하자고 했나? 웃겨 정말. 삼순은 툴툴거린다. 당신은 내가 좋아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좋아지지도 않았고 연애하고 싶지도 않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삼순은 조금 찔린다. 두 번째 키스의 여운 때문에...

  서울로 돌아온 며칠 뒤, 레스토랑에는 고춧가루 케이크 사건 이후로 가장 큰 소동이 벌어진다. 어린 애인과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아내가 오물을 뿌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바람둥이 남편은 이 레스토랑의 단골이다. 아내든 애인이든 여자한테 생색을 내고 싶을 때면 항상 이 곳으로 데려와 가장 비싼 요리를 시키곤 했다. 어린 애인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가고, 아내는 소리소리 지르며 남편의 멱살을 잡고, 실내에는 오물냄새가 진동을 하고,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진헌과 오지배인이 나서서 남편을 먼저 보낸다. 아내는 그대로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한다. 어서 소동을 접고 영업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몸처럼 오지랖도 푸짐한 삼순이 나선다. 얼마 전 새 레시피로 만들어낸 초콜릿과자를 들고 와 아내에게 내민다. 실연을 치유해주는 디저트예요. 이름은 Raining Men. 우리말로 하자면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온다는 뜻이죠. 요즘 우리 레스토랑에서는 실연당한 여자들한테 특별 이벤트를 열어준답니다. Raining Men을 공짜로 무한대로 제공해주고 사장님이 직접 위로송을 불러주지요. 삼순의 재치 있는 말에 여자는 울음을 멈추고 초콜릿 과자를 입에 넣는다. 그리고 신청곡까지 주문한다. 신청곡을 듣는 순간 삼순은 긴장한다. 하필이면 그 노래. Over The Rainbow. 진헌이 절대로 연주하지 않는 노래. 그런데 지금 이 소동을 접기 위해서는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 삼순은 얼떨결에 위로송을 연주해야 하는 진헌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힘들겠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저 문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고 연주해 봐요. 그래서... 진헌은... 연주를 한다. 희진이 떠난 후 한번도 연주하지 않은 그 곡을... 그 곡은 희진만을 위한 곡이었는데... 진헌의 피아노 소리와 잔잔한 노랫소리가 레스토랑에 흐른다. 모두 멈춘 채 무대 위의 진헌을 바라보며 피아노 소리를, 그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주방 사람들도 모두 나와 듣는다. 배신당한 아내도 노래에 도취되어 방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었다. 삼순은 밀랍인형처럼 굳은 채 진헌만을 바라본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아니다. 그래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나는 못 치는 피아노를 저렇게 잘 칠 수 있다는 걸 동경할 뿐이다.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모든 게 뒤바뀐다.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 안개꽃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자 유희진이... 진헌은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열망이 만들어놓은 환영. 그래서 계속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환영을 바라보며. 그가 환영을 바라보자 사람들도 모두 그 쪽을 쳐다보았다. 삼순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여자가 당당하게 입구에 서 있다. 진영의 입에서 ‘희진 누나?’라는 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어도 그녀가 유희진임을, 진헌이 3년간 기다렸다는 그 여자임을, 삼순은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삼순은 깨달은 게 있다. 그녀 김삼순이 현진헌이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연주를 멈춘 채 멍하게 희진을 바라보는 진헌을 보면서 삼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진헌은 희진을 데리고 근처 커피숍으로 간다. 3년 만에 만난 그녀 앞에서 진헌은 가슴이 너무 먹먹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말문을 여는 순간 가슴 속에 고인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겁이 난다. 희진은 3년 전처럼, 짐짓 밝게, 스스럼없이 대한다. 약속을 지키러 돌아왔는데 너는 애인이 있다며? 겨우 3년도 못 기다리니? 애교스럽게 힐난한다. 진헌은 그건 가짜연애라고, 너를 기다리기 위한 계약연애라고, 그 말조차 하기가 힘이 든다. 마음속에서는 너를 기다렸다고,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가슴 절절한 말들이 들끓고 있는데 정작 그의 입에서는 싸늘한 비난의 말들만 쏟아져 나온다. 희진의 가슴에 못을 박아 보내놓고 그는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며 울다가 웃다가 한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돌아왔다는 게 너무 좋아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서... 마침 퇴근이 늦어 주방에 홀로 남아있던 삼순은 울다가 웃다가 원맨쇼를 하는 그를 기가 막히게 바라본다. 드디어 진헌이 고개를 박고 쓰러지자 삼순은 그를 들쳐 업고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준다. 두 번째 들어오는 그의 방. 이번은 처음과 그 기분이 사뭇 다르다. 아는지 모르는지 진헌은 그녀를 안은 채 쓰러지며 ‘희진아’라고 중얼거린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뜬 진헌은 옆에서 삼순이 코를 골며 자고 있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러자 더 화를 내는 삼순. 희진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꽉 끌어안은 채 잔 게 누군데! 꼼짝도 못하게 껴안고는 곯아떨어진 게 누군데! 진헌은 곯아떨어져서도 놓칠세라 삼순(실은 희진)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잠꼬대까지 했었다. 완강한 힘에 움직일 수가 없자 삼순은 에라 모르겠다, 같이 잠에 빠져든 것이다. 본의 아닌 동침을 놓고 서로의 책임이라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삼순은 화들짝 놀란다. 혹시 또 나사장이? 비디오폰으로 확인하던 진헌의 얼굴이 굳는다. 희진이다. 

  어젯밤 진헌의 냉대에 가슴 아파하던 희진은 밤새 잠 못 이룬 채 뒤척이다가 아침 일찍 진헌의 오피스텔로 찾아왔다. 그런데 진헌은 삼순이라는 새 여자와 함께 있다. 이로서 삼순과 희진의 운명적인 조우가 이루어진다. 어젯밤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났지만 그때 희진은 삼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새 여자가 생겼다더니 이 여자구나. 그런데 연상녀? 거기다 뚱뚱하기까지? 서로를 탐색하는 두 여자의 눈길이 팽팽하다. 희진은 자신을 진헌의 옛사랑으로 소개하고, 삼순은 자신을 진헌의 현재진행형 사랑으로 소개한다. 왜 그랬는지 삼순은 모른다. 그저 희진이라는 젊고 예쁜 여자에게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삼순의 당당한 태도에 희진은 일단 물러난다. 진헌은 진짜 애인인 척 연기한 삼순에게 마구 화를 내고 삼순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집에 돌아온 삼순은 간밤에 무단외박을 한 것 때문에 엄마에게 빗자루 매질을 당한다. 엄마는 삼순에게 (가짜인 줄 모르고)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간밤에도 그 애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엄마는 함께 밤을 지냈으니 결혼해야 한다며 당장 그 놈을 데려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아버지가 알면 그 놈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거라며...

 

진헌은 희진이 머무는 호텔로 찾아간다. 삼순은 가짜애인이라고, 너를 기다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진실을 말하고 그녀의 진실을 듣고 싶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 네 마음은 어떤지, 난 아직도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애끓는 고백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자가 있다. 30대 중반의 점잖고 교양 있어 보이는 남자. 여유만만하게 악수를 청해오는 남자. 짧은 인사말을 영어로 하는 남자, 헨리킴. 앞뒤 가릴 것 없이 들이닥쳤던 진헌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희진을 뒤로 한 채 룸을 나서며 싸늘해진다. 남자를 데리고 들어오다니... 3년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호텔방에서 함께 머물 정도의 사이... 진헌은 두 번째 배신을 당한 것만 같다. 심한 절망감과 배신감에 치를 떨며 진헌은 호텔을 빠져나오고 뒤따라 희진이 달려온다. 그리고 해명한다. 그는 내 주치의야. 주치의? 진헌은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린다. 주치의하고 연애라, 그것도 미국 국적의 의사, 꽤 잘 어울리는데? 축하해. 희진이 오해하지 말라고 해도 진헌은 계속 비꼬고 비아냥거린다. 한번 상처 입은 그의 마음은 열릴 줄을 모른다. 결국 희진이 울음을 터트리며 사실을 털어놓는다. 나 위암이었어! 수술 받으러 간 거야! 위를 거의 다 떼어내고 항암치료 받고, 네가 형과 형수를 잃고 다리가 부서진 만큼, 나도 그만큼 힘들었어! 
  진헌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차츰, 이해할 수 없었던 희진의 언행들이 떠올랐고 그것들은 삽시간에 인과관계를 형성했다. 밤새도록 희진은 그간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말기암을 선고받고 휴스턴으로 떠나기까지 치열한 고민들, 미국에서의 처절한 싸움, 외로움, 헨리와의 만남, 진헌에 대한 그리움,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믿기 어려운, 정말 소설 같은 그 이야기들을 다 듣고, 진헌은 그녀 앞에 무릎 꿇는다. 그리고 울며 사죄한다. 아무것도 모른 죄를, 그녀를 증오했던 죄를, 외롭게 혼자 아프게 놔둔 죄를, 그녀의 병에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던 죄를... 울며 사죄하는 그를 끌어안고 희진도 오열한다. 그동안의 외로움과 두려움과 공포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것만 같다. 그토록 그리웠던 이 남자를 끌어안고 희진은 펑펑 울어댄다. 너한테 돌아오려고 버텼어. 이런 날만 꿈꾸면서 견뎠어. 그렇게 떠난 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두 사람이 3년 간의 오해를 푸는 동안 동이 서서히 터오기 시작하고...

  삼순은 진헌의 출근이 늦자 걱정이 된다.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었는데 점심영업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삼순은 근처에 있는 그의 오피스텔로 찾아가본다. 하지만 곧 후회하고 절망한다. 오피스텔에는 희진이 있었다. 진헌과 함께 밤을 지새운 듯 두 사람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점심 도시락까지 싸온 삼순은 그만... 진헌의 뺨을 때리고 정강이까지 걷어차고 나온다. 진짜애인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이람? 그 생각이 든 건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다. 삼순에게 뺨 맞고 정강이까지 채인 진헌은 진짜 애인에게 바람피우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도 삼순을 진짜애인으로 알고 있는 희진은 걱정을 하고, 진헌은 삼순과 헤어질 거라며 희진을 안심시킨다. 너를 기다리느라 가짜애인을 고용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둘러대었다. 
  설상가상으로 채리가 레스토랑까지 와 삼순을 괴롭힌다. 희진이 왜 갑자기 진헌을 떠났었는지를 미주알 고주알 알려주면서 살살 약을 올린다. 그리고 현우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 해주는지도... 삼순은 집에 돌아와 엉엉 울기 시작한다. 이제 곧 진헌에게 버림받을 거라는 예감에 실연의 눈물을 펑펑 쏟는다. 세 자매는 삼순의 눈물에 대해 온갖 추측을 해댄다. 덕분에 엄마는 삼순이가 밤을 지새운 그 놈과 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그 놈이 삼순의 고용주라는 사실도! 빗자루를 치켜세우고 당장 레스토랑으로 쳐들어갈 것 같은 엄마를 아버지가 말린다. 그리고 삼순에게 이른다. 조만간 데리고 와서 인사시키라고. 삼순은 진짜 애인이 아니라 가짜 애인이었다고 이제는 다 끝났다고, 그렇게 해명하다 매만 더 번다.

  며칠 뒤 삼순은 이영언니가 마련해준 돈(이영이 위자료조로 받은 아파트가 이제야 팔렸다) 오천만원을 들고 레스토랑에 출근한다. 그 돈을 돌려주고 계약종료를 선언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돌아왔으니 억지 맞선을 볼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나와의 계약연애도 필요 없는 것 아니냐! 삼순은 사표도 낸다. 진헌은 계약파기만 받아들이고 사표는 반려한다. 오히려 그녀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한다. 염장 지르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오기가 발동한 삼순은 그 날 오후에 있는 농구게임에서(직원들은 주방과 홀로 편을 갈라 자주 농구를 한다. 전직 농구선수인 삼순이는 유일한 여자로 게임에 참가한다) 진헌에게 무지막지한 태클을 건다. 게임은 삼순이네 팀의 완승으로 끝나고 진헌은 멍투성이가 된다. 

  진헌은 희진과의 결혼을 추진한다. 나사장은 반대한다. 2년이 지나 5년을 채우고 완치되었다는 소견이 나올 때까지만 참으라고 한다. 진헌은 지금 결혼해서 완치될 수 있도록 자신이 도울 거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에 장애물이 되는 건 나사장 뿐만이 아니다. 헨리킴. 이 묘한 남자가 자꾸 진헌의 눈에 거슬린다. 희진과 헨리킴은 스위트룸에서 각기 다른 방을 쓰고 있다. 헨리킴은 희진에게 가끔 나타나는 덤핑증후군(위절제후 나타나는 부작용)을 관리해주고 영양관리도 해주고 심한 빈혈증세가 나타나면 비타민 B12도 주사하며 그녀를 보살펴준다. 희진도 진헌을 이해시키려 한다. 남녀관계가 아니라 신뢰로 맺어진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고. 그가 날 사랑하긴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진헌은 희진의 특별한 상황을 감안해 이해하려 애쓰지만 참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신경이 쓰이면서도 헨리킴 그에게 진헌도 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헨리킴에게는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여유와 따뜻함이 있었다.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그는 차츰 헨리킴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의심도 증폭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진헌이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으니...

  나이 들어 사랑에 상처입는 것만큼 치명적인 게 또 있을까? 진헌이 희진과의 결혼을 강행하는 동안 서른을 목전에 둔 삼순은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씩씩한 김삼순은... 통통한 김삼순은... 살이 쏙쏙 빠지고 있다. 사랑에 상처 받아, 진헌의 사랑에 목이 말라, 눈에 뵈는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다. 남몰래 흘리는 삼순의 눈물이 밀가루 반죽 속으로 스며든다. 삼순은 다시 사표를 낸다. 희진과 결혼한 그를 볼 자신이 없다. 진헌은 끝까지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다. 유능한 파티쉐를 잃고 싶지 않다며. 그러나 삼순은 출근하지 않는다. 레스토랑을 관두고 삼순은 불어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경비는 없지만 일단 파리로 날아가 요리공부를 더 해볼까 생각중이다. 부딪히면 살아갈 방도는 있기 마련이다.
  진헌에게는 이상한 변화가 생긴다. 삼순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 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설탕덩어리 디저트들이 먹고 싶어지고, 주방에서 삼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이상하고, 농구장에서 남자직원들끼리만 농구하는 게 영 어색해 보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여자들이 다 삼순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희진이마저 삼순이로 보인다! 이 여자가 내가 먹던 케이크에 이상한 약을 넣었나? 진헌은 다시 출근하라고 전화를 하지만 전화기는 항상 꺼져 있다. 미주를 만나러 오지도 않는다. 뽈과 연애하는 이영누님을 통해 들으니 유학 준비하느라 불어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여자가 계약기간도 안 끝났는데 감히 마음대로 움직여? 괘씸해진 진헌은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런데 이 여자, 현우와 함께 오는 게 아닌가? 불끈 화가 치민 진헌은 삼순에게 마구 화를 내고, 삼순과 진헌의 연애가 가짜였음을 이미 알고 있는 현우는 연극 그만하라고 하고, 진헌은 부지불식간에 주먹을 날리고, 두 남자의 유치찬란한 쌈질은 제주도의 1편에 이어 서울 부암동 골목에서 2편이 이어진다. 싸움은 삼순이 진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끝이 난다. 자하문 가로등 밑에서 상처투성이 얼굴에 약을 발라주던 삼순은 그를 다시 만난 게 너무 반갑고, 진헌도 그녀를 다시 보니 마음이 놓이고 기쁘고... 해서 두 사람은 키스를 한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키스를!
   실수가 아닌 자의적인 키스를 하고 난 후 진헌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 삼순이와 희진이. 도대체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6년을 사랑하고 3년을 기다린 여자와 만난 지 몇 달 밖에 안 된 뚱뚱한 가짜애인과 둘 중 누구를 당신은 사랑하겠는가, 라며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실제로 술에 취해 합석한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한 남자는 옛날애인에게 가라고 하고 한 남자는 뭐든 새 것이 좋다며 삼순에게 가라고 한다. 점도 쳐본다. 한 집에서는 희진이 천생배필이라고 하고 그 앞집에서는 삼순이가 전생에도 아내였다고 한다. 진영에게 슬쩍 물어보니 희진 누나는 얼굴이 예뻐서 좋다고 하고 삼순이 누나는 왕가슴이라서 좋다고 한다. 미주에게 물어보니 희진 아줌마는 피아노를 잘 쳐서 좋다고 하고 삼순이 아줌마는 당연히 케이크를 잘 만들어서 좋다고 한다. 다들 사전모의라도 했는지 희진과 삼순 다 좋다고 한다. 


중략...

 

 

삼순과 진헌이 서로 사랑을 한다. 너무 사랑해 주위 사람들이 돌아버릴 지경이다. 삼순은 진헌을 집에 데려와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시킨다. 아버지는 연신 술을 권하고 집에서 담근 독한 과일주를 연거푸 들이킨 진헌은 곧 뻗어버리고 만다. 자매들은 곯아떨어진 진헌을 자기들 방 한가운데 눕힌다. 그리고 빙 둘러앉아 요모조모 관찰을 한다. 콧수염에서부터 땀구멍까지. 엄마도  가세한다. 평생 딸만 키운 엄마는 강아지도 암컷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길가에서 아기가 예쁘다고 막 어르다가도 계집애인 걸 알면 냉큼 돌려주고야 만다. 못난이 삼순이가 어떻게 이런 예쁜 청년을 꼬셨는지 엄마는 기특해 죽겠다. 아침에 일어난 진헌은 사위대접에 얼큰한 해장국(그렇게 맛있는 콩나물국은 처음이었다! 정말로!)까지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고 집을 나선다. 그렇게 장인장모에게 인정도 받고 초절정엽기닭살커플을 이루던 진헌은 희진의 병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희진은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하는 내시경검사와 CT촬영을 지인이 있는 병원에서 하고 재발의 징후를 발견한다. 휴스턴으로 돌아가 정밀검사를 한 후 필요하다면 재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다시 받아야 한다. 먼저 돌아간 헨리킴이 이미 스케쥴을 모두 잡아놓았다. 희진은 진헌에게 함께 가주기를 부탁한다. 그때처럼 혼자 외롭게 떠나고 싶지가 않다고 한다. 

 

진헌은 극심한 갈등을 한다. 삼순이를 사랑하지만 희진을 혼자 보낼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결국, 진헌은 그녀와 함께 떠나기로 한다. 비록 삼순이를 사랑하지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그녀를 도저히 혼자 놔둘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3년 전 희진이 했던 말을 삼순에게 한다. 3년만 기다려줘. 돌아올게. 꼭 돌아올게. 그러자 삼순이 소리친다. 야, 이 나쁜 새끼야! 3년 후면 내가 몇 살인 줄 알어? 그때까지 나더러 기다리라고? 못해! 가고 싶으면 나랑 끊고 가! 삼순은 이 모든 불행이 다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희진과 함께 떠나던 날, 삼순은 하루 종일 공항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있다. 떠난 줄 알았던 사람이 문이 열리고 다시 나타나는 뻔한 기적의 장면! 삼순은 그럴 줄 알았다. 문이 열리고 그가 다시 나타나 놀랬지? 하며 그녀를 안아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나오지 않았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환타지가 일어날 만큼 그녀는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고 젊지도 않다. 그녀는 집으로 오는 공항버스 안에서 내내 울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났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삼순은 그가 떠났음을 인정하고 일을 핑계 삼아 그를 잊은 척 한다. 일이란? 얼마 전에 오픈한 인터넷상의 온라인 케이크전문점이다.

 

삼순의 케이크는 온라인상에서 조용한 반향을 일으킨다. 삼순은 열심히 케이크를 만들고 이영언니가 홈페이지 관리 등 운영업무를 맡는다. 1년 뒤 오프라인 가게까지 오픈하는 날, TV에서 한라산을 본 삼순은 충동적으로 배낭을 꾸려 제주도행 비행기를 탄다. 그때 그가 그랬었다. 형과 열아홉 살 때 올랐던 산이라고, 거기서 형과 함께 끓여먹었던 라면 맛과 커피 맛, 그리고 담배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사고 후에는 오기로 올랐다고 했다. 망가진 다리로 정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 뭐든 새출발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올랐다고, 거기서 희진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고... 삼순이 오른 산 중에 가장 높은 산은 수학여행 때 석굴암을 보러 올라간 토함산이다. 그것도 친구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겨우겨우 올라갔었다. 그런 그녀가 남한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한라산에 오를 수 있을까? 한 시간도 못가 삼순은 검은 현무암을 치며 후회한다. 내가 왜 이 지랄을 하나. 그것도 돈까지 내가면서. 그래도 내려가기는 싫다. 다리 망가진 사람도 올라가는데 이 튼튼한 다리로 못할까봐. 반쯤 올라가니 내려가고 싶어도 못 내려간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옷은 땀에 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산길은 하늘까지 이어졌는가? 가까이서 야호! 소리가 들린다. 정상이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린다. 남은 힘을 쥐어짜 정상에 오르는 김삼순, 순간 눈앞에 낯익은 남정네가 보인다. 삼순은 그를 보자마자 배꼽을 잡고 웃어댄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돼서, 그가 여기 있다는 게 너무 웃겨서, 꼭 꿈인 거 같아서, 내가 미쳤나 싶어서... 그렇게 웃다가 그가 환영이 아니라 진짜 사람, 현진헌, 이라는 걸 알고 삼순은 울기 시작한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게. 내가 다시 한라산에 올라오면 사람이 아니다!

 

희진의 수술은 잘 이루어졌다. 진헌은 성심을 다해 그녀를 간병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헨리와 희진의 관계에 대해서다. 헨리와 희진은 남녀관계 이상의 무언가를 교감하고 있었다. 친구이면서 연인이면서 환자와 주치의이면서 그리고 그 모든 걸 초월하는 신성한 그 무언가를... 희진도 나중에는 인정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고, 그때 곁에 있어준 사람이 헨리였다고, 우습게 들리겠지만 너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 사람에게 의지했다고,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그러니 이제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삼순씨에게로 돌아가라고...  진헌은 아침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해 곧바로 삼순의 집으로 달려갔고 자매들에게 삼순의 행적을 물어 여기까지 한달음에 왔다. 그리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는 삼순을 다른 코스로 이미 따라잡고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삼순이 감격에 겨운 울음을 그치자 진헌은 왕싸가지답게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 연애하는 척 할래요? 계약기간은 한 60년? 아니, 종신으로 할까요 김삼순씨?”
    “난 이제 김삼순이 아니야. 김희진은 더더욱 아니야. 김나영이야. 법원에서 개명허가 받았어.
     구청에 가서 신고만 하면 돼. 그러니까 너도 이제 나영씨라고 불러.”

삼순은 자랑스럽게 개명허가서를 흔들지만 이내 진헌에게 빼앗긴다. 진헌은 허가서를 거침없이 찢더니 훨훨 날려버린다. 천국의 바람이 불어와 길길이 날뛰는 삼순의 머리카락을 흩어버리고 종이조각들도 날려버린다. 천국의 바람이...

'드라마 기획안' 카테고리의 다른 글

KBS <프로듀사>  (0) 2020.05.15
MBC <해를 품은 달>  (0) 2020.05.15
MBC <개인의 취향>  (0) 2020.05.15
SBS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0) 2020.05.15
SBS <시크릿 가든>  (0) 2020.05.15

댓글